지리산문학51현

 

지리산문학51현(1910년이전지리산지역출생성장거주,작품창작문학선현 51명)-지리산문학관은 지리산문학인 51명(현대문학)과 지리산문학51현(한문학,고전문학)을 종합적으로 기념하는 문학관이다

 

영재(永才)스님(신라 원성왕(785-798) 시대)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 1345~1405)

별동(別洞) 윤상(尹祥, 1373(공민왕 22)∼1455(단종 3)) <次咸陽學士樓題> 頭流山迫白雲間。傍麓經營問幾官。最是許州鍾秀氣。稟生人傑滿朝端

개암(介菴) 강익(姜翼, 1523-1567)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1540(중종 35) ~1603(선조 36)

춘수당(春睡堂) 정수민(鄭秀民, 1577~1658)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 1812~1884)

전18현+후18현=36

                    우적가(遇賊歌)

                                                                                 영재(永才)


 영재 스님은 천성이 활달하여 재물에 얽매이지 않았다. 향가를 잘하였는데 늙은 나이에 남악에 은거하려 했는데 대현령에 이르러 60여 명의 도적을 만났다. 죽이려 했지만 영재는 칼날 앞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태연히 맞섰다. 도적들이 괴이하게 여겨 이름을 물으니 영재라 하였다. 도적들이 본래 그 이름을 들었으므로 이에 □□□ 명하여 노래를 짓게 했다. 노래는 이러하다.


自矣心米

皃史毛達只將來呑隱日

遠島逸□□過出知遺

今呑藪未去遺省如

但非乎隱焉破□主

次弗□□史內於都還於尸郞也

此兵物叱沙過乎

好尸曰沙也內乎呑尼

阿耶 唯只伊吾音之叱恨隱㵛陵隱

安支尙宅都乎隱以多


[해독]

제 마아매

즛 모다렷단 날 

머리 □□ 디나치고

열딴 수메 가고쇼다

오직 외온 破戒主

저플 즈새 나외 또 돌려

이 잠갈아 디내온

됴흔날 새누옷다니

아으 오지 이오맛한 善은

안디 새집 다외니다


[해석]

제 마음에

모든 형상을 모르려 하던 날은

멀리 □□ 지나치고

이제는 숨어서 가고 있네

오직 그릇된 파계승을

두려워할 모습으로 (내 어찌) 다시 또 돌아가리오?

이 칼이야 지내고 나면

좋은 날이 새리라 여겼더니

아, 오직 요만한 선은

새 집이 아니 되느니라


[핵심 정리]

 지은이 : 영재(永才 ?-?) 신라 원성왕 때의 승려

 연대 : 신라 원성왕 때(785-798)

 갈래 : 향가

 형식 : 10구체

 성격 : 교훈적. 교화 설득적

 의의 : 도둑의 무리를 만나 회개(悔改)시킨 설도(說道)의 노래

 주제 : 도둑에 대한 교화(敎化)

 출전 : 삼국유사

 

지리산문학십팔현

 

1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

2쌍명재(雙明齋) 이인로(李仁老, 1152~1220)

3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

4통정(通亭) 강회백(姜淮伯, 1357~1402)

5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역주 <점필재집>Ⅰ,Ⅱ, 2010

6청파(靑坡) 이육(李陸, 1438~1498)

7뇌계(㵢谿) 유호인(兪好仁, 1445~1494)

8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
국역 <일두집>

9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1454~1492)

10매계(梅溪) 조위(曺偉, 1454~1503)

11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

12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 1470∼1550)

13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14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

15옥계(玉溪) 노진(盧禛, 1518∼1578)

16개암(介庵) 강익(姜翼, 1523∼1567)
국역 <개암집>

17도탄(桃灘) 변사정(邊士貞, 1529∼1596)

18청계(靑溪) 양대박(梁大樸, 1543~1592)

 

지리산문학십팔현·후 전시대

 

1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1546~1632)

2태촌(泰村) 고상안(高尙顔, 1553~1623)

3감수재(感樹齋) 박여량(朴汝樑, 1554∼1611)

4어우(於于) 유몽인(柳夢寅, 1559~1623)

5송파(松坡) 이해창(李海昌, 1599~1655?)

6운제(雲堤) 노형필(盧亨弼, 1605~1644)

7구당(久堂) 박장원(朴長遠, 1612~1671)

8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 1625~1707)

9범허정(泛虛亭) 송광연(宋光淵, 1638~1695)

10명암(明庵) 정식(鄭栻, 1683∼1746)

11동계(東谿) 조귀명(趙龜命, 1693~1737)

12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

13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 1741~1793)

14의재(宜齋) 남주헌(南周獻, 1769~1821)

15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

16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

17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

18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 1870~1946)

 

지리산문학십팔현음

 

김윤숭

 

1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

 

당나라 한림학사 천령군 태수로 와

학사루 올라보고 대관림 걸어보고

고운님 우러러보나 향사를 데 어디 없다

 

2쌍명재(雙明齋) 이인로(李仁老, 1152~1220)

 

죽림칠현 본따서 죽림고회 모여 놀고

지리산 유람하며 청학동을 찾아보고

청학동 찾는 이마다 쌍명재를 거론하다

 

3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

 

방장산 속 제계서재 목은 선생 은거하고

사숙재 차지하고 대사헌공 물려받고

사위로 이어진 재산 지금은 뉘 것인가

 

4통정(通亭) 강회백(姜淮伯, 1357~1402)

 

사숙재의 조부인 통정공 소년 시절

단속사서 독서하고 정당문학 오르고

그 심은 매화 한 그루 정당매라 불리다

 

5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점필재의 유두류록 지리산 제일 문장

차밭 읊은 다원이수 애민정신 느껴지고

학사루 현판 사건은 천추의 한 부르다

 

6청파(靑坡) 이육(李陸, 1438~1498)

 

천왕과 가섭 석상 칼날 불길 상처남고

영험하다 절마다 당을 세워 제사하고

문창후 죽지 않고서 거북봉에 산다네

 

7뇌계(㵢谿) 유호인(兪好仁, 1445~1494)

 

지리산 북쪽 고을 함양의 제일 시인

뇌계는 뇌계 냇가 뇌계정에서 되뇌며

천령골 양대 하천인 남계 뇌계 시 읊다

 

8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

 

일두선생 화개음은 지리산 제일시

두류산 천만 첩을 외로운 배에 싣고

유유히 섬진강 따라 큰 바다에 이르다

 

9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1454~1492)

 

육신전이 없었다면 사육신도 없었겠지

사육신정신 본받아 생육신으로 고생하고

추강은 화엄사에서 근사록을 강론하다

 

10매계(梅溪) 조위(曺偉, 1454~1503)

 

점필재의 처남으로 제자인 매계선생

자형 따라 등정하고 함양군수 부임하고

순천에 귀양살이하며 한훤당과 강학하다

 

11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

 

일두 탁영 유람은 지리산 제일 우정

탁영의 속두류록 사림 전통 초석 되고

천고의 청계정사는 사림 정신 성지 되다

 

12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 1470∼1550)

 

산음현감 시절에 쌍계사를 찾아 읊고

곤양군수 시절에 퇴계 맞은 관포선생

함양의 망악루에서 어진 시인 그리다

 

13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지리산을 사랑하여 열두 번이나 답사하고

천왕봉 아래 터잡고 넋조차 떠나지 않고

남명은 지리산 제일인 지나친 말 아니다

 

14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

 

금대의 종소리 함께 들은 법행 스님

천왕봉 길 안내해 절정 오른 금계 선생

두류산 기행편 시집은 서경시의 진수다

 

15옥계(玉溪) 노진(盧禛, 1518∼1578)

 

장수사 유람하고 골짝 역사 남기고

화개동 유허에서 일두 시에 차운하고

옥계는 두류암에서 천왕봉을 쓰다듬다

 

16개암(介庵) 강익(姜翼, 1523∼1567)

 

명현을 흠모하여 두 번째 서원 건립하고

개구리 떼 와글대니 등구 골에 피정하고

개암이 먼저 떠나니 남명 크게 애도하다

 

17도탄(桃灘) 변사정(邊士貞, 1529∼1596)

 

옥계의 문인으로 율곡을 변호하고

사림파 전통 이어 유두류록 남기고

도탄은 임란 의병장 과로로 순국하다

 

18청계(靑溪) 양대박(梁大樸, 1543~1592)

 

백무당 타기하며 천왕봉 오르고

임란에 의병 활동 진중에서 순국하다

청계의 청계동계곡 맑은 정신 흐르다

 

지리산문학십팔현·후

 

1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1546~1632)

 

단속사의 삼가귀감 책판 사른 기개 있고

50년전 쌍계사 겨울 석 달 역사 읽고

고희에 쌍계사 유람길 방장 팔선 노닐다

 

2태촌(泰村) 고상안(高尙顔, 1553~1623)

 

함양 고을 수령으로 천왕봉에 올라 자고

해돋이 바라보며 막힌 속내 탕척하고

월명총 기우제 사연 효빈잡기 남기다

 

3감수재(感樹齋) 박여량(朴汝樑, 1554∼1611)

 

30년전 친구와 군자사서 독서하고

그 친구와  다시 함께 군자사를 유람하고

백무동 길로 세 번째 천왕봉에 오르다

 

4어우(於于) 유몽인(柳夢寅, 1559~1623)

 

점필재는 의탄촌으로 어우는 마적동으로

각자 갈길 선택하여 천왕봉에 오르고

명산을 유람한 소감 두류산을 첫째 치다

 

5송파(松坡) 이해창(李海昌, 1599~1655?)

 

조정에서 벼슬살다 여러 군데 귀양살고

함양군수 아들로 실상촌 우거하고

천령지 서문도 쓰고 선생안도 만들다

 

6운제(雲堤) 노형필(盧亨弼, 1605~1644)

 

함양현감 최산휘와 남계서원 해후하고

군수 아들 이해창과 친구한 운제선생

실상촌 새 터를 잡아 무진장을 벗하다

 

7구당(久堂) 박장원(朴長遠, 1612~1671)

 

안음현감 부임하여 일두 선생 흠모하고

사근찰방 친구라서 길벗 삼아 산행하고

백무당 천왕봉 올라 월출 일출 다 보다

 

8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 1625~1707)

 

산수를 좋아하여 삼남 지방 유람하고

지리산에 머물며 많은 사찰 관람하고

우담의 산중일기는 기행문의 진수다

 

9범허정(泛虛亭) 송광연(宋光淵, 1638~1695)

 

순창군수 부임하여 선정비도 남아있고

순천 곡성 수령들과 쌍계 고운 찾아가다

백무동 하산하는 길 함양군수 대접하다

 

10명암(明庵) 정식(鄭栻, 1683∼1746)

 

지리산에 은거하여 골골이 답사하고

팔도 명산 바위마다 호와 이름 새기고

천고의 모르는 사람들 자연 훼손 탓하고

 

11동계(東谿) 조귀명(趙龜命, 1693~1737)

 

동강과 마찬가지 동계도 군수 아우

서계와 와룡대 용유담과 운학정

심지어 안음 심진동 발자취 두루 및다

 

12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덕유 삼동 명승 고을 안의현감 연암선생

함양 상림 제방 쌓고 학사루 기문 짓고

벽돌집 하풍죽로당 실학 건축 대표하다

 

13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연암학단 사검서관 정조임금 총애받고

함양 지역 사근도에 찰방 부임 아정선생

기록한 한죽당섭필 향토사료 풍부하다

 

14의재(宜齋) 남주헌(南周獻, 1769~1821)

 

쌍계사로 입산하여 백무동으로 하산하고

상봉은 함양 소속 함양 아전 산막 짓고

바위에 방장 수령 아무개 친필 명단 새기다

 

15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

 

70 되는 나이에 천왕봉 등정하고

산천재 방문하여 백세 기풍 흠모하고

을사년 늑약에 창의해 대마도서 순국하다

 

16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

 

안복이 두터워 오악 명산 두루 보고

사문 의식 강하여 고운도 비판하지

을사년 국권 상실 늑약 어찌 살아 보리오

 

17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

 

절명시의 매천선생 지리산 제일 충신

벼슬 안한 선비로 지식인의 책임 다해

국록을 실컷 먹은 자는 나라까지 팔아먹고

 

18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 1870~1946)

 

선비골 참된 선비 시에 능한 회봉 선생

다행히 파리장서운동 보람 안고 미소짓다

동방의 시와 유학 집대성하고 체계화하다

 

개암 강익 시조

 

강익(姜翼, 1523-1567)은 종중,명종 때의 학자다. <명종실록>과 <국조인물고>에 따르면, 그의 자는 중보(仲輔)이고 호는 개암(介菴)이며 본관은 진주로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27살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하기를 싫어하여 학문과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지리산 기슭 함양 구동(龜洞)에 전지(田地)를 마련하여 살았다. 44살(명종21년, 1566)에 정여창(鄭汝昌)의 신원을 호소하는 상소문을 올린 33명의 소두(疏頭)가 되었다. 이듬해 천거로 소격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그 해 겨울에 죽었다. 노진(盧禛), 김우옹(金宇顒) 등과 함께 배웠다.

 물아 어디 가느냐 갈 길 멀었어라.
 뉘누리 다 채와 지내노라 여흘여흘
 창해(滄海)에 못 미칠 전이야 그칠 줄이 있으랴.

 시비(柴扉)에 개 짖는다 이 산촌에 그 뉘 오리.
 댓잎 푸른데 봄새 울음소리로다.
 아이야 날 추심(推尋) 오나든 채미(採薇)갔다 하여라.

 지란(芝蘭)을 가꾸려 하여 호미를 둘러메고
 전원(田園)을 돌아보니 반이나마 형극(荊棘)이다.
 아이야 이 기음 못다 매어 해 저물까 하노라.

 세 수 모두 학문과 교육에 종사하며 전원생활을 즐기는 시인의 생활과 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첫 수는 <맹자> 이루편(離婁篇)에 나오는 ‘물은 작은 구멍이라도 다 채운 다음에 흘러간다(盈科而後進).’라는 말을 상기하여 학문을 완성함에도 점진적으로 성취해 나가야 한다는 뜻을, 물을 제재로 표현하였다. 초장에는 물을 불러 갈 길이 멀다고 하였는데 이는 물이 흐르는 것이 학문성취 내지 백성교화를 함축하기 때문에 그 길이 멀다고 한 것이다. 중장에서는 강물도 여울이나 웅덩이를 다 채워서 흘러가듯 학문이나 교화도 긴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암시하였다. 종장에서는 물이 바다에 닿기까지 끊임없이 흘러가듯이 학문과 교화의 완성에도 쉼 없는 노력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둘째 수는 전원에 숨어사는 은자의 생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립문에 개가 짖지만 누가 올 리도 없고 오기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봄이 되니 댓잎은 더욱 푸르러 보이고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도 싱그럽다. 이렇게 봄날의 산촌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려놓고 종장에서 혹시 누군가 자기를 찾으러 온 사람이 있더라도 만나기 싫으니 산속으로 고사리 캐러 갔다고 둘러대라고 이른다. 조용한 전원 풍경이지만 개 짖는 소리나 손님마저 따돌려서 은둔을 방해 받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극적 긴장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마지막 수는 전원에서 지란을 가꾸며 살기도 어렵다는 말로, 고결하게 살아가려는 자신의 지향을 지키려는 각오를 흥(興)의 수법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초장에 나온 지란은 <공자가어(孔子家語)>에서 “지란은 깊은 숲 속에 자라는데 찾는 사람이 없어도 향기를 풍긴다. 군자는 도를 닦아 덕을 길러서 어려움에 처해도 절개를 더럽히지 않는다.”라고 한데서부터 조용히 숨어 살면서도 몸가짐을 닦아 지조를 지키는 선비를 상징하게 됐다. 지란을 가꾼다는 말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자신의 몸가짐을 닦아 덕망을 기르는 일을 뜻한다. 중장에서 전원을 돌아보니 가시가 반이라고 하여, 선비의 덕을 기르며 살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는 가시밭 같은 상황이라고 했다. 이해(利害)나 욕망에 휩쓸리기는 순박한 전원생활에서도 있기 마련이다. 종장에서 김매는 데 하루해가 저물겠다고 하여 선비의 몸가짐을 실천하려면 인욕(人欲)을 막는 가르침을 펴야 할 터인데 이 일이 만만치 않음을 말하였다. 이렇게 지란으로 상징된 선비의 몸가짐을 실천하기 위하여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여, 스승인 조식이 강조한 선비의 실천적 지조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만년에 벼슬에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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