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고전문학 독서경시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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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교육청·지리산문학관, 함양고전문학 독서경시대회 열어
고전 읽고 문제 풀며 애향심 ‘쑥쑥’
초·중·고교생 200여명 참가
기사입력 : 2011-09-22  



함양교육청이 함양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고전문학을 학생들에게 읽게해 주인의식을 심어주고 있다.

함양교육청(교육장 조길래)과 지리산문학관(대표 최은아)은 지난 17일 함양초등학교에서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등 2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1회 함양고전문학 독서 경시대회를 가졌다.

이번 대회는 경남도교육청의 특색과제인 ‘책 읽는 학교’ 독서운동을 학교현장에서 확산해 정착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참가 학생들은 지리산문학관(www.jimun.kr)에 탑재돼 있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경상도 함양군 안음현, 유두류록(점필재 김종직), 용문몽유록(신착), 열녀함양박씨전(연암 박지원), 한죽당섭필(아정 이덕무) 등 함양고전문학 5종을 읽고 필기시험 형태로 문제를 풀었다.

한문으로 되어 있는 고전문학의 원서를 김윤수 인산닷컴 이사장이 한글로 번역한 <등재한> 것으로 초·중·고등학생들에게는 내용의 일부가 어렵기도 했다.

조길래 교육장은 “학생들이 우리 고장에 전해 내려오는 고전을 읽음으로써 고장을 이해하는 기회가 돼 주인의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이 살고 있는 고장이 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대회를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서희원기자


취지

경상남도 교육감의 책읽는 학교 독서운동을 학교현장에서 실현하고 지역전통문화의 이해 증진을 위하여 함양지역 각급학교에 함양고전문학 5종을 권장하여 학생들에게 읽게 하는 독서운동을 전개하고 그 보람을 키워주기 위하여 독서경시대회를 개최하여 격려한다.

시상 요강


함양지역의 초중고 학생이 다음 열거한 함양고전문학 5종을 읽고 독서경시대회에 응시하면 5종 각 5문제 총 50문제 필기시험 최다정답자를 선발하여 시상한다.


대상(경상남도교육감상) 초중고 각 1인(각 50만원) 합 150만원
금상(함양군장학회이사장상) 초중고 각 3인 합 9인(각 30만원) 합 270만원
은상(함양교육장상) 초중고 각 5인 합 15인(각 20만원) 합 300만원
동상(학교운영위원회함양지역협의회장상) 23인(각 10만원) 합 230만원 총 950만원
참가상 도서상품권 2만원×100장 200만원 총계 1150만원
*동상은 성적순을 고려하지 않고 학교별로 안배한다. 함양관내 초중고 23개교에서 1인씩(학생이 다수 응시할 경우)
*참가상은 수상여부를 불문하고 참가학생 전원에게 준다.


주최: 함양교육지원청, 학교운영위원회 함양지역협의회, 지리산문학관

후원: 경상남도교육청, 경남메세나협의회, 함양군장학회, 함양문화원

 

함양고전문학 5종(한글파일)


(지리산문학관(www.jimun.kr) 홈페이지에 5종의 번역문이 실려있음)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경상도 함양군`안음현

기행문학: 유두류록(점필재 김종직)

소설: 용문몽유록(신착)

전기문학: 열녀함양박씨전(연암 박지원)

수필: 한죽당섭필(아정 이덕무)

 

함양고전 5종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경상도 함양군 · 안음현

 

 

동쪽으로 안음현(安陰縣) 경계까지 37리이고, 남쪽으로 산음현(山陰縣) 경계까지 26리이며, 서쪽으로 전라도 운봉현(雲峯縣) 경계까지 27리이고, 북쪽으로 안음현 경계까지 37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 속함군(速含郡)인데 함성(含城)이라 하기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천령군(天嶺郡)으로 고쳤고, 고려 성종(成宗)이 승격시켜서 허주도단련사(許州都團練使)로 삼았으나, 현종은 함양군(含陽郡)으로 강등하여 합주(陜州)에 예속시켰고, 뒤에 함(含)을 함(咸)으로 고쳤다. 명종이 다시 강등시켜서 현으로 만들고 감무를 두었는데, 본조 태조 4년에 군으로 승격하였다.

【관원】 군수ㆍ훈도 각 1인.

【군명】 속함(速含)ㆍ함성(含城)ㆍ천령(天嶺)ㆍ허주(許州)ㆍ함양(含陽)

【성씨】 본군 여(呂)ㆍ오ㆍ박ㆍ서ㆍ조(曺), 이 속성(續姓)이다. 마천(馬淺) 조(조(曺)).

【풍속】 풍속이 근신하고 정성스러움을 숭상한다 관풍안(觀風案)에 있다.

【형승】 기이한 봉우리와 깊은 구렁 신숙주가 지은 제운루(齊雲樓) 기문에 있다. 백암산(白巖山) 군 북쪽 5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이다. 문필봉(文筆峯) 군 북쪽 1리 지점에 있다. 지리산(智異山) 군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산 북쪽은 온통 이 고을 지경이며, 천왕봉(天王峯)이 진주와 경계로 되었다. 산 속에 옛 성이 있는데 하나는 추성(楸城)이고, 하나는 박회성(朴回城)이라 일컫는다. 의탄소(義呑所)와 5ㆍ6리 거리인데 우마가 능히 가지 못하는 곳이나, 창고 터가 완연히 남아 있다. 세간에서 신라가 백제를 방어하던 곳이라 전한다. 천왕점(天王岾) 군 북쪽 20리 지점에 있으며 안음현 경계이다. 백운산(白雲山) 군 서쪽 40리 지점에 있는데 안음현 경계이다. 화장산(花長山) 군 남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산 속에 난초와 혜초(蕙草)가 많다. 취암산(鷲巖山) 군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상산(霜山) 군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여러 바위가 다투듯 빼어난데 형상이 칼날 같다. 산 밑에 골이 하나 있는데, 홍무(洪武) 경신년, 왜적을 정벌할 때에 병기를 저장했던 곳이다.

도현(桃峴) 군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팔량현(八良峴) 군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전라도 운봉현 경계로서 요충 지대이다. 고개 위에 신라 때 옛 진터가 있다. 수지봉(愁智峯) 군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안점산(鞍岾山) 군 북쪽 30리 지점에 있으며, 산 위에 옛날 석성이 있다. 사암산(蛇巖山) 군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오도봉(悟道峯) 군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대고대(大孤臺) 남계(灆溪) 복판에 있다. 소고대(小孤臺) 뇌계(㵢溪) 복판에 있다. 대관림(大館林) 뇌계 동쪽 언덕에 있다.

남계(灆溪) 군 동쪽 15리 지점에 있으며, 안음현 동천(東川)의 하류이다. 산음현 경계에 와서 임천(瀶川)과 합류한다. 뇌계(㵢溪) 군 서쪽 1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백운산에서 나오며 동쪽으로 흘러 사근역(沙斤驛) 가에 와서 남계에 들어간다. 임천(瀶川) 마천소(馬淺所)에 있다. 지리산 북쪽 골물이 합쳐서 임천이 되었다. 용유담(龍遊潭) 군 남쪽 40리 지점에 있으며, 임천 하류이다. 담의 양 곁에 편평한 바위가 여러 개 쌓여 있는데, 모두 갈아놓은 듯하다. 옆으로 벌려졌고 곁으로 펼쳐져서, 큰 독 같은데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기도하고, 혹은 술 항아리 같은데 온갖 기괴한 것이 신의 조화 같다. 그 물에 물고기가 있는데 등에 가사(袈裟) 같은 무늬가 있는 까닭으로 이름을 가사어(袈裟魚)라 한다. 지방 사람이 말하기를, “지리산 서북쪽에 달공사(達空寺)가 있고, 그 옆에 저연(猪淵)이 있는데 이 고기가 여기서 살다가, 해마다 가을이면 물따라 용유담에 내려왔다가, 봄이 되면 달공지(達空池)로 돌아간다. 그 까닭으로 엄천(嚴川) 이하에는 이 고기가 없다. 잡으려는 자는 이 고기가 오르내리는 때를 기다려서, 바위 폭포 사이에 그물을 쳐 놓으면 고기가 뛰어오르다가 그물 속에 떨어진다.” 한다. 달공은 운봉현 지역이다.

엄천(嚴川) 군 남쪽 25리 지점에 있으며 용유담 하류이다. 서계(西谿) 군 서쪽 8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팔량현에서 나오는데, 제한역(蹄閑驛) 아래쪽 5리쯤에 이르러서는 두 산골 사이에 돌이 뻗쳐서 바닥이 되었으며, 갈아놓은 것처럼 미끄럽고, 물줄기가 나는 듯 흘러 물방울을 튕기며, 굽은 낭떠러지에 내리 쏟아서 댕글댕글하는 것이 패옥 소리 같다.

【토산】 대[竹]ㆍ벌[蜂蜜]ㆍ석이버섯[石蕈]ㆍ감ㆍ은어[銀口魚]ㆍ석류ㆍ잣[海松子]. 『신증』 오미자.

【성곽】 읍성 고을 관아가 옛날에는 군 동쪽 2리 지점에 있었다. 홍무 경신년에 청사(廳舍)가 왜구에게 소실되었다. 그리하여 관아를 문필봉 밑으로 옮기고 흙을 쌓아서 성을 만들었다. 둘레는 7백 35척이고 나각(羅閣)이 2백 43칸이다. 문이 셋인데, 동쪽은 제운(齊雲), 남쪽은 망악(望岳), 서쪽은 청상(淸商)이다. 사근산성(沙斤山城) 군 동쪽 17리 지점, 사근역 북쪽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는 2천 7백 96척이고, 높이는 9척이다. 성안에 못이 셋이다. 경신년에 감무(監務) 장군철(張群哲)이 성을 지키지 못하여 왜구에게 함락 당한 뒤에 폐해 버리고, 수리하지 않았다가, 성종조에 다시 수축하였다.

【누정】 학사루(學士樓) 객관 서편에 있다. 최치원이 태수로 있으면서 오르던 곳인 까닭으로 학사루라 이름하였다. 그 뒤에 왜적에게 소실되었는데, 고을 관아를 옮길 때에 누 또한 옮겨다 지었으나 이름은 그대로였다.

제운루(齊雲樓) 신숙주(申叔舟)의 기문에, “천순(天順) 신사년 4월에, 임금께서 신의 선대가 일찍이 관작을 추증 받았으나, 여러 해를 변방에 있었으므로, 아직 선영에 배례도 하지 못하였다 하여, 특별히 휴가를 내리고, 호남 선영에 분황(焚黃)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남원에 도착하니, 함양 원으로 있는 종형 자교(子橋) 혜옹(惠翁)도 와서, 수일 동안 환담하다가 나에게 말하기를, ‘함양성에 문이 있고 문에는 누가 있는데, 무너진 지 여러 해여서 사람이 올라갈 수 없으나 수축하지 못하였다. 내가 이 고을을 맡아서 한 해를 넘기고 나니 정사가 간단해서 여가가 많다. 고을에 대사(臺榭)와 누관이 없어 왕인(王人 사신 따위)을 위로하고 답답함을 풀 만한 곳이 없음을 생각하고, 이에 민중과 의논하여 문루(門樓)를 온통 새롭게 하였는데, 처마와 칸살을 넓직하게, 대마루와 서까래를 가지런하게, 단청을 빛나게 한 다음에 그만 두었다. 공사를 마치자, 상국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 황공(黃公 황수신)이 마침 와서 감사 성안(成安) 김공(金公)과 함께 잔치를 베풀어서 낙성하였다. 이 두 분이 첫째로 시 두 편을 지었고, 여러 따르던 자들도 모두 화답하여 현판하니, 또한 기이한 일이었다. 고을이 두류산 기슭에 있는데 기이한 봉우리와 깊은 구렁과 천 리에 구름과 안개의 변화하는 모습이 보통이 아니어서 아침저녁으로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이 누에 오르면 한눈에 다 볼 수 있으니, 나를 위하여 기문을 지어라.’ 하였다. 나는, ‘한 번도 올라서 그 시설한 것과 경치를 보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여러분의 작품을 보고 대강이나마 안 다음이라야 기문을 지을 수 있겠습니다.’ 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지 수일 후에 형님이 또 편지를 보내, 남원공 이하 여러분의 시 수십 편을 보게 하고 기문을 요구하였다. 나는 방금 여행하느라 피로했고, 또 더위에 병든 중이었다. 그런데 편지를 받아 여러분의 시를 한바탕 읽고 읊조리는 동안에, 오랜 병이 없어지고 마음이 상쾌하여 저절로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감탄하기를, ‘형님과는 머리 땋은 아이 적부터 함께 글을 읽었고, 일찍이 그 옛 사람을 경모하는 진실함을 보았을 뿐, 무슨 일을 만들어내는 재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고을 원이 되어, 정사하는 데에 어짊과 용서를 우선으로 하면서 기강(紀綱)을 바로 잡아, 너그러움과 위엄을 함께 이루게 하였다. 아전이 두려워하고 백성이 사모하여 남들이 옛날 정사와 같음이 있다 일컬으니, 이것은 진실로 진정과 순박한 것으로 된 것이다. 또 능히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재간이 있는 자도 능히 하지 못한 것을 하였으니, 또한 괴이하다 할 만하다. 누를 읊조린 시만으로도 남의 병을 천리 밖에서 능히 낫게 하였는데, 하물며 몸소 그 누에 올라서 관람함에 있어서이겠는가. 내가 비록 늙었으나, 만약 형님을 따라 한 번 누에 오르게 된다면, 마땅히 형님을 위해 극히 넓힐 것이요, 우선은 이것을 적어서 기문으로 한다.” 하였다. 『신증』 김종직의 시에, “빗발은 점점 걷히는 듯 하건만, 은은한 우레 소리는 아직도 누를 울린다. 구름이 골에 돌아드니 발이 어둡고, 바람이 못 위에 살랑거리니 자리가 서늘하다. 연꽃 향기 속에 개구리는 개골개골, 황새 그림자 속에 벼가 윤기나네. 난간에 기대어 두류산 바라보니, 천길 봉우리는 용이 솟았는 듯하여라.” 하였다.

백사정(白沙亭) 군 서쪽 1리 지점에 있다.

○ 조승숙(趙承肅)의 시에, “봄 찾아 술 싣고 외로운 마을 지나니, 뻐구기 소리 들리는 대낮에 사립문 닫았네. 비 뒤에 떨어진 꽃이 물에 떠 오니, 인간 어느 곳도 도원(桃原) 아닌 곳 없다.” 하였다.

『신증』 망악루(望岳樓) 성 남쪽 문루이다. 지리산이 바라보이는 까닭으로 이 이름이 붙었다. ○ 김종직의 시에, “작년에 내 발자취 저 멧부리를 더럽혀, 망악루 위에서 다시 대하니 무안도 하구나. 산신령이 또 다시 더러워질까 두려워하여, 흰 구름을 시켜 곧 문을 굳게 닫는구나.” 하였다.

청향당(淸香堂) 객관 서쪽에 있으며 밑에 연못이 있다. 군수 조위(曺偉)가 지었다.

【학교】 향교 군 북쪽에 있으며 소소당(昭昭堂)이 있다.

【역원】 제한역(蹄閑驛) 군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 이첨(李詹)의 시에, 운봉(雲峯) 고갯길이 시내 곁에 났는데, 나귀를 편하게 타고 긴 휘파람 한 번 분다. 서쪽 산이 만 길 높다 말하지 말라. 객이 여관에 들어도 석양이 못 되었네.”하였다. 사근역(沙斤驛) 군 동쪽 16리이며, 역승(驛丞)이 있다. 본도의 속역이 14인데, 유린(有麟)ㆍ안간(安澗)ㆍ임수(瀶水)ㆍ제한(蹄閑)ㆍ정곡(正谷)ㆍ신안(新安)ㆍ신흥(新興)ㆍ정수(正守)ㆍ횡포(橫浦)ㆍ마전(馬田)ㆍ율원(栗元)ㆍ벽계(碧溪)ㆍ소남(小南)ㆍ평사(平沙)이다.

○ 승(丞)이 1명이다.

○ 신우(辛禑) 6년에 왜선 5백 척이 진포(鎭浦)에 정박하고, 3도를 침략하였다. 상주(尙州) 부고(府庫)를 불태우고, 경산(京山)을 경유하여 사근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삼도원수 배극렴(裵克廉) 등 아홉 장수가 역 동쪽 3리쯤에서 싸웠으나, 패전하여 박수경(朴修敬)ㆍ배언(裵彦) 두 원수가 죽고, 군사도 5백 명이나 죽어서 냇물이 다 붉었다. 그리하여 지금 혈계(血溪)라 부른다. 이로 말미암아 왜적의 군세는 더욱 성하여, 군 성을 무찌르고 남원을 향해 인월역(引月驛)에 주둔했다가 우리 태조에게 섬멸되었다. ○ 이첨의 시에, “운봉산 밑에는 가을 바람이 이르고, 햇살이 엷고 날씨가 추우니 나뭇잎이 마른다. 이때에 우리 군사가 왜놈에게 패하여, 피를 함양 언덕의 풀에 뿌렸네. 양부의 원수가 진 앞에서 죽었으니, 하찮은 군사들이야 신명 보전도 어려웠으리라. 슬픈 피리 두어 곡조에 장부도 눈물 지으며, 늙기 전에 국치(國恥)를 씻으리라 맹세하였네. 남쪽으로 출정한 장수 누가 군사 없으랴마는, 깃발도 천천히 갔던 길 돌아가도다.” 하였다. ○ 역 남쪽에 제법 넓게 트인 정자가 있다. 이숙번(李淑蕃)의 시에, “객의 귀 밑에 눈서리 더하여도, 흐르는 세월은 조금도 멈추지 않네. 윤음(綸音)이 금궐(金闕)에서 내려오니, 옛 벗들 우정(郵亭)에서 전송한다. 시내와 산은 집을 둘러 훌륭하고, 소나무는 구름을 스칠 듯 푸르도다. 임금의 은혜를 갚기는 어려우니, 어찌 반드시 궁궐에 가야 하리.”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가는 길 우리 고향과 가까워, 더욱 기쁘다. 말 머리가 내일에는 산음을 지나리. 사람들은 왕인(王人)이라 보지만, 재간 없는 취한 한림인 줄 어찌 알리오.” 하였다. 『신증』 지금 임금 5년에 승(丞)은 혁파하고 찰방을 두었다.

광혜원(廣惠院) 성 남쪽 2리 지점에 있는데, 다락집이 있으며 사신을 맞이하는 곳이다. ○ 이항무(李恒茂)의 시에, “총총히 겨를 없어 누에 못 오르다가, 이날에야 올라보니 눈이 잠깐 트인다. 북으로 한양을 바라보니 구름이 아득하고, 남으로 지리산 쳐다 보니 눈만 높이 쌓였네. 2년 동안 녹 먹으며 무슨 일 했나. 천리 밖 고을을 맡았으나 재주 없는 것 부끄러워라. 어찌하면 호탕하게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서 송백(松栢)이나 잘 가꾸워 볼까.”하였다. 사근원(沙斤院) 사근역 동쪽에 있다. 도현원(桃峴院) 도현(桃峴) 밑에 있다. 덕신원(德信院) 군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신증』 【교량】 사근교(沙斤橋) 사근역 남쪽에 있다. 대교(大橋) 군 남쪽 5리 지점에 있다.

【불우】 견불사(見佛寺) 지리산에 있다. ○ 조승숙(趙承肅)의 시에, “절이 명산 속에 있으니, 창건된 때가 아주 옛날이네, 선상(禪床)엔 일월이 한가하고, 강석엔 인천(人天)을 설하는구나. 너에게 무생(無生)이라는 이치 들었고, 내 신선 못 배웠음이 한스러워라. 얘기 끝에 도리어 취미가 있으니, 눈앞에 풍경이 좋기도 하이.” 하였다.

군자사(君子寺) 지리산에 있다. 전설에,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왕위를 피해서 여기에 살다가, 태자를 낳아서 나라에 돌아가고, 집은 희사하여 절로 만들었다.” 한다. 『신증』 유호인(兪好仁)의 시에, “10년 동안 떠들 적에 내 어이 견디었던가. 구름 산에 자취 감추고 한바탕 꿈 달게 여기자. 지는 해에 번쩍이는 놀 취점(鷲岾)에 비꼈고, 긴 바람은 비를 몰아 용담(龍潭)에 지난다. 흰 구름과 푸른 학은 속절 없이 아득한데, 아간(牙簡)과 경고(瓊膏)를 어찌 싫도록 참례하였나. 오늘 밤에 솔바람 창을 스치니, 가벼운 노을에 뚜렷한 달을 누워서 보리라.” 하였다.

승안사(昇安寺) 사암산(蛇巖山)에 있다. 선열암(先涅菴)ㆍ고열암(古涅菴)ㆍ신열암(新涅菴) 아울러 지리산에 있다. 화장사(花長寺) 화장산에 있다. 엄천사(嚴川寺) 엄천 북쪽 언덕에 있다. 마적사(馬迹寺) 지리산에 있다. 고승 마적(馬迹)이 살았다는 것으로 명칭을 하였다. 앞에는 유가대(瑜珈臺)가 있고, 밑에는 수잠탄(水潛灘)이 있으며 탄 위는 곧 용유담(龍遊潭)이다. 금대암(金臺菴)ㆍ보월암(寶月菴)ㆍ안국사(安國寺) 아울러 지리산에 있다. 본조 중 행호(行乎)가 창건한 것이다.

무주암(無住菴) 지리산에 있다. ○《보한집(補閑集)》에, “중 무기(無己)가 스스로 대혼자(大昏子)라 호하고 이 산에 숨었다. 장삼 하나로 30년 동안을 지냈고, 매년 겨울과 여름이면 나오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새끼 띠로 감아 묶고서, 봄 가을이면 배를 두드리며 산을 유람하는데, 하루에 3ㆍ4말 밥을 먹었다. 한 곳에 앉으면 반드시 열흘이 넘었고, 일어나 걸으면서 게(偈)를 지어 크게 읊었다. 산중에 70여 개 암자가 있는데, 한 암자에서 한 끼씩 먹으면서 게 한 수씩 남겼다. 무주암 게에, ‘이 지경에 본래 주거하는 이 없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 집을 지었는가. 오직 무기(無己)란 자만이 남아서 가거나 머물거나 처음부터 거리낌 없다.’ 하였으니, 말이 엉성하고 쉬운 듯하나 숨긴 뜻이 깊다. 혹시 한습(寒拾)의 무리인가.” 하였다.

덕봉사(德峯寺) 천왕점 밑에 있다. 등귀사(登龜寺) 오도봉(悟道峯)에 있다.

『신증』 유호인의 시에, “두류 만첩 산아 잘있었는가. 잠깐 여가 타서 여기 올랐노라. 금당(金堂)과 옥실(玉室)의 옛 언약을 찾으니, 푸른 고개 붉은 벼랑이 모두 옛 안면일세. 해 저물어가니 기러기 북쪽으로 가고, 누런 국화 떨어질 제 객이 남쪽으로 돌아온다. 난파(鑾坡)가 멀리 운림(雲林)과 격했구나. 양(兩) 지역에서 돌아오니 귀밑머리 반백일세.” 하였다.

미타사(彌陀寺) 사근성산(沙斤城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군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모사(聖母祠) 사당이 둘이다. 하나는 지리산 천왕봉 위에 있고, 하나는 군 남쪽 엄천리에 있다. 고려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에, “성모는 태조의 모친 위숙왕후(威肅王后)라 한다.” 하였다. 성왕사 군 동쪽 3리 지점에 있다. 여단 군 북쪽에 있다.

【고적】 옛 읍성 관변리(官邊里)에 있는데, 지금 고을 관아와 4리 거리이다. 공안부곡(功安部曲) 군 동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마천소(馬川所) 천(川)은 옛날에는 천(淺)으로 썼다. 군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신증』 김종직의 시에, “말 방울 울리며 마천에 들어오는데, 빈종(賓從)도 또한 점잖구나. 그늘진 구렁엔 얼음이 얼려하고, 양지쪽 벼랑엔 단풍이 아직도 곱다. 눈이 신모묘(神母廟)를 덮었고, 우레가 칩룡연(蟄龍淵)에서 울려온다. 굽은 언덕엔 시참(柴慘 형벌의 일종)을 남기고, 수목 우거진 사당엔 지전(紙錢)이 걸려 있네. 나무를 깎아서 시냇가엔 자귀밥 있고, 숯을 굽느라 골짜기엔 연기가 난다. 일하는 사람은 메밀을 베고, 작은 색시는 목화를 거둔다. 그럭저럭 임기가 가까워졌으니, 이 놀이를 응당 그리워하리.” 하였다. 의탄소(義呑所)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소의 아전들이 지금은 군 서쪽 웅곡리(熊谷里)에 옮겨가 산다.

월명총(月明冢) 수지봉 위에 있다. 전설에는, “옛날에 동경의 장사꾼이 사근역 계집 월명을 사랑하여 며칠 동안을 머물다가 갔다. 월명이 사모하다가 병이 되어 죽었으므로 여기에다 묻었다. 그 뒤에 장사꾼이 그 무덤에 가서 곡하다가 또한 죽어서 마침내 같은 무덤에 묻혔다.” 한다. 『신증』 김종직의 시에, “무덤 위에는 연리지(連理枝) 푸르구나. 길손이 그를 위해 화산기(華山畿)를 부른다. 지금도 달 없으면 여우가 우는데, 꽃다운 넋은 나비되어 날고 있겠지.” 하였다.

【명환】 신라 영충(令忠) 헌덕왕(憲德王) 14년 웅천 도독(熊川都督) 헌창(憲昌)이 반란을 일으켜서, 무진(武珍)ㆍ완산(完山) 등 주를 협박하여 제 편으로 만들었다. 완산 장사(完山長史) 최웅(崔雄)이 영충과 함께 서울에 도망쳐 와서 보고하였다. 임금이 곧 영충을 속함군 태수(速含郡太守)로 임명하였는데, 위계는 급찬(級湌)이었다. 최치원(崔致遠) 치원이 해인사 중 희랑(希朗)에게 보낸 시 끝에 방로태감 천령군태수(防虜太監天嶺郡太守) 알찬(遏粲) 최치원이라 적었다.

본조 송희경(宋希璟)ㆍ이차약(李次若) 숭인(崇仁)의 아들이다. 채륜(蔡倫)ㆍ최덕지(崔德之)ㆍ조상치(曺尙治)ㆍ정종소(鄭從韶) 모두 수령[知郡]이었다.

『신증』 김종직 고을 사람이 추모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세웠다. 조위(曺偉).

【인물】 고려 박충좌(朴忠佐) 과거에 올라 벼슬이 판삼사사에 이르렀고,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으로 봉함을 받았다. 성품이 온후하고 검소하여 비록 재상이 되었으나, 사는 집과 의복은 벼슬하기 전과 같았다. 글 읽기를 좋아하여 늙어서도 그만두지 않았다.

본조 박자안(朴子安) 벼슬이 도총제에 이르렀고, 장수의 재질이 있었다. 여칭(呂稱) 벼슬이 지의정부사에 이르렀다. 박실(朴實) 자안의 아들이다. 태조조에 자안이 경상ㆍ전라도 도안무사가 되어서 항복한 왜인을 응접하다가, 군사 기밀을 잘못 누설하여 죄가 참형에 해당하였다. 조정에서 베어 죽이도록 공문을 보냈으나, 저 사람들과 관련된 사건이기에 비밀에 붙이고 선포하지 않았다. 박실이 듣고 곧 태종의 사저에 나아가서 땅에 엎드려 통곡하며 아비 목숨을 살려 주도록 청하였다. 태종께서 마음으로 슬프게 여겨서, 곧 자안의 사형을 감형하도록 계청하였다. 태조께서 처음에는 노하였으나 얼마 뒤에 중추원 녹사 심귀수(沈龜壽)에게 힘껏 빨리 달려가서 자안의 죽음을 구제하도록 명하였다. 귀수가 반 넘어 가다가 말에서 떨어져, 역리를 시켜 명령서를 대신 보냈다. 명령서가 도착하기 전에 감형관은 이미 자안의 낯을 칠하고 옷을 벗겼으며 칼도 갖추고 있었다. 역리는 멀리 들판에서 갓을 휘둘렀다. 감형관이 바라보고 형 집행을 정지하고 기다렸다. 그리하여 자안은 죽지 않게 되었다. 박실은 본래 학술과 무예가 없었으나, 태종이 그 아비 구한 것을 어질게 여겨서 금려(禁旅)를 맡게 하였다. 직위가 총제에 이르렀다. 오응(吳凝) 정축년 과거에 장원하였고, 벼슬이 전라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신증』 여자신(呂自新) 무과에 올랐고,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장(貞莊)이다. 성품이 청렴 결백하고 소탈하며 곧았다. 여운철(呂允哲) 자신의 아들이다. 무과에 올라 벼슬이 절도사에 이르렀으며 청렴 결백한 것이 그 아비와 같았다.

【우거】 본조 유호인 과거에 올랐고 시를 잘한다는 명망이 있었다. 성종(成宗)이 일찍이 그가 저술한 것을 베껴서 바치도록 하였다.

【효자】 본조 박안행(朴安行) 효행이 있어서 정려되었다. 박유효(朴由孝) 아버지의 무덤에 시묘하는 때를 당하여, 어미 병이 위독하였다. 변을 맛보니 맛이 달므로 걱정하고 두려워하더니 어미가 죽자 아비의 무덤에 합장하고 6년을 여막에서 거처하였다.

【열녀】 고려 송씨 역승(驛丞) 정인(鄭寅)의 아내이다. 홍무(洪武) 연간에 왜구에게 잡혔다. 왜적이 겁탈하고자 하였으나, 죽기를 맹세하고 복종하지 않다가 드디어 살해당했다. 일이 알려져서 정려되었다.

본조 김씨 이양(李陽)의 아내이다. 양이 자식도 없이 죽으니, 사직 여자근(呂自勤)이 장가들고자 하였다. 김씨는 지아비의 무덤에 달려가서 사흘 밤을 풀 속에서 잤다. 그 뒤에 박용덕(朴龍德)이란 자가 또 아내로 삼고자 하였으나, 김씨는 응하지 아니하고 목매어 죽었다. 성종 3년에 고을 원을 시켜 그 무덤에 제사하고 정문하였다.

【제영】 함양소현난산심(咸陽小縣亂山深) 이색(李穡)의 시에, “함양 작은 현은 많은 산이 깊고, 깎아지른 벼랑은 다시 만 길이나 되네.” 하였다. 함양구물단청산(咸陽舊物但靑山) 조승숙(趙承肅)의 시에, “함양 옛 물건은 청산뿐이니, 몇 차례 흥망 겪으며 한 고을에 딸렸던가.” 하였다. 천극두류기반공(天極頭流倚半空)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하늘 끝 두류산은 반공에 기댔고, 호남을 한 번 채운(彩雲) 속에 바라보네. 시험삼아 누 위에서 난간에 기대보니, 천고에 푸른 얼굴 두루두루 같아라.” 하였다.

 

[주D-001]분황(焚黃) :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이 그 관직이 상당히 높아지면, 그 부(父)ㆍ조(祖)ㆍ증조(曾祖)의 3대에 벼슬을 추증하는 것이 법례로 되어 있었는데, 그 추증할 때에 관직을 기재한 사령장은 누런 종이에 쓴다. 그 종이를 분묘 앞에서 불사르게 되었으므로 그것을 분황(焚黃)이라 한다.

[주D-002]인천(人天) : 사람에 관한 여러 가지 이치와 천리(天理)에 관한 것을 합하여서 인천(人天)이라 한 것이다.

[주D-003]아간(牙簡)과 경고(瓊膏) : 아간(牙簡)은 관청 문서라는 말이요, 경고(瓊膏)는 고량진미(膏梁珍味)라는 말이다.

[주D-004]한습(寒拾) : 당(唐) 나라 중엽 시대의 유명한 중 한산(寒山)ㆍ습득(習得)을 약칭한 것이다. 그들은 기행(奇行)으로 유명하고 또 시승(詩僧)으로 유명하였다.

[주D-005]금당(金堂)과 옥실(玉室) : 여기에 금당 옥실이라 함은 부처 있는 곳을 미화시켜서 한 말이다.

[주D-006]난파(鑾坡) : 난파는 한림학사가 공무 보는 곳을 말함이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홍문관의 관원들이 있는 곳을 난파라고 하였다.

[주D-007]연리지(連理枝) : 두 나무가 각각 나서 가지만이 서로 얽힌 것을 연리지라 한다. 옛날 전국 시대 송 나라 강왕(康王)이 한빙(韓凭)의 아내를 강제로 빼앗았다. 한빙이 자살하자 그의 아내도 자살하였으므로 어느 산기슭에 묻었더니, 두 무덤에서 각기 나무 하나씩이 나서 가지가 서로 얽히었다. 송 나라 사람들이 그 나무를 상사목(相思木)이라 하여 이들의 사랑을 가련하게 여겼다.

[주D-008]화산기(華山畿) : 옛날 중국 남북조 시대 송(宋) 나라에 짝사랑하다가 죽은 남자의 상여가, 그 짝사랑하던 여자의 집 앞으로 지나갈 때에 상여가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여자가 나와서, “나를 연모하다가 죽었다면, 나도 그대를 좇을 것이니 원한다면 관을 열어 주오.” 하였더니, 관이 열리므로 그 여자가 그 관속으로 들어가버렸다. 모두가 놀래어 아무리 꺼내려 하여도 이미 죽었으므로 할 수 없이 합장하였다. 그것을 노래한 곡조가 화산기(華山畿)이다.

 

유두류록(점필재 김종직)

 

나는 영남(嶺南)에서 생장하였으니, 두류산은 바로 내 고향의 산이다. 그러나 남북으로 떠돌며 벼슬하면서 세속 일에 골몰하여 나이 이미 40이 되도록 아직껏 한번도 유람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신묘년(1471, 성종2) 봄에 함양 군수(咸陽郡守)가 되어 내려와 보니, 두류산이 바로 그 봉내(封內)에 있어 푸르게 우뚝 솟은 것을 눈만 쳐들면 바라볼 수가 있었으나, 흉년의 민사(民事)와 부서(簿書) 처리에 바빠서 거의 2년이 되도록 또 한번도 유람하지 못했다. 그리고 매양 유극기(兪克己), 임정숙(林貞叔)과 함께 이 일을 이야기하면서 마음 속에 항상 걸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금년 여름에 조태허(曺太虛)가 관동(關東)으로부터 나 있는 데로 와서 《예기(禮記)》를 읽고, 가을에는 장차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 하면서 이 산에 유람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나 또한 생각건대, 파리해짐이 날로 더함에 따라 다리의 힘도 더욱 쇠해가는 터이니, 금년에 유람하지 못하면 명년을 기약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더구나 때는 중추(仲秋)라서 토우(土雨)가 이미 말끔하게 개었으니, 보름날 밤에 천왕봉(天王峯)에서 달을 완상하고, 닭이 울면 해돋는 모습을 구경하며, 다음날 아침에는 사방을 두루 관람한다면 일거에 여러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가 있으므로, 마침내 유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는 극기를 초청하여 태허와 함께 《수친서(壽親書)》에 이른바 유산구(遊山具)를 상고하여, 그 휴대할 것을 거기에서 약간 증감(增減)하였다.

그리고 14일에 덕봉사(德峯寺)의 중 해공(解空)이 와서 그에게 향도(鄕導)를 하게 하였고, 또 한백원(韓百源)이 따라가기를 요청하였다. 마침내 그들과 함께 엄천(嚴川)을 지나 화암(花巖)에서 쉬는데, 중 법종(法宗)이 뒤따라오므로, 그 열력한 곳을 물어보니 험준함과 꼬불꼬불한 형세를 자못 자상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또한 길을 인도하게 하여 지장사(地藏寺)에 이르니 갈림길이 나왔다. 여기서부터는 말[馬]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오르는데, 숲과 구렁이 깊고 그윽하여 벌써 경치가 뛰어남을 깨닫게 되었다.

이로부터 1리쯤 가서 환희대(歡喜臺)란 바위가 있는데, 태허와 백원이 그 꼭대기에 올라갔다. 그 아래는 천 길이나 되는데, 금대사(金臺寺), 홍련사(紅蓮寺), 백련사(白蓮寺) 등 여러 사찰을 내려다보았다.

선열암(先涅菴)을 찾아가 보니, 암자가 높은 절벽을 등진 채 지어져 있는데, 두 샘이 절벽 밑에 있어 물이 매우 차가웠다. 담장 밖에는 물이 반암(半巖)의 부서진 돌 틈에서 방울져 떨어지는데, 반석(盤石)이 이를 받아서 약간 움푹 패인 곳에 맑게 고여 있었다. 그 틈에는 적양(赤楊)과 용수초(龍須草)가 났는데, 모두 두어 치[寸]쯤이나 되었다.

그 곁에 돌이 많은 비탈길이 있어, 등넝쿨[藤蔓] 한 가닥을 나무에 매어 놓고 그것을 부여잡고 오르내려서 묘정암(妙貞菴)과 지장사(地藏寺)를 왕래하였다. 중 법종이 말하기를,

“한 비구승(比丘僧)이 있어 결하(結夏)와 우란(盂蘭)을 파하고 나서는 구름처럼 자유로이 돌아다녀서 간 곳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그런데 돌 위에는 소과(小瓜) 및 무우[蘿葍]를 심어놓았고, 조그마한 다듬잇방망이와 등겨가루[糠籺] 두어 되쯤이 있을 뿐이었다.

신열암(新涅菴)을 찾아가 보니 중은 없었고, 그 암자 역시 높은 절벽을 등지고 있었다. 암자의 동북쪽에는 독녀(獨女)라는 바위가 있어 다섯 가닥이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 척(尺)이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道)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잣나무가 바위 중턱에 나 있는데, 그 바위를 오르려는 자는 나무를 건너질러 타고 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잡고 바위 틈을 돌면서 등과 배가 위아래로 마찰한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을 내놓을 수 없는 사람은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란히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山陰)을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봉우리들과 다투어 나와서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듯했는데, 지금에 내 몸이 직접 이 땅을 밟아보니, 모골(毛骨)이 송연하여 정신이 멍해져서 내가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여기서 조금 서쪽으로 가서 고열암(古涅菴)에 다다르니, 날이 이미 땅거미가 졌다. 의론대(議論臺)는 그 서쪽 등성이에 있었다. 극기(克己) 등은 뒤떨어졌고, 나 혼자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 섰노라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 해공(解空)이 말하기를,

“절벽 아래에 석굴(石窟)이 있는데, 노숙(老宿) 우타(優陀)가 그 곳에 거처하면서 일찍이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세 암자의 중들과 함께 이 돌에 앉아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으므로, 인하여 이렇게 호칭한 것입니다.”

하였다. 잠시 뒤에 요주승(寮主僧)이 납의(衲衣)를 입고 와서 합장(合掌)하고 말하기를,

“들으니 사군(使君)이 와서 노닌다고 하는데, 어디 있는가?”

하니, 해공이 그 요주승에게 말하지 말라고 눈짓을 하자, 요주승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래서 내가 장자(莊子)의 말을 사용하여 위로해서 말하기를,

“나는 불을 쬐는 사람이 부뚜막을 서로 다투고, 동숙자(同宿者)들이 좌석을 서로 다투게 하고 싶다.지금 요주승은 한 야옹(野翁)을 보았을 뿐이니, 어찌 내가 사군인 줄을 알았겠는가.”

하니, 해공 등이 모두 웃었다. 이 날에 나는 처음으로 산행(山行)을 시험하여 20리 가까이 걸은 결과, 극도로 피로하여 잠을 푹 자고 한밤중에 깨어서 보니, 달빛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고, 여러 산봉우리에서는 운기(雲氣)가 솟아오르고 있으므로, 나는 마음 속으로 기도를 하였다.

기묘일 새벽에는 날이 더욱 흐려졌는데, 요주가 말하기를,

“빈도(貧道)가 오랫동안 이 산에 거주하면서 구름의 형태로써 점을 쳐본 결과, 오늘은 반드시 비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나는 기뻐하며 담부(擔夫)를 감하여 돌려보내고 절에서 나와 곧바로 푸른 등라(藤蘿)가 깊이 우거진 숲속을 가노라니, 저절로 말라 죽은 큰 나무가 좁은 길에 넘어져서 그대로 외나무다리가 되었는데, 그 반쯤 썩은 것은 가지가 아직도 땅을 버티고 있어 마치 행마(行馬)처럼 생겼으므로, 머리를 숙이고 그 밑으로 지나갔다. 그리하여 한 언덕을 지나니, 해공이 말하기를,

“이것이 구롱(九隴) 가운데 첫째입니다.”

하였다. 연하여 셋째, 넷째 언덕을 지나서 한 동부(洞府)를 만났는데, 지경이 넓고 조용하고 깊고 그윽하며, 수목(樹木)들이 태양을 가리고 덩굴풀[薜蘿]들이 덮이고 얽힌 가운데 계곡 물이 돌에 부딪혀 굽이굽이에 소리가 들리었다. 그 동쪽은 산등성이인데 그리 험준하지 않았고, 그 서쪽으로는 지세(地勢)가 점점 내려가는데 여기서 20리를 더 가면 의탄촌(義呑村)에 도달한다. 만일 계견(鷄犬)과 우독(牛犢)을 데리고 들어가서 나무를 깎아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 벼, 삼, 콩 등을 심어 가꾸고 산다면 무릉 도원(武陵桃源)에도 그리 손색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지팡이로 계곡의 돌을 두드리면서 극기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아, 어떻게 하면 그대와 함께 은둔(隱遁)하기를 약속하고 이 곳에 와서 노닐 수 있단 말인가.”

하고, 그로 하여금 이끼를 긁어내고 바위의 한가운데에 이름을 쓰게 하였다.

구롱을 다 지나서는 문득 산등성이를 타고 가는데, 가는 구름이 나직하게 삿갓을 스치고, 초목들은 비를 맞지 않았는데도 축축이 젖어 있으므로, 그제야 비로소 하늘과의 거리가 멀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로부터 수리(數里)를 다 못 가서 등성이를 돌아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晉州)의 땅이다. 그런데 안개가 잔뜩 끼어서 먼 데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계석(溪石)을 차지하고 앉아서 잠깐 쉬었다. 이로부터 영랑재(永郞岾)에 이르기까지는 길이 극도로 가팔라서, 정히 봉선의기(封禪儀記)에 이른바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 밑을 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를 보게 된다.”는 것과 같았으므로, 나무 뿌리를 부여잡아야만 비로소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해가 이미 한낮이 지나서야 비로소 영랑재를 올라갔다. 함양(咸陽)에서 바라보면 이 봉우리가 가장 높아 보이는데, 여기에 와서 보니, 다시 천왕봉(天王峯)을 쳐다보게 되었다. 영랑은 신라(新羅) 때 화랑(花郞)의 우두머리였는데,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수(山水) 속에 노닐다가 일찍이 이 봉우리에 올랐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소년대(少年臺)는 봉우리 곁에 있어 푸른 절벽이 만 길이나 되었는데, 이른바 소년이란 혹 영랑의 무리가 아니었는가 싶다. 내가 돌의 모서리를 안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종자(從者)들에게 절벽 난간에 가까이 가지 말도록 주의를 시켰다.

이 때 구름과 안개가 다 사라지고 햇살이 내리비추자, 동서의 계곡들이 모두 환히 트이었으므로, 여기저기를 바라보니, 잡수(雜樹)는 없고 모두가 삼나무[杉], 노송나무[檜], 소나무[松], 녹나무[枏]였는데, 말라 죽어서 뼈만 앙상하게 서 있는 것이 3분의 1이나 되었고, 간간이 단풍나무가 섞이어 마치 그림과 같았다. 그리고 등성이에 있는 나무들은 바람과 안개에 시달리어 가지와 줄기가 모두 왼쪽으로 쏠려 주먹처럼 굽은데다 잎이 거세게 나부끼었다. 중이 말하기를,

“여기에는 잣나무[海松]가 더욱 많으므로, 이 고장 사람들이 가을철마다 잣을 채취하여 공액(貢額)에 충당하는데, 금년에는 잣이 달린 나무가 하나도 없으니, 만일 정한 액수대로 다 징수하려 한다면 우리 백성들은 어찌 하겠습니까. 수령(守令)께서 마침 보았으니, 이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서대초(書帶草)와 같은 풀이 있어 부드럽고 질기면서 매끄러워, 이것을 깔고 앉고 눕고 할 만하였는데, 곳곳이 다 그러하였다. 청이당 이하로는 오미자(五味子)나무 숲이 많았는데, 여기에 와서는 오미자나무가 없고, 다만 독활(獨活), 당귀(當歸)만이 있을 뿐이었다.

해유령(蟹踰嶺)을 지나면서 보니 곁에 선암(船巖)이 있었는데, 법종(法宗)이 말하기를,

“상고 시대에 바닷물이 산릉(山陵)을 넘쳐 흐를 때 이 바위에 배[船]를 매어두었는데, 방해(螃蟹)가 여기를 지나갔으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때의 생물(生物)들은 모두 하늘을 부여잡고 살았단 말인가.”

하였다.

또 등성이의 곁을 따라 남쪽으로 중봉(中峯)을 올라가 보니, 산중에 모든 융기하여 봉우리가 된 것들은 전부가 돌로 되었는데, 유독 이 봉우리만이 위에 흙을 이고서 단중(端重)하게 자리하고 있으므로, 발걸음을 자유로이 뗄 수가 있었다. 여기에서 약간 내려와 마암(馬巖)에서 쉬는데, 샘물이 맑고 차서 마실 만하였다. 가문 때를 만났을 경우, 사람을 시켜 이 바위에 올라가서 마구 뛰며 배회하게 하면 반드시 뇌우(雷雨)를 얻게 되는데, 내가 지난해와 금년 여름에 사람을 보내서 시험해 본 결과, 자못 효험이 있었다.

신시(申時)에야 천왕봉을 올라가 보니, 구름과 안개가 성하게 일어나 산천이 모두 어두워져서 중봉(中峯) 또한 보이지 않았다. 해공과 법종이 먼저 성모묘(聖母廟)에 들어가서 소불(小佛)을 손에 들고 개게[晴] 해달라고 외치며 희롱하였다. 나는 처음에 이를 장난으로 여겼는데, 물어보니 말하기를,

“세속에서 이렇게 하면 날이 갠다고 합니다.”

하였다. 그래서 나는 손발을 씻고 관대(冠帶)를 정제한 다음 석등(石磴)을 잡고 올라가 사당에 들어가서 주과(酒果)를 올리고 성모(聖母)에게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저는 일찍이 선니(宣尼)가 태산(泰山)에 올라 구경했던 일과 한자(韓子)가 형산(衡山)에 유람했던 뜻을 사모해 왔으나, 직사(職事)에 얽매여 소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중추(仲秋)에 남쪽 지경에 농사를 살피다가, 높은 봉우리를 쳐다보니 그 정성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진사(進士) 한인효(韓仁孝), 유호인(兪好仁), 조위(曺偉) 등과 함께 운제(雲梯)를 타고 올라가 사당의 밑에 당도했는데, 비, 구름의 귀신이 빌미가 되어 운물(雲物)이 뭉게뭉게 일어나므로, 황급하고 답답한 나머지 좋은 때를 헛되이 저버리게 될까 염려하여, 삼가 성모께 비나니, 이 술잔을 흠향하시고 신통한 공효로써 보답하여 주소서. 그래서 오늘 저녁에는 하늘이 말끔해져서 달빛이 낮과 같이 밝고, 명일 아침에는 만리 경내가 환히 트이어 산해(山海)가 절로 구분되게 해 주신다면 저희들은 장관(壯觀)을 이루게 되리니, 감히 그 큰 은혜를 잊겠습니까.”

제사를 마치고는 함께 신위(神位) 앞에 앉아서 술을 두어 잔씩 나누고 파하였다. 그 사옥(祠屋)은 다만 3칸으로 되었는데, 엄천리(嚴川里) 사람이 고쳐 지은 것으로, 이 또한 판자 지붕에다 못을 박아놓아서 매우 튼튼하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바람에 날릴 수밖에 없었다. 두 중이 그 벽(壁)에 그림을 그려 놓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성모(聖母)의 옛 석상(石像)이란 것이었다. 그런데 미목(眉目)과 쪽머리[髻鬟]에는 모두 분대(粉黛)를 발라놓았고 목에는 결획(缺畫)이 있으므로 그 사실을 물어보니 말하기를,

“태조(太祖)가 인월역(引月驛)에서 왜구(倭寇)와 싸워 승첩을 거두었던 해에 왜구가 이 봉우리에 올라와 그 곳을 찍고 갔으므로, 후인이 풀을 발라서 다시 붙여놓은 것입니다.”

하였다. 그 동편으로 움푹 들어간 석루(石壘)에는 해공 등이 희롱하던 소불(小佛)이 있는데, 이를 국사(國師)라 호칭하며, 세속에서는 성모의 음부(淫夫)라고 전해오고 있었다. 그래서 또 묻기를,

“성모는 세속에서 무슨 신(神)이라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석가(釋迦)의 어머니인 마야부인(摩耶夫人)입니다.”

하였다. 아, 이런 일이 있다니. 서축(西竺)과 우리 동방은 천백(千百)의 세계(世界)로 막혀 있는데, 가유국(迦維國)의 부인이 어떻게 이 땅의 귀신이 될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를 읽어보니, ‘성모가 선사를 명했다[聖母命詵師]’는 주석에 이르기를,

“지금 지리산의 천왕(天王)이니, 바로 고려 태조(高麗太祖)의 비(妣)인 위숙왕후(威肅王后)를 가리킨다.”

하였다. 이는 곧 고려 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에 관한 말을 익히 듣고서 자기 임금의 계통을 신격화시키기 위하여 이런 말을 만들어낸 것인데, 이승휴는 그 말을 믿고 《제왕운기》에 기록해 놓았으니, 이 또한 고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더구나 승려들의 세상을 현혹시키는 황당무계한 말임에랴. 또 이미 마야부인이라 하고서 국사(國師)로써 더럽혔으니, 그 설만(褻慢)하고 불경(不敬)스럽기가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하겠는가. 이것을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

날이 또 어두워지자 음랭한 바람이 매우 거세게 동서쪽에서 마구 불어와, 그 기세가 마치 집을 뽑고 산악을 진동시킬 듯하였고, 안개가 모여들어서 의관(衣冠)이 모두 축축해졌다. 네 사람이 사내(祠內)에서 서로 베개삼아 누웠노라니, 한기(寒氣)가 뼈에 사무치므로 다시 중면(重綿)을 껴입었다. 종자(從者)들은 모두 덜덜 떨며 어쩔 줄을 몰랐으므로, 큰 나무 서너 개를 태워서 불을 쬐게 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달빛이 어슴푸레하게 보이므로, 기뻐서 일어나 보니 이내 검은 구름에 가려져 버렸다. 누(壘)에 기대서 사방을 내려다보니, 천지(天地)와 사방(四方)이 서로 한데 연하여, 마치 큰 바다 가운데서 하나의 작은 배를 타고 올라갔다 기울었다 하면서 곧 파도 속으로 빠져들어갈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래서 세 사람에게 웃으며 이르기를,

“비록 한퇴지(韓退之)의 정성과 기미(幾微)를 미리 살펴 아는 도술(道術)은 없을지라도 다행히 군(君)들과 함께 기모(氣母 우주의 원기를 이름)를 타고 혼돈(混沌)의 근원에 떠서 노닐게 되었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경진일에도 비바람이 아직 거세므로, 먼저 향적사(香積寺)에 종자들을 보내어 밥을 준비해 놓고 지름길을 헤치고 와서 맞이하도록 하였다. 정오(正午)가 지나서는 비가 약간 그쳤는데 돌다리가 몹시 미끄러우므로, 사람을 시켜 붙들게 하여 내려왔다. 수리(數里)쯤 가서는 철쇄로(鐵鎖路)가 있었는데 매우 위험하므로, 문득 석혈(石穴)을 꿰어 나와서 힘껏 걸어 향적사(香積寺)에 들어갔다. 향적사에는 중이 없은 지가 벌써 2년이나 되었는데, 계곡 물은 아직도 쪼개진 나무에 의지하여 졸졸 흘러서 물통으로 떨어졌다. 창유(窓牖)의 관쇄(關鎖) 및 향반(香槃)의 불유(佛油)가 완연히 모두 있었으므로, 명하여 깨끗이 소제하고 분향(焚香)하게 한 다음 들어가 거처하였다.

저물녘에는 운애(雲靄)가 천왕봉으로부터 거꾸로 불려 내려오는데, 그 빠르기가 일순간도 채 안 되었다. 그리하여 먼 하늘에는 간혹 석양이 반사된 데도 있으므로, 나는 손을 들어 매우 기뻐하면서, 문 앞의 반석(盤石)으로 나가서 바라보니, 육천(川)이 길게 연해져 있고, 여러 산(山)과 해도(海島)는 혹은 완전히 드러나고 혹은 반쯤만 드러나기도 하며 혹은 꼭대기만 드러나기도 하여, 마치 장막(帳幕) 안에 있는 사람의 상투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절정(絶頂)을 쳐다보니, 겹겹의 봉우리가 둘러싸여서 어제 어느 길로 내려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당 곁에 서 있는 흰 깃발은 남쪽을 가리키며 펄럭이고 있었는데, 대체로 회화승(繪畫僧)이 나에게 그 곳을 알 수 있도록 알려준 것이다. 여기에서 남북의 두 바위를 마음껏 구경하고, 또 달이 뜨기를 기다렸는데, 이 때는 동방(東方)이 완전히 맑지 못하였다. 다시 추위를 견딜 수가 없어 등걸불을 태워서 집을 훈훈하게 한 다음에야 잠자리에 들어갔다. 한밤중에는 별빛과 달빛이 모두 환하였다.

신사일 새벽에는 태양이 양곡(暘谷)에서 올라오는데, 노을빛 같은 채색이 반짝반짝 빛났다. 좌우에서는 모두 내가 몹시 피곤하여 반드시 재차 천왕봉을 오르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나는 생각건대, 수일 동안 짙게 흐리던 날이 갑자기 개었으니, 이는 하늘이 나를 대단히 도와준 것인데, 지금 지척에 있으면서 힘써 다시 올라보지 못하고 만다면 평생 동안 가슴 속에 쌓아온 것을 끝내 씻어내지 못하고 말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마침내 새벽밥을 재촉하여 먹고는 아랫도리를 걷어올리고 지레 석문(石門)을 통하여 올라가는데, 신에 밟힌 초목들은 모두 고드름이 붙어 있었다. 성모묘에 들어가서 다시 술잔을 올리고 사례하기를,

“오늘은 천지가 맑게 개고 산천이 환하게 트였으니, 이는 실로 신의 도움을 힘입은 것이라, 참으로 깊이 기뻐하며 감사드립니다.”

하고, 이에 극기, 해공과 함께 북루(北壘)를 올라가니, 태허는 벌써 판옥(板屋)에 올라가 있었다. 아무리 높이 날으는 홍곡(鴻鵠)일지라도 우리보다 더 높이는 날 수 없었다.

이 때 날이 막 개서 사방에는 구름 한 점도 없고, 다만 대단히 아득하여 끝을 볼 수가 없을 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대체로 먼 데를 구경하면서 그 요령을 얻지 못하면 나무꾼의 소견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니 어찌 먼저 북쪽을 바라본 다음, 동쪽, 남쪽, 서쪽을 차례로 바라보고 또 가까운 데로부터 시작하여 먼 데에 이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니, 해공이 그 방도를 썩 잘 지시해 주었다.

이 산은 북으로부터 달려서 남원(南原)에 이르러 으뜸으로 일어난 것이 반야봉(般若峯)이 되었는데, 동쪽에서는 거의 이백 리를 뻗어와서 이 봉우리에 이르러 다시 우뚝하게 솟아서 북쪽으로 서리어 다하였다. 그 사면(四面)의 빼어남을 다투고 흐름을 겨루는 자잘한 봉우리와 계곡들에 대해서는 아무리 계산(計算)에 능한 사람일지라도 그 숫자를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보건대, 그 성첩(城堞)을 마치 죽 끌어서 둘러놓은 것처럼 생긴 것은 함양(咸陽)의 성(城)일 것이고, 청황색이 혼란하게 섞인 가운데 마치 흰 무지개가 가로로 관통한 것처럼 생긴 것은 진주(晉州)의 강물일 것이고, 푸른 산봉우리들이 한점 한점 얽히어 사방으로 가로질러서 곧게 선 것들은 남해(南海)와 거제(巨濟)의 군도(群島)일 것이다. 그리고 산음(山陰), 단계(丹谿), 운봉(雲峯), 구례(求禮), 하동(河東) 등의 현(縣)들은 모두 겹겹의 산골짜기에 숨어 있어서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북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바로 황석(黃石)안음(安陰)에 있다.과 취암(鷲巖)함양(咸陽)에 있다.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덕유(德裕)함음(咸陰)에 있다., 계룡(鷄龍)공주(公州)에 있다., 주우(走牛)금산(錦山)에 있다., 수도(修道)지례(知禮)에 있다., 가야(伽耶)성주(星州)에 있다.이다. 또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황산(皇山)산음(山陰)에 있다.과 감악(紺嶽)삼가(三嘉)에 있다.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팔공(八公)대구(大丘)에 있다., 청량(淸涼)안동(安東)에 있다.이다. 동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도굴(闍崛)의령(宜寧)에 있다.과 집현(集賢)진주(晉州)에 있다.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비슬(毗瑟)현풍(玄風)에 있다., 운문(雲門)청도(淸道)에 있다., 원적(圓寂)양산(梁山)에 있다.이다.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은 와룡(臥龍)사천(泗川)에 있다.이고, 남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병요(甁要)하동(河東)에 있다.와 백운(白雲)광양(光陽)에 있다.이고, 서남쪽에 있는 산으로 멀리 있는 것은 팔전(八顚)흥양(興陽)에 있다.이다. 서쪽에 있는 산으로 멀리 있는 것은 황산(荒山)운봉(雲峯)에 있다.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무등(無等)광주(光州)에 있다., 변산(邊山)부안(扶安)에 있다., 금성(錦城)나주(羅州)에 있다., 위봉(威鳳)고산(高山)에 있다., 모악(母岳)전주(全州)에 있다., 월출(月出)영암(靈巖)에 있다.이고, 서북쪽에 멀리 있는 산은 성수(聖壽)장수(長水)에 있다.이다.

이상의 산들이 혹은 조그마한 언덕 같기도 하고, 혹은 용호(龍虎) 같기도 하며, 혹은 음식 접시들을 늘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칼끝 같기도 한데, 그 중에 유독 동쪽의 팔공산과 서쪽의 무등산만이 여러 산들보다 약간 높게 보인다. 그리고 계립령(鷄立嶺) 이북으로는 푸른 산 기운이 창공에 널리 퍼져 있고, 대마도(對馬島) 이남으로는 신기루(蜃氣樓)가 하늘에 닿아 있어, 안계(眼界)가 이미 다하여 더 이상은 분명하게 볼 수가 없었다. 극기로 하여금 알 만한 것을 기록하게 한 것이 이상과 같다.

마침내 서로 돌아보고 자축하여 말하기를,

“예로부터 이 봉우리를 오른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어찌 오늘날 우리들만큼 유쾌한 구경이야 했겠는가.”

하고는, 누(壘)를 내려와 돌에 걸터앉아서 술 두어 잔을 마시고 나니, 해가 이미 정오(亭午)였다. 여기에서 영신사(靈神寺), 좌고대(坐高臺)를 바라보니, 아직도 멀리 보였다.

속히 석문(石門)을 꿰어 내려와 중산(中山)을 올라가 보니 이 또한 토봉(土峯)이었다. 군인(郡人)들이 엄천(嚴川)을 경유하여 오르는 자들은 북쪽에 있는 제이봉(第二峯)을 중산이라 하는데, 마천(馬川)을 경유하여 오르는 자들은 증봉(甑峯)을 제일봉으로 삼고 이 봉우리를 제이봉으로 삼기 때문에 그들 또한 이것을 중산이라 일컫는다. 여기서부터는 모두 산등성이를 따라서 가는데, 그 중간에 기이한 봉우리가 10여 개나 있어 모두 올라서 사방 경치를 바라볼 만하기는 상봉(上峯)과 서로 비슷했으나 아무런 명칭이 없었다. 그러자 극기가 말하기를,

“선생께서 이름을 지어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고증할 수 없는 일은 믿어주지 않음에야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이 곳 숲에는 마가목(馬價木)이 많은데, 지팡이를 만들 만하므로, 종자(從者)를 시켜 매끄럽고 곧은 것을 골라서 취하게 하였더니, 잠깐 사이에 한 다발을 취하였다.

증봉(甑峯)을 거쳐 진펄의 평원에 다다르니, 좁은 길에 서 있는 단풍나무가 마치 문설주와 문지방의 형상으로 굽어 있었으므로, 그 곳으로 나가는 사람은 모두 등을 구부리지 않고 갈 수 있었다. 이 평원은 산의 등성이에 있는데, 5, 6리쯤 넓게 탁 트인 데에 숲이 무성하고 샘물이 돌아 흐르므로, 사람이 농사지어 먹고 살 만하였다.

시냇가에는 두어 칸 되는 초막[草廠]이 있는데, 빙 둘러 섶으로 울짱을 쳤고 온돌[土炕]도 놓아져 있으니, 이것이 바로 내상군(內廂軍)이 매[鷹]를 포획하는 막사였다. 내가 영랑재(永郞岾)로부터 이 곳에 이르는 동안, 강만(岡巒)의 곳곳에 매 포획하는 도구 설치해 놓은 것을 본 것이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다. 아직은 가을 기운이 그리 높지 않아서 현재 매를 포획하는 사람은 없었다. 매의 무리는 운한(雲漢) 사이를 날아가는 동물이니, 그것이 어떻게 이 준절(峻絶)한 곳에 큼직한 덫을 설치해 놓고 엿보는 자가 있는 줄을 알겠는가. 그래서 미끼를 보고 그것을 탐하다가 갑자기 그물에 걸려 잡혀서 노끈에 매이게 되는 것이니, 이것으로 또한 사람을 경계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나라에 진헌(進獻)하는 것은 고작 1, 2련(連)에 불과한데, 희완(戲玩)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가난한 백성들로 하여금 밤낮으로 눈보라를 견뎌가면서 천 길 산봉우리의 꼭대기에 엎드려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인심(仁心)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차마 못할 일이다.

저물녘에 창불대(唱佛臺)를 올라가 보니, 깎아지른 절벽이 하도 높아서 그 아래로는 밑이 보이지 않았고, 그 위에는 초목은 없고 다만 철쭉[躑躅] 두어 떨기와 영양(羚羊)의 똥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두원곶(荳原串), 여수곶(麗水串)·섬진강(蟾津江)의 굽이굽이를 내려다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더 기관(奇觀)이었다.

해공이 여러 구렁[壑]이 모인 곳을 가리키면서 신흥사동(新興寺洞)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절도사(節度使) 이극균(李克均)이 호남(湖南)의 도적 장영기(張永己)와 여기에서 싸웠는데, 영기는 구서(狗鼠) 같은 자라서 험준한 곳을 이용했기 때문에 이공(李公) 같은 지용(智勇)으로도 그가 달아나는 것을 막지 못하고, 끝내 장흥 부사(長興府使)에게로 공(功)이 돌아갔으니, 탄식할 일이다.

해공이 또 악양현(岳陽縣)의 북쪽을 가리키면서 청학사동(靑鶴寺洞)이라고 하였다. 아, 이것이 옛날에 이른바 신선(神仙)이 산다는 곳인가 보다. 인간의 세계와 그리 서로 멀지도 않은데, 이미수(李眉叟)는 어찌하여 이 곳을 찾다가 못 찾았던가? 그렇다면 호사자(好事者)가 그 이름을 사모하여 절을 짓고서 그 이름을 기록한 것인가.

해공이 또 그 동쪽을 가리키면서 쌍계사동(雙溪寺洞)이라고 하였다. 최고운(崔孤雲)이 일찍이 이 곳에서 노닐었으므로 각석(刻石)이 남아 있다. 고운은 세속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기개(氣槪)를 지닌데다 난세(亂世)를 만났으므로, 중국(中國)에서 불우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동토(東土)에서도 용납되지 않아서, 마침내 정의롭게 속세 밖에 은둔함으로써 깊고 그윽한 계산(溪山)의 지경은 모두 그가 유력(遊歷)한 곳이었으니, 세상에서 그를 신선이라 칭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겠다.

영신사(靈神寺)에서 자는데 여기는 중이 한 사람뿐이었고, 절의 북쪽 비탈에는 석가섭(石迦葉) 일구(一軀)가 있었다. 세조 대왕(世祖大王) 때에 매양 중사(中使)를 보내서 향(香)을 내렸다. 그 석가섭의 목[項]에도 이지러진 곳이 있는데, 이 또한 왜구(倭寇)가 찍은 자국이라고 했다. 아, 왜인은 참으로 구적(寇賊)이로다. 산 사람들을 남김없이 도륙했는데, 성모와 가섭의 머리까지 또 단참(斷斬)의 화를 입었으니, 어찌 비록 아무런 감각이 없는 돌일지라도 인형(人形)을 닮은 때문에 환난을 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오른쪽 팔뚝에는 마치 불에 탄 듯한 흉터가 있는데, 이 또한 “겁화(劫火)에 불탄 것인데 조금만 더 타면 미륵(彌勒)의 세대가 된다.”고 한다. 대체로 돌의 흔적이 본디 이렇게 생긴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황괴(荒怪)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서, 내세(來世)의 이익(利益)을 추구하는 자들로 하여금 서로 다투어 전포(錢布)를 보시(布施)하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坐高臺)라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밑은 둥글게 서리었고 위는 뾰족한 데다 꼭대기에 방석(方石)이 얹혀져서 그 넓이가 겨우 한 자[尺] 정도였는데, 중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가 있으면 증과(證果)를 얻는다고 한다. 이 때 종자(從者)인 옥곤(玉崑)과 염정(廉丁)은 능란히 올라가 예배를 하므로, 내가 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는 급히 사람을 보내서 꾸짖어 중지하게 하였다. 이 무리들은 매우 어리석어서 거의 숙맥(菽麥)도 구분하지 못하는데도 능히 스스로 이와 같이 목숨을 내거니, 부도(浮屠)가 백성을 잘 속일 수 있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겠다.

법당(法堂)에는 몽산화상(蒙山和尙)의 그림 족자가 있는데, 그 위에 쓴 찬(贊)에,

두타 제일이 / 頭陀第一

이것이 바로 두수인데 / 是爲抖擻

밖으론 이미 속세를 멀리하였고 / 外已遠塵

안으론 이미 마음의 때를 벗었네 / 內已離垢

앞서 도를 깨치었고 / 得道居先

뒤에는 적멸에 들었으니 / 入滅於後

설의와 계산이 / 雪衣鷄山

천추에 썩지 않고 전하리라 / 千秋不朽

하였고, 그 곁의 인장(印章)은 청지(淸之)라는 소전(小篆)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비해당(匪懈堂)의 삼절(三絶)이었다.

그 동쪽 섬돌 아래에는 영계(靈溪)가 있고, 서쪽 섬돌 아래에는 옥천(玉泉)이 있는데, 물맛이 매우 좋아서 이것으로 차를 달인다면 중령(中泠), 혜산(惠山)도 아마 이보다 낫지는 못할 듯하였다. 샘의 서쪽에는 무너진 절이 우뚝하게 서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옛 영신사이다. 그 서북쪽으로 높은 봉우리에는 조그마한 탑(塔)이 있는데, 그 돌의 결이 아주 섬세하고 매끄러웠다. 이 또한 왜구에 의해 넘어졌던 것을 뒤에 다시 쌓고 그 중심에 철(鐵)을 꿰어놓았는데, 두어 층[數層]은 유실되었다.

임오일에는 일찍 일어나서 문을 열고 보니, 섬진강(蟾津江)에 조수(潮水)가 창일하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바로 남기(嵐氣)가 편평하게 펼쳐 있는 것이었다. 밥을 먹고 나서는 절의 서북쪽을 따라 내려와 고개 위에서 쉬면서 반야봉을 바라보니, 대략 60여 리쯤 되었다. 이제는 두 발이 다 부르트고 근력이 이미 다하여, 아무리 가서 구경하고 싶어도 강행(强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름길로 직지봉(直旨峯)을 경유하여 내려오는데, 길이 갈수록 가팔라지므로, 나무 뿌리를 부여잡고 돌 모서리를 디디며 가는데 수십 리의 길이 모두 이와 같았다. 여기서 동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우러러보니, 천왕봉이 바로 지척에 있는 것 같았다. 여기에는 대나무 끝에 간혹 열매가 있었는데 모두 사람들이 채취하여 갔다. 소나무가 큰 것은 백 아름[百圍]도 될 만한데, 깊은 골짜기에 즐비하게 서 있었으니, 이것은 모두 평소에 보지 못한 것들이다.

이미 높은 기슭을 내려와서 보니, 두 구렁의 물이 합한 곳에 그 물소리가 대단히 뿜어 나와서 임록(林麓)을 진동시키고, 백 척(百尺)이나 깊은 맑은 못에는 고기들이 자유로이 헤엄쳐 놀았다. 우리 네 사람은 여기서 손에 물을 움켜 양치질을 하고 나서 비탈길을 따라 지팡이를 끌고 가니, 매우 즐거웠다.

골짜기 어귀에는 야묘(野廟)가 있었는데, 복부(僕夫)가 말[馬]을 데리고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옷을 갈아입고 말에 올라 실택리(實宅里)에 당도하니, 부로(父老) 두어 사람이 길 아래서 맞이하여 절하면서 말하기를,

“사군(使君)께서 산을 유람하시는 동안 아무 탈도 없었으니, 감히 하례 드립니다.”

하므로, 나는 비로소 백성들이 내가 유람하느라 일을 폐했다 하여 나를 허물하지 않은 것을 보고 마음이 기뻤다.

해공은 군자사(君子寺)로 가고, 법종은 묘정사(妙貞寺)로 가고, 태허, 극기, 백원은 용유담(龍游潭)으로 놀러 가고, 나는 등귀재(登龜岾)를 넘어서 곧장 군재(郡齋)로 돌아왔는데, 나가 노닌 지 겨우 5일 만에 가슴 속과 용모가 확 트이고 조용해짐을 갑자기 깨닫게 되어, 비록 처자(妻子)나 이서(吏胥)들이 나를 볼 적에도 역시 전일과 다르게 보일 것 같았다.

아, 두류산처럼 높고 웅장하고 뛰어난 산이 중원(中原)의 땅에 있었더라면 반드시 숭산(嵩山), 태산(泰山)보다 앞서 천자(天子)가 올라가 금니(金泥)를 입힌 옥첩 옥검(玉牒玉檢)을 봉(封)하여 상제(上帝)에게 승중(升中)하였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의당 무이산(武夷山), 형악(衡嶽)에 비유되어서, 저 박아(博雅)하기로는 한창려(韓昌黎), 주회암(朱晦庵), 채서산(蔡西山) 같은 이나, 수련(修煉)을 한 이로는 손흥공(孫興公), 여동빈(呂洞賓), 백옥섬(白玉蟾)같은 이들이 서로 연달아 이 산 속에서 배회하며 서식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유독 군적(軍籍)을 도피하여 부처[佛]를 배운다는 용렬한 사내나 도망간 천인들의 소굴이 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 무리가 비록 한 차례나마 등람(登覽)하여 겨우 평소의 소원에 보답하기는 했으나, 세속의 직무에 급급하여 감히 청학동을 찾고 오대(五臺)를 유람하여 그윽하고 기괴함을 두루 탐토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어찌 이 산의 불우함이겠는가. 자미(子美)의 방장삼한(方丈三韓)의 시구를 길이 읊조리니, 나도 모르게 정신이 날아오른다. 임진년 중추(仲秋) 5일 후에 쓰노라.

 

[주D-001]결하(結夏) : 불교(佛敎)에서 인도(印度)의 우기(雨期)에 해당하는 음력 4월 15일부터 90일 동안 승려가 한 곳에 조용히 있으면서 불도(佛道)를 닦는 것을 말한다.

[주D-002]우란(盂蘭) : 불제자(佛弟子)가 음력 7월 보름날에 선조(先祖) 및 현세(現世) 부모(父母)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음식을 그릇에 담아 시방(十方)의 불승(佛僧)들에게 베푸는 불사(佛事)를 말한다.

[주D-003]나는 불을……다투게 하고 싶다 : 춘추 시대에 양자거(陽子居)라는 사람이 노자(老子)로부터 “거만해서는 안 되고 항상 남의 눈에 부족한 것처럼 보이는 훌륭한 덕을 지녀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거만한 태도를 고친 결과, 처음에는 그가 여관에서 묵을 적에 동숙자들이 좌석을 피해 달아나고, 불쬐는 자들이 부뚜막을 피해 달아났었는데, 그가 태도를 바꾼 뒤에는 동숙자들이 그에게 아무 어려움 없이 서로 좌석을 다툴 정도로 친숙해졌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莊子 寓言》

[주D-004]선니(宣尼)가……구경했던 일 : 선니는 공자(孔子)를 이른 말인데, 공자가 일찍이 동산(東山)에 올라서는 노(魯) 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泰山)에 올라서는 천하(天下)를 작게 여겼다는 데서 온 말이다. 《孟子 盡心上》

[주D-005]한자(韓子)가……유람했던 뜻 : 한자는 한유(韓愈)를 이른 말인데, 그가 일찍이 형산(衡山)에 올라 형악묘(衡嶽廟)에 배알하고 지은 시에 “내가 온 것이 정히 가을비의 절기를 만났는지라, 흐린 기운 깜깜하고 맑은 바람 불지 않아서, 묵묵히 기도하매 마치 응험이 있는 듯하니 어찌 정직함이 신명을 감동시킨 게 아니리오. 잠깐 뒤에 흐린 기운 걷히어 뭇 봉우리 나오자, 푸른 하늘 떠받치는 우뚝한 봉우릴 쳐다보노라.” 한 데서 온 말이다. 《韓昌黎集 卷三》

[주D-006]절도사(節度使)……돌아갔으니 :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의하면, 장영기(張永奇)란 도적이 전라도에서 일어나 그 무리들이 날로 퍼져가고 있으므로, 조정에서 허종(許琮)을 절도사(節度使)로 삼아 그를 체포하게 하자, 도적들은 바다 가운데 섬으로 도망쳐 있으면서 틈을 타서 가끔 노략질을 하였는데, 그들이 뒤에 장흥(長興)으로 들어갔다는 정보를 듣고는 허종이 장흥 부사 김순신(金舜臣)에게 격문(檄文)을 보내어 그를 잡도록 하였으나, 그 도적이 오히려 김순신을 쏘아 넘어뜨리고 도망치므로, 허종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서 그 도적을 사로잡아 참수(斬首)했다는 사실이 있으니, 같은 사건인 듯하나 절도사의 이름 등 서로 다른 점이 있어 자세하지 않다.

[주D-007]이미수(李眉叟)는……못 찾았던가 : 이미수는 바로 고려 때의 학자이며 문장가인 이인로(李仁老)를 가리킴. 미수는 그의 호이다. 이인로가 일찍이 속세(俗世)를 떠날 뜻이 있어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신선이 산다는 청학동(靑鶴洞)이란 곳을 찾으려고 했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한 바위에다가 시(詩)를 써서 남겼는데, 그 시에 “두류산 먼 곳에 저녁 구름 나지막한데, 일만 구렁 일천 바위가 회계산과 같구나. 지팡이 끌고 와서 청학동을 찾으려는데, 숲 너머서 원숭이 울음 소리만 들리네. 누대는 머나먼 삼신산에 아득하고, 이끼 끼어 네 글자 쓰인 것도 희미하여라. 묻노니 신선이 사는 곳이 그 어디런가. 떨어지는 꽃 흐르는 물이 아득하기만 하네.” 한 데서 온 말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三十》

[주D-008]증과(證果) : 불교(佛敎)의 용어로서, 즉 수행(修行)하여 온갖 번뇌(煩惱)를 끊고 불생 불멸(不生不滅)의 진리를 깨치는 것을 말한다.

[주D-009]비해당(匪懈堂)의 삼절(三絶) : 비해당은 세종(世宗)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호임. 삼절은 곧 안평대군이 시(詩), 서(書), 화(畫)에 모두 뛰어났으므로 일컬은 말인데, 여기서는 특히 몽산(夢山)의 그림 족자에 대하여 그 그림과 찬(贊)과 글씨가 모두 안평대군의 작품임을 의미한 말이다.

[주D-010]중령(中泠), 혜산(惠山) : 중령은 강소성(江蘇省) 진강현(鎭江縣)에 있는 천명(泉名)인데 물맛이 좋기로 유명하고, 혜산은 강소성 무석현(無錫縣)에 있는 산명인데 역시 이 곳의 샘물 또한 맛 좋기로 유명하였다.

[주D-011]옥첩 옥검(玉牒玉檢) : 옥첩은 천자가 하늘에 제사 지낼 때의 제문(祭文)을 기록한 서찰(書札)을 말하고, 옥검은 옥(玉)으로 제조한 서함(書函) 위에 제서(題書)한 것을 말한다.

[주D-012]승중(升中) : 하늘에 제사하여 일의 성공(成功)을 고(告)하는 것을 말한다.

[주D-013]손흥공(孫興公), 여동빈(呂洞賓), 백옥섬(白玉蟾) : 손흥공은 진(晉) 나라 때의 은사(隱士) 손작(孫綽)을 가리킴. 흥공은 그의 자이다. 여동빈(呂洞賓)은 당(唐) 나라 때의 도사(道士)인데, 세속에서는 그를 팔선(八仙)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일컫는다. 백옥섬은 송(宋) 나라 때 무이산(武夷山)에 은거한 도사로서, 그의 본명은 갈장경(葛長庚)이었는데, 뒤에 백씨(白氏)의 양자(養子)가 되면서 이름까지 옥섬(玉蟾)으로 바꾸었다.

[주D-014]자미(子美)의 방장삼한(方丈三韓)의 시구 : 자미는 두보(杜甫)의 자임. 두보의 봉증태상장경기시(奉贈太常張卿垍詩)에 “방장산은 삼한의 밖에 있고 곤륜산은 만국의 서쪽에 있도다.[方丈三韓外 崑崙萬國西]” 한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 방장산이란 곧 조선의 지리산(智異山)에 해당하므로 이른 말이다. 《杜少陵集 卷三》

 

 

용문몽유록(龍門夢遊錄)-신착

 

 을해년 11월 황계자(黃溪子)는 황석산성의 남쪽 교외에서 더부살이로 지내고 있었다. 다음해 병자년 정월이 되자 막내 누이를 만나보려고 화림(花林)으로 가다가 용문(龍門)을 지나던 중, 그곳에 며칠을 묵게 되었다. 그날 밤, 맘 쓸쓸히 외로운 객사엔 발빛이 대낮같이 어리고, 바람이 대나무 언덕에서 일었다. 담장 가의 매화를 마주하며 기둥에 기대어 중얼거리니, 마치 무엇을 생각하는 듯했다. 조금 지나자, 밤은 고요하고 텅 빈 객사엔 싸늘한 기운이 엄습하여 방에 들어가 앉았으나, 베개를 어루만지며 잠을 들지 못했다. 마침내 「달 밝고 바람 선선한 밤에 나그네 회포를 묻는 사람이 하나도 없네.(月白風淸夜, 無人問客懷)」라는 시구를 얻어서 읊기를 마치자 슬그머니 졸음이 왔다.

 호랑나비가 앞에서 훨훨 높이 날아가기에 따라가니, 어느 한 곳에 도착하였다. 기수(琪樹)의 구슬은 영롱하며 녹음이 물씬 짙은데, 대나무 숲의 깊고 그윽한 곳에 띠집이 호젓하게 있으니, 어찌 별세계가 아니랴! 정자 위를 바라보니, 늘어앉은 사람들이 붉은 꽃과 푸른 대나무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데, 몇 사람이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백발에 심히 괴이한 모습의 창두(蒼頭)가 정자에서 내려와 인사하고는 황계자를 인도하여 올라가니, 깔아놓은 두터운 깔개 위에다 술과 안주를 차린 술상을 벌여놓고 젊은 미인들이 그 곁에 늘어 서있었다. 앉아 있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혹은 읍하고 혹은 절하며 그에게 윗자리를 내주었다. 황계자가 이를 사양하니, 사람들이 모두 말하였다.

 “오늘의 모임은 대인을 위해 마련한 것인데 사양하실 것이 있습니까?”

 서로 강권하니, 하는 수 없이 나아가 앉았다. 모두가 감사해 하며 말하였다.

 “대인께선 멀리서 오셨으니 피곤하시겠습니다.”

 황계자도 감사해 하며 물었다.

 “그렇게 피곤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여러분과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데, 어찌 이토록 정성스러움이 지극하십니까? 성씨와 이름, 자(字)를 알려주실 수 있겠소?”

 모두가 대답하였다.

 “저희들은 화림의 보잘것없는 사람들로 모두 이곳에 살고 있었으니, 대인께서 어찌 저희를 알겠습니까?”

 각자 앞으로 나와 자신의 성과 이름을 다 소개하고는, 바로 이어서 말하였다.

 “저희들이 대인을 받들어 모시며 뵈올 수 있기를 고대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이제 가까이에 오셔서 무무르고 계시니, 이것이 어찌 하늘이 저희들에게 내려주신 연분이 아니겠습니까? 마침 황석(黃石)의 제공(諸公)과 약속이 있어서, 어제 무두가 월연(月淵)의 모임에 갔었습니다. 까닭에 군자께서 아무도 없는 적막한 곳에 오랫동안 머무르게 하였으니, 저희들의 불민함을 용서해주시겠습니까?”

 황계자가 물었다.

 “이른바 황석 제공은 대체 누구란 말이오?”

 “태수 곽(郭)부자(이름은 䞭이고, 아들은 履常·履厚), 사군(使君) 조종도(趙宗道), 금천(錦川) 유세홍(柳世弘) 부자(아들 櫝·榎), 첨지 정언남(鄭彦南) 등인데, 일시에 함께 죽은 사람들입니다.”

 황계자가 다시 물었다.

 “원컨대, 제공이 무슨 말을 했는지 듣고 싶소이다.”

 다음과 같이 황석제공의 말을 전하였다.

 조사군이 좌중에서 단식하며 먼저 곽후에게 말하였다.

 “우리들은 난리를 만나서 왜적의 칼날에 죽어 끝내 깊은 산속의 험한 골짜기에 원통한 귀신이 되었으니, 좋은 세상을 만나지 못한 것이야 어찌하겠나? 그렇지만 논자들이 나더러 헛된 죽음을 했다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네. 그때에 나는 비록 전쟁터에 있었으나 어명(御命)이 없었으니, 죽지 않았으면 그만이지만 죽은 것이 또한 어찌하여 의리에 해로웠겠나?”

 그리고는 시를 읊었다.

 

나라 위해 입성하여 난리에 죽었으니,

신하의 직분에 마땅히 행할 바라.

내 태어나 헛되이 죽었다고 말하지 마오,

당시 나 또한 군의(君衣)를 입었었다오.

 

 그리고는 한바탕 크게 웃었다. 그러자 곽후가 말하였다.

 “조사군은 명성을 헛되이 얻은 것이 아니다 할 만합니다.”

 그러더니 곧 눈물을 흘리며 또 말하였다.

 “나는 본디 세상 물정에 어두운 선비인데다 군사에 관한 일은 배우지도 못하고 주장(主將)이 되었다가 백사림(白士霖)에게 속임을 당하였네. 그리하여 세 고을 사민(士民)들의 부모와 처자식 가운데 참혹한 죽음을 당하여 간과 뇌가 땅바닥에 으깨어진 자가 몇 명인지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네. 사람에게 죄를 얻은 것인지라 나는 만 번 죽어도 애석할 것은 없으나, 장차 무슨 면목으로 제군들에게 이 답답한 마음을 호소하겠는가? 저 백사림이 구차스럽게 살고자 한 것은 마땅히 주살해야 하는 것이거늘, 박여승(朴汝昇)이 그를 찬양함은 지나친 처사가 아닌가? 이미 백사림을 입전(立傳)하여 의사(義士)라 일컬으니, 이는 세상을 속이는 하나의 효시 일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부끄러운 일이라네.”

 이렇게 말하고는 오랫동안 속으로 깊이 생각하더니, 시로 읊어내었다.

 

몸소 주장 되어 무슨 일 이루었던고

성은 함락되고 몸은 죽어 골육마저 나뉘었어라.

음산한 골짜기는 제 스스로 원들의 통곡 함께하거늘,

부끄러워라, 무슨 면목으로 제군들을 치사할고.

 

 그는 두 자식 이상과 이후를 돌아보며 또 읊었다.

 

나는 나라 위해 죽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너희 둘은 누구를 위해 죽임을 당해야 했단 말인고.

놀란 피 얼굴에 가득해도 씻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의복에 핏자국이 그대로구나.

 

 이상이 일어나 응대하며 읊었다.

 

아비는 나라 위해 죽고,

자식은 부모 위해 죽었으니,

하늘을 우러러 보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울 것이 없고도 없사와라.

 

 좌중의 한 사람이 말하였다.

 “그대는 듣지 못했는가? 세인의 시는 ‘우리들이 성 안에서 죽은 것이 의를 위해 죽은 것’이라고 했지만, 지금 사람들은 동래성(東萊城) 지킨 것만 이야기한다네. 죽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나 죽을 만한 곳에서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인데, 황석산성의 남문(南門)이 어찌 죽을 만한 곳이어서 죽었겠는가? 세인의 시는 진실로 이러한 이유였다네.”

 이후가 답답해하더니 시를 지었다.

 

세상 사람들이 어찌 이와 같은 사정을 알겠는가만

머리 위엔 훤하디 훤한 해가 이 땅을 굽어보시네.

 

 마침내 한바탕 통곡을 하였다. 그러자 유금천(柳金川)이 하늘을 우러러 눈물을 흐리며 말하였다.

 “아! 나라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야 죽어도 또한 후회될 것이 없겠으나, 우리 부자와 같은 경우는 일개 충의를 지닌 백성으로 왜적의 칼날에 함께 죽었으니, 그 원통함이 어찌 이보다 더 크리오! 백만의 기세등등한 왜구가 고립된 성의 수백 군졸을 죽였으니, 이는 비유하자면 태산이 새알을 짓누를 것이요, 천둥과 번개가 썩은 나무에 벼락 친 것과 같았다오. 마치 옛적의 장순(張巡), 허원(許遠), 남제운(南霽雲), 뇌만춘(雷萬春)의 충성과 용맹으로도 감히 강회(江淮)의 보루를 본전치 못하여 성이 함락되어 죽었던 것과 같았지만, 세상 물정에 어두운 선비 곽후와 용렬한 사내 백사림이 성 안에 함께 있고도 어찌 성이 함락되지 않기를 바랄 수 있었겠소? 이것은 어리석은 여자라 해도 알 수 있었던 것이나, 모든 사람들이 힘을 다하여 도운 것은 무엇 때문이었겠소? 왜적이 위협한다고 해서 성에 들인 것은 또한 누구였겠소? 영남의 여러 성 가운데, 오직 황석산성만이 아직 함락되어서 도륙의 참화를 입지 않았었는데도 백사림은 살려고 도망하였으나 곽후는 몸소 죽었거늘, 여러 사람들이 지금 누구의 공이라 하는지 궁금하오? 그때 같이 성을 지켰던 사람들도 진실로 함께 죽기를 달게 여겼었소. 우리 이 사람들 애달프거늘, 무슨 죄를 하늘에 졌단 말이오!”

 이어서 시로써 읊었다.

 

원한 깃든 긴 강이 목 메여 흐르지 못하니,

한 동이 술로도 온몸 가득한 근심 씻기 어려워라.

지금에도 깊은 골짜기 처량히 한 맺힌 울음소리,

왜적의 칼날에 죽은 아비와 아들이 머리가 함께 벌려 있네.

 

 유금천의 아들 강(橿)이 곁에 있다가 피를 토하듯 읊조렸다.

 

놀란 피 내 얼굴에 가득했건만

엉긴 채로 몇 해를 보냈던가.

연못가에 이르러서도 차마 씻을 수 없었거늘,

어찌 대교(大橋)의 물결이라 해서 따르리오.

 

 정첨지가 끝으로 슬픈 노래를 지어 읊조렸다.

 

우리의 죄 어찌하여 여기에 이르렀을고,

몰아서 성으로 들인 것은 운명인가 시세였던가.

고립된 성 한밤중 포화는 우레와 같이 날렸고,

왜적의 칼날 한 번 휘날리자 혼비백산하였네.

육신이 깊은 골짜기에 뒹굴어도 나의 시신 거둘 자 없거늘,

빈 산에 해조차 지니 혼백은 누구를 의지할고.

 

 사설(辭說)이 지극히 처량하여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슬프게 울었고, 좌우의 여러 사람들도 서로 마주보며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홀연히 자주색 옷을 입고 키가 훤칠한 사람이 밖에서 들어왔다. 유소군(柳小君)이 이게 발끈 화를 내며 말하였다.

 “내가 네 육신을 씹어 먹고 싶지만 차마 그러지 않는 것은 도리어 입이 더럽혀질까 해서이다. 그런데 네게 감히 여기에 오다니 어찌 그리도 당돌하단 말이냐?”

 주먹을 휘두르며 겁을 주자, 그는 얼굴을 붉히며 물러갔다.

 이윽고 구름이 고갯마루로 잠기고 서산의 해가 이미 어두워지자, 숲속의 까마귀들은 까악까악 제 집 찾아들고 물가의 짐승들이 서로 울부짖으니, 월연의 모임에 초대된 무리들 또한 물러가고자 했다. 이에 곽후가 말하였다.

 “좋은 날은 어긋나기 쉽고 차후의 모임도 기약하기 어렵거늘, 어찌하여 갑자기 떠나려 하는가?”

 그러자 무리들이 말하였다.

 “이 순간에 황계자라는 분이 와 계실 것이니, 내일이면 용문원(龍門院)에 가서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유소군이 다급히 말하였다.

 “그가 어디에 있소? 나는 그와 동갑인데다 오래 동안 사이가 좋았고, 이제 혼인까지 하여 한 집안이 되니, 정리와 의리가 더더욱 돈독하였소. 그러니 나의 집안을 일으켜주기는 이 친구가 아니면 그 누가 하겠소?”

 즉시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효자문의 정표(旌表) 내릴 것을 누가 알았으랴,

변변한 공적도 없는 못난 이 몸에까지 미치네.

황천세계에 지금 있으니 한이 끝없는데,

한 집안이 다른 집안을 헐뜯고 있네.

 

 읊기를 마치더니, 거듭거듭 정중하게 말하였다.

 “여러분! 청컨대, 이 시를 황계자에게 주어 나의 간곡한 뜻을 전달해주십시오.”

 이렇게 전갈해달라고 하시었습니다.

 

 “대인이 유소군과 정말로 서로 가까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황계자는 전해주는 말을 듣고서 목이 메도록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모두에게 말하였다.

 “황석에서의 죽음은 누구인들 슬퍼하지 않겠소? 같은 칼날 아래에서의 참화를 입은 유군 부자와 같은 경우가 다시 있겠소? 대개 일찍이 논하건대, 황석산성의 싸움에서 백사림이 곽후를 고주(孤注)로 삼아서 끝내 사지에 남겨두고는 성을 버리고 먼저 도망했으니, 어찌 오로지 곽후에게만 죄인이겠는가? 또한 일국의 죄인이로다. 사람의 육신을 먹으려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거늘, 저 일시라도 백사림의 목숨을 구하고자 한 자는 또한 오로지 무슨 마음이었을꼬? 이들 또한 곽후에게 죄인이 되는 것이리로다.”

 모두가 그 말을 듣고서는 또한 참으로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고 여겼다.

 

 좌중에 있던 박숙선(朴叔善)이라는 자가 월연(月淵)의 말을 더욱 상세하게 전하였다. 숙선의 자는 동보(同甫)인데, 풍채가 아름답고 담론을 잘하며 또한 시사(詩詞)에 능하다고들 했다. 고려 말 사람이었다. 홍무연간(洪武年間)에 박습(朴習)이라는 자와 함께 벼슬한 사람이었다. 고을의 시사(時事)를 논하매, 분명하기가 마치 어제의 일 다루듯이 했다. 황계자가 물었다.

 “그대 또한 원한을 품은 사람이오?”

 “저는 원학(猿鶴)에서 화림으로 이사해온 사람입니다. 임월(林樾), 하천(河千), 안창(安昶), 박번(朴蕃), 박유령(朴有齡)은 모두 홍무연간의 옛 관리였는데, 임·하·안의 세 성씨는 그 후예들이나, 저만 유독 후손이 끊겼습니다. 제가 일찍이 시사(詩史)를 일삼았고 또 산경(山經)과 지지(地誌)의 의심나는 것을 설명해주고, 관사(官舍)를 적절히 제정하는 등, 모두 저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박공[박습]은 저더러 친구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 후, 박공의 일에 연루되어 이 골짜기에서 틀어박혀 지냈는데, 그때의 나이가 87살이었습니다. 무덤이 이 골짜기에 있으나, 제사는 이미 오래 전에 끊기고, 텅 빈 산의 비바람에 무덤은 묵고 풀만 우거졌을 뿐이지요. 지금 군자를 받들어 모시니, 마치 밝은 햇빛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어서 논하는 것이 산수(山水)에 미치자, 박숙선이 또 말하였다.

 “원학은 경치가 좋은 곳입니다. 금원(金猿)이라는 호칭, 서문(西門)이라는 동굴, 효자라는 바위는 그대들이 다 알고 있는 바로서 겉모양만을 가지고 속되게 말한 것이 그대들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이곳에는 세 골짜기가 있는데, ‘망양(亡羊)’이라 부르는 것은, 옛날에 어떤 사람이 일찍이 이곳에서 양을 잃었던 까닭에 사람들이 동명(洞名)으로 삼은 것입니다. ‘호음(虎陰)’이라 부르는 것은, 바야흐로 작은 암석들이 일어났다 누었다 한 것이 마치 쭈그리고 앉아 있는 범의 형상과 누워 있는 범의 형상과 같았는데,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호환(虎患)을 많이 입어 인일(寅日)마다 이 산에 제사를 지냈던 까닭에 또한 사람들이 그와 같이 부른 것이니, 그대들이 어찌 그것을 들어 알겠습니까? 이 골짜기에는 경치가 좋은 곳이 몇 군데 있으나 또한 흉상(凶象)도 있어,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다 볼 수가 없습니다. 저는 산수를 너무나 좋아하는 기질이 있어서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오직 덕유산의 정상 향적봉(香積峰)만은 오르지 못했고, 그 산상에는 감로수(甘露水)가 있다 하나 아직 맛보지 못했으며, 오수자굴이 그 중봉에 오르는 급경사면에 있다 하나 아직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황계자가 말하였다.

 “동굴은 있을 수 있겠으나, 물은 어찌 달겠소? 다만 가을이 왔는데도 나뭇잎이 하나도 우물에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괴이하구려.”

 박숙선이 말하였다.

 “이것이 어찌 산신령이 감추어 둔 신비(神秘)가 아니겠습니까?”

 황계자가 말하였다.

 “우물곁에 향나무가 있었으나 향기가 없어 중이 ‘미륵주세(彌勒主世)라 말한 후에야 향기가 있었다.’고 하니, 이는 괴이하지 않소?”

 “미륵불이란 것은 불(佛)이 곧 허무(虛無)거늘, 어찌 향기가 있는 것을 없게 할 수 있으며, 향기가 없는 것을 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사람들은 세 골짜기의 절승지(絶勝地) 가운데 원학을 최고로 여깁니다. 그러나 흰 돌이 구름같이 깔려 있고 여울물이 세차게 흘러내리며, 용추 폭포수가 장대한 경관을 이루고 바위로 이루어진 뫼들이 빼어나며, 골짜기가 깊고 그윽하니, 심진(尋眞)이 어찌 그 풍채가 원학보다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무심히 흐르고 우뚝 솟아 있을 뿐입니다. 즐거움은 그 가운데 있거늘, 사람들이 억지로 그것에 이름을 붙여 무슨 바위, 무슨 대(臺), 무슨 못이라 하니, 이는 뱀을 그리는데 있어 발을 덧붙이는 격이라, 그것들이 어찌 산수의 절경 자체에 있어서 그랬겠습니까? 내 들으니, 군자가 심진에서 노닐었던 날, ‘심진의 골짜기 안에 심진을 찾은 객, 피리를 부는 바위 가에서 피리 부는 사람’의 시가 있었고, 또 ‘장수사연선수사(長水寺連禪水寺)’라는 구가 이었다 하니, 정말입니까?”

 황계자가 말하였다.

 “그렇소. 내가 무신년 봄에 풍류암(風流巖)에서 노닐었을 때, 뜻밖에 흥이 일어나 시를 지었으나 그 연(聯)을 이루지 못하고 암벽 위에 제(題)하여 두고는 후일 시에 능숙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소.”

 박숙선이 말하였다.

 “군자의 시가 산수의 경치 좋은 곳에서 흥이 일어났으나 연을 이루지 못한 것이라지만, 비록 조화에 능한 사람이라도 능히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옛적에 중 찬혜(贊惠)가 사신암(舍身菴)에 살았는데, 시 읊기를 잘했답니다. 어느 날 저와 함께 이 골짜기에서 노닐었는데, 바로 그 시를 보고 애써 연을 붙이고자 했으나 붙이지 못하고는 탄식하다가 그냥 갔습니다. 군자의 시는 저승에 있는 귀신도 울렸다고 할 만합니다.”

 이야기 도중, 박숙선이 문득 처량히 말하였다.

 “오늘 밤은 어인 밤이어서 이 연회를 맞이하니, 한 동이의 술은 예나 지금이나 결국 세상과 이별해야 하는 화표(華表)의 소회(所懷)를 북돋우는 것인가?”

 그리고는 시를 지었다.

 

먼 바다 망망하니 몇 해나 바뀌었는고?

황야로 들어가니 야인(野人)들 밭 가는구나.

천 년에 한 번 둥지로 돌아가는 두루미,

화표에 있는 이의 옛 성이 정(丁)씨인 줄을 뉘 알리요.

 

 한번 읊고 나더니 길게 탄식하고는, 술을 가득 부어 서로엑 권하며 말하였다.

 “떨어지는 꽃과 흐르는 물과 같은 정을 나눔은 인간 세상 어느 곳에서 하리오. 술은 회수(淮水)처럼 가득하고 객은 자리에 있으니, 여러분들이여! 여러분들이여! 취하지 않고서 어디로 돌아간단 말이오? 하물며 지금은 변방에 변고가 있어 나라의 운명이 매우 어려운데, 벼슬아치들의 다툼이 얽히고설켜서 오랑캐를 막아낼 계책은 세우지도 않으니, 오늘밤의 모임이 타향에서 방황해야 하는 신정(新亭)의 감회가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황계자가 술잔을 들었으나 마시지 않고 말하였다.

 “산천은 예와 같으나, 눈을 들어보니 경치가 다름이 있도다.”

 박숙선이 말하였다.

 “지금의 우리들도 옛날의 백인(伯仁)입니까?”

 황계자가 웃으며 말하였다.

 “백인이 곧 나라면, 무홍(茂弘)은 누구요?”

 좌중에 있던 모든 사람이 웃으며 말하였다.

 “우리들이 은근히 백인에 비유하자 무홍으로 저희들을 기롱하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사람들이 각기 술잔을 들어 축수하며, 노래도 하고 춤도 추며 말하였다.

 “전하는 말에 군자는 여러 해 동안 덕을 사모했다 하더이다. 지금 옷소매를 부여잡으매 마음속에 격한 감정이 일어나니, 대인이시어! 대인이시어! 만수무강옵소서!”

 황계자가 술잔을 들어 사례하고 권하며, 시 한 구를 주었다.

 

이 다음에 생각하고 그리워하던 곳 알고자 할진댄,

밝은 달밤 배꽃에 자규새가 울고 있을진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새벽닭이 한 번 울자, 무리들이 홀연히 보이지 않았다.

 

 이내 하품하고 기지개를 켜다가 깨어나니, 박생이 곁에서 코고는 소리가 마치 우레와 같았다. 다음날, 꿈속에 있었던 일을 화림의 아는 사람들에게 낱낱이 말하니, 모두가 놀라 괴이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다.

 

 

열녀함양박씨전(연암 박지원)

 

제(齊) 나라 사람의 말에, “열녀는 지아비를 두 번 얻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를테면 《시경》 용풍(鄘風) 백주(柏舟)의 시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개가(改嫁)한 여자의 자손은 정직(正職)에는 서용(敍用)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일반 백성과 무지한 평민들을 위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랴.

마침내 우리 왕조 400년 동안 백성들이 오랫동안 앞장서 이끄신 임금님들의 교화에 이미 젖어, 여자는 귀하든 천하든 간에, 또 그 일족이 미천하거나 현달했거나 간에 과부로 수절하지 않음이 없어 드디어 이로써 풍속을 이루었으니, 옛날에 칭송했던 열녀는 오늘날 도처에 있는 과부들인 것이다.

심지어 촌구석의 어린 아낙이나 여염의 젊은 과부와 같은 경우는 친정 부모가 과부의 속을 헤아리지 못하고 개가하라며 핍박하는 일도 있지 않고 자손이 정직에 서용되지 못하는 수치를 당하는 것도 아니건만, 한갓 과부로 지내는 것만으로는 절개가 되기에 부족하다 생각하여, 왕왕 한낮의 촛불처럼 무의미한 여생을 스스로 끝내 버리고 남편을 따라 죽기를 빌어, 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뛰어들어 죽거나 독약을 먹고 죽거나 목매달아 죽기를 마치 낙토를 밟듯이 하니, 열녀는 열녀지만 어찌 지나치지 않은가!

예전에 이름난 벼슬아치 형제가 있었다. 장차 남의 청환(淸宦)의 길을 막으려 하면서 어머니 앞에서 이를 의논하자, 어머니는

“그 사람에게 무슨 허물이 있기에 이를 막으려 하느냐?”

하고 물었다. 아들들이 대답하기를,

“그 윗대에 과부된 이가 있었는데 그에 대한 바깥의 논의가 자못 시끄럽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어머니가 깜짝 놀라며,

“그 일은 규방의 일인데 어떻게 알았단 말이냐?”

하자, 아들들이 대답하기를,

“풍문(風聞)이 그렇습니다.”

하였다. 어머니는 말하였다.

“바람이란 소리는 있으되 형체가 없다. 눈으로 보자 해도 보이는 것이 없고, 손으로 잡아 봐도 잡히는 것이 없으며, 허공에서 일어나서 능히 만물을 들뜨게 하는 것이다. 어찌하여 무형(無形)의 일을 가지고 들뜬 가운데서 사람을 논하려 하느냐? 더구나 너희는 과부의 자식이다. 과부의 자식이 오히려 과부를 논할 수 있단 말이냐? 앉거라. 내가 너희에게 보여줄 게 있다.”

하고는 품고 있던 엽전 한 닢을 꺼내며 말하였다.

“이것에 테두리가 있느냐?”

“없습니다.”

“이것에 글자가 있느냐?”

“없습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드리우며 말하였다.

“이것은 너희 어미가 죽음을 참아 낸 부적이다. 10년을 손으로 만졌더니 다 닳아 없어진 것이다. 무릇 사람의 혈기는 음양에 뿌리를 두고, 정욕은 혈기에 모이며, 그리운 생각은 고독한 데서 생겨나고, 슬픔은 그리운 생각에 기인하는 것이다. 과부란 고독한 처지에 놓여 슬픔이 지극한 사람이다. 혈기가 때로 왕성해지면 어찌 혹 과부라고 해서 감정이 없을 수 있겠느냐?

가물거리는 등잔불에 제 그림자 위로하며 홀로 지내는 밤은 지새기도 어렵더라. 만약에 또 처마 끝에서 빗물이 똑똑 떨어지거나 창에 비친 달빛이 하얗게 흘러들며, 낙엽 하나가 뜰에 지고 외기러기 하늘을 울고 가며, 멀리서 닭 울음도 들리지 않고 어린 종년은 세상 모르고 코를 골면 이런저런 근심으로 잠 못 이루니 이 고충을 누구에게 호소하랴.

그럴 때면 나는 이 엽전을 꺼내 굴려서 온 방을 더듬고 다니는데 둥근 것이라 잘 달아나다가도 턱진 데를 만나면 주저앉는다. 그러면 내가 찾아서 또 굴리곤 한다. 밤마다 늘상 대여섯 번을 굴리면 먼동이 트더구나. 10년 사이에 해마다 그 횟수가 점차 줄어서 10년이 지난 이후에는 때로는 닷새 밤에 한 번 굴리고, 때로는 열흘 밤에 한 번 굴렸는데, 혈기가 쇠해진 뒤로는 더 이상 이 엽전을 굴리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도 내가 이것을 열 겹이나 싸서 20여 년 동안이나 간직해 온 것은 엽전의 공로를 잊지 않으며 때로는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말을 마치고서 모자는 서로 붙들고 울었다. 당시의 식자(識者)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서

“이야말로 열녀라고 이를 만하다.”

고 했다.

아! 그 모진 절개와 맑은 행실이 이와 같은데도 당시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이름이 묻혀 후세에도 전해지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과부가 의를 지켜 개가하지 않는 것이 마침내 온 나라의 상법(常法)이 되었으므로, 한번 죽지 않으면 과부의 집안에서 남다른 절개를 보일 길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안의 현감(安義縣監)으로 정사를 보던 이듬해 계축년(1793, 정조 17) 의 어느 달 어느 날이다. 밤이 새려 할 무렵 내가 잠이 살짝 깼을 때, 마루 앞에서 몇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다가 또 탄식하고 슬퍼하는 소리를 들었다. 무슨 급히 알릴 일이 있는 모양인데, 내 잠을 깨울까 두려워하는 듯하였다. 그래서 내가 목소리를 높여,

“닭이 울었느냐?”

하고 묻자 좌우에서,

“이미 서너 머리 울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밖에 무슨 일이 있느냐?”

“통인(通引) 박상효(朴相孝)의 조카딸로서 함양(咸陽)으로 출가하여 일찍 홀로 된 이가 그 남편의 삼년상을 마치고 약을 먹어 숨이 끊어지려 하니, 와서 구환해 달라고 급히 연락이 왔사옵니다. 그런데 상효가 마침 숙직 당번이라 황공하여 감히 사사로이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빨리 가 보라고 명하고, 늦을녘에 미쳐서

“함양의 과부가 소생했느냐?”

고 물었더니, 좌우에서

“이미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나는 길게 탄식하며

“열녀로다, 그 사람이여!”

라고 하고 나서 뭇 아전들을 불러 놓고 물었다.

“함양에 열녀가 났는데, 본시 안의(安義) 출신이라니 그 여자의 나이가 방금 몇 살이나 되고, 함양의 뉘 집에 시집갔으며, 어려서부터 심지와 행실은 어떠했는지 너희들 중에 아는 자가 있느냐?”

그러자 뭇 아전들이 한숨지으며 나아와 아뢰었다.

“박녀(朴女)의 집안은 대대로 이 고을 아전입니다. 그 아비 이름은 상일(相一)이온대, 일찍 죽었고 이 외동딸만을 두었습니다. 어미 역시 일찍 죽어서 어려서부터 그 조부모에게서 자랐사온대 자식된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열아홉 살이 되자 출가하여 함양 임술증(林述曾)의 처가 되었는데, 그 시댁 역시 대대로 고을 아전입니다. 술증이 본디 약하여 한 번 초례(醮禮)를 치르고 돌아간 지 반년이 채 못 되어 죽었습니다. 박녀는 지아비상을 치르면서 예(禮)를 극진히 하였고, 시부모를 섬기는 데도 며느리된 도리를 다해 두 고을의 친척과 이웃들이 그 어짊을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오늘 이러한 일이 있고 보니 과연 그 말이 맞습니다.”

어느 늙은 아전이 감개하여 말하였다.

“박녀가 아직 시집가기 몇 달 전에 ‘술증의 병이 이미 골수에 들어 부부 관계를 맺을 가망이 만무하다 하니 어찌 혼인 약속을 물리지 않느냐.’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 조부모가 넌지시 박녀에게 일러 주었으나 박녀는 잠자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혼인 날짜가 박두하여 여자의 집에서 사람을 시켜 술증의 상태를 엿보게 하였더니, 술증이 비록 용모는 아름다우나 노점(勞漸 폐결핵)에 걸려 콜록콜록거리며 버섯이 서 있는 듯하고 그림자가 걸어 다니는 것 같았으므로, 집안에서는 모두 크게 두려워하여 다른 중매쟁이를 부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박녀가 정색을 하고 말하기를 ‘전날 재봉한 옷들은 누구의 몸에 맞게 한 것이며, 누구의 옷이라 불렀던 것입니까? 저는 처음 지은 옷을 지키기를 원합니다.’ 하기에 집안에서는 그 뜻을 알고 마침내 기일을 정한 대로 사위를 맞이했으니, 비록 명색은 혼례식을 치렀다 하나 사실은 끝내 입혀보지 못한 옷만 지켰다고 합니다.”

얼마 후 함양 군수인 윤광석(尹光碩) 사또가 밤에 이상한 꿈을 꾸고 느낀 바가 있어 열부전(烈婦傳)을 지었고, 산청 현감(山淸縣監) 이면제(李勉齊) 사또도 박녀를 위해 전(傳)을 지었으며, 거창(居昌)의 신돈항(愼敦恒)은 후세에 훌륭한 글을 남기고자 하는 선비였는데, 박녀를 위하여 그 절의의 전말을 엮었다.

생각하면 박녀의 마음이 어찌 이렇지 않았으랴! 나이 젊은 과부가 오래 세상에 남아 있으면 길이 친척들이 불쌍히 여기는 신세가 되고, 동리 사람들이 함부로 추측하는 대상이 됨을 면치 못하니 속히 이 몸이 없어지는 것만 못하다고.

아! 슬프구나. 성복(成服)을 하고도 죽음을 참은 것은 장사 지내는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요, 장사를 지내고도 죽음을 참은 것은 소상(小祥)이 있었기 때문이요, 소상을 지내고도 죽음을 참은 것은 대상(大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상이 끝이 났으니 상기(喪期)가 다한 것이요, 한날 한시에 따라 죽어 마침내 처음 뜻을 완수했으니 어찌 열녀라 아니 할 수 있겠는가.

 

[주D-001]제(齊) 나라 …… 하였으니 : 제 나라의 현자 왕촉(王蠋)이 제 나라를 침략한 연(燕) 나라가 자신을 장수로 기용하겠다는 제안을 거부하면서 한 말이다. 그는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정숙한 여자는 지아비를 두 번 얻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 貞女不更二夫〕”는 말을 남기고 자결했다. 《史記 卷82 田單列傳》

[주D-002]백주(柏舟) : 《시경》 용풍(鄘風)의 편명으로, 위(衛) 나라 세자 공백(共伯)이 일찍 죽고 그의 아내인 공강(共姜)이 절개를 지키려 하였는데, 그녀의 부모가 이를 막고 재가를 시키려 하자 공강이 자신의 의지를 노래한 시라고 한다.

[주D-003]《경국대전(經國大典)》에 …… 하였으니 : 정직(正職)은 문무반(文武班)의 정식 벼슬을 가리킨다. 《경국대전》 이전(吏典) 경관직(京官職) 조에 “실행(失行)한 부녀와 재가(再嫁)한 부녀의 소생은 동반직(東班職)과 서반직(西班職)에 서용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 규정은 정조(正祖) 9년(1785) 《경국대전》과 《속대전(續大典)》 등을 통합하여 편찬한 《대전통편(大典通編)》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

[주D-004]오랫동안 …… 교화 : 원문은 ‘久道之化’인데, ‘久道’는 ‘久導’와 같다. 《백척오동각집(百尺梧桐閣集)》, 《연암제각기(燕巖諸閣記)》 등에는 바로 위의 ‘우리 왕조〔國朝〕’ 앞에 공백을 둠과 동시에 이 구절에서도 ‘久道之 化’라 하여 중간에 공백을 두어 경의를 표했다.

[주D-005]한낮의 …… 버리고 : 당시 풍속에 과부는 외간 남자와 접촉한다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거처하는 방에 대낮에도 촛불을 켜 두었다. 죽기로 결심했으므로 더 이상 그러한 구차스러운 조치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주D-006]청환(淸宦) : 봉록은 많치 않으나 명예롭게 여겨졌던 홍문관, 예문관, 규장각 등의 하위 관직을 가리킨다. 학식과 문벌을 갖춘 인물에 한하여 허용되었다.

[주D-007]제 그림자 위로하며 : 원문은 ‘弔影’인데, ‘형영상조(形影相弔)’라 하여 아무도 없고 자신의 몸과 그림자만이 서로를 위로한다는 뜻으로 의지할 데 없는 외톨이 신세를 표현한 말이다.

[주D-008]제(齊) 나라 …… 때문이다 : 이 부분이 열녀 함양박씨전의 서문에 해당된다.

[주D-009]통인(通引) : 수령의 잔심부름을 하던 아전을 말한다.

[주D-010]입혀보지 못한 옷만 지켰다고 합니다 : 부부 관계가 한 번도 성사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주D-011]이면제(李勉齊) : 원문은 ‘李侯勉齊’라고 되어 있는데, 후(侯)는 고대 중국의 제후에 해당한다는 뜻으로 사또에 붙이는 경칭이다. 원문에는 이면제의 ‘齊’ 자가 ‘齋’ 자로 되어 있으나, 여러 이본들에 따라 바로잡았다. 《문과방목(文科榜目)》에 의하면 이면제는 1743년생으로, 1783년 진사 급제하였다.

 

 

한죽당섭필 상-이덕무

 

 

최고운(崔孤雲)의 화상(畫像)

 

해인사(海印寺)에 최고운 선생의 화상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 곁에 쓰기를,

 

“을사생으로 당 희종(唐僖宗) 광계(光啓) 3년(887)에 났으니 신라 진성여주(眞聖女主) 만(曼)의 원년(元年)이다.”

 

하였고, 그 여문(儷文)에,

 

“무협중봉(巫峽重峯)의 나이에 큰 뜻을 품고 중국에 들어갔다가 은하열수(銀河列宿)의 나이에 뜻에 성취하고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한 기록이 있는데, 대개 당 소종(唐昭宗) 건녕(乾寧) 3년 병진년(896)에 중국에 들어갔다가 후량(後梁) 태조(太祖) 건화(乾化) 2년 임신년(912)에 우리나라로 돌아온 셈이다. 그리고 해인사(海印寺) 선안주원벽기(善安住院壁記)를 살펴보니 그 끝에,

 

“내공봉 겸한림학사 승무랑 전수병부시랑 권지서서감사 사자금어대 최치원 찬.(內供奉兼翰林學士承務郞前守兵部侍郞權知瑞書監事賜紫金魚袋崔致遠撰).”

 

이라 씌어 있고, 또,

 

“거당(巨唐) 광화(光化 소제(昭帝)의 연호) 3년(900) 천하가 태평한 10월 그믐에 기록하다.”

 

하였다. 그렇다면 14세에 이미 고관이 되어 신라에 벼슬한 셈이 된다. 또 황소(黃巢)를 토벌하자는 격서도 있다. 황소의 난은 당 희종(唐僖宗) 광명(廣明) 원년 경자년(880)에 있었으니 고운 선생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다. 그러므로 을사생이란 말은 아마도 잘못 전해진 것 같다. 뒤에 상고해 보니 무인생(858)이며 을사년에 우리나라로 돌아온 듯하다.

 

 

박춘봉(朴春鳳)

 

무신년(1728, 영조 4)의 역적(逆賊)인 정희량(鄭希亮)이 거병(擧兵)하여 안음현(安陰縣)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함양군(咸陽郡)에 웅거하였다. 그리고 함양군 창고지기 아전인 박춘봉을 소환하여 창고 문을 열고 곡식을 풀어주려 하였다. 그러나 박춘봉이 열쇠를 주지 않으니 도적이 병기를 들이대고 위협하였다. 그러자 춘봉이 눈을 부릅뜨고 큰 소리로,

 

“안음의 정 생원(鄭生員)이 어찌 국고의 곡식을 관여할 수 있겠는가?”

하니, 도적이 마침내 6~7일 동안을 사정없이 난타하여 죽게 하였으나, 그때 그의 이런 충의를 드러내준 사람이 없었으므로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안타깝게 여긴다.

 

 

안처순(安處順)

 

안처순의 자는 순지(順之)이니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전적(典籍)을 지낸 안기(安璣)이고 어머니는 조양 임씨(兆陽林氏)이다.

처순이 태어난 지 6세에 아버지는 안기가 졸(卒)하였으므로 중부(仲父) 판서 안침(安琛)의 집에서 자랐다. 그는 정덕(正德) 계유년(1513, 중종 8)에 진사(進士)에 합격되고, 갑술년(1514, 중종 9)에 병과(丙科)로 등용되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과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거쳐 무인년(1518, 중종 13)에 구례 현감(求禮縣監)에 제수되었다.

그런데 그때의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여 일찍이 상종하며 교류하던 자들이 잇달아 배척당하고 쫓겨나게 되었다. 이행(李荇)이 사사(使事)로 전주(全州)에 왔을 때 마침내 그와 모여 술이 반쯤 취하자 세상 변고에 감상(感傷)되어 눈물이 흐르는 것을 금하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조의(朝議)가 떠들썩하여 그를 중상하려 하니, 그는 곧 병을 핑계로 집에 돌아가서 순수(鶉水) 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당금(黨禁)이 차츰 풀리자 갑오년(1534, 중종 29)에 전적(典籍)에 제배되었으며 봉상시 판관(奉常寺判官)에 전직되어 졸하니, 나이 43세였다.

그는 사람됨이 단정하고 깨끗하며 일을 처리하는 데에 민첩하고 과단성이 있으며, 정성으로 사람을 대우하였다. 그리고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 섬기지 못한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겨 효성을 다해 어머니를 섬겼다. 식사는 어머니가 먹은 뒤에 비로소 먹었으며, 어머니의 식사가 평상과 같지 않으면 감히 배불리 먹지 않았다.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게 되자 3일 동안을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않았으며 소상(小祥)이 지낸 뒤에야 비로소 거친 밥을 먹었는데, 소금을 찬으로 하였고 조미한 찬을 들지 않았으며 채소와 과일을 먹지 않았다.

그리고 홀로 흙으로 만든 구들에 거처하면서 지극히 슬퍼하며 사모하였고, 밤이면 반드시 앉아 벽에 의지하여 잤는데 어떤 때에는 노끈을 들보에 걸고 상투를 달아매어 졸음을 쫓기도 하였다. 언제나 첫닭이 울면 산소에 올라가 슬피 곡하였고 이어 백씨ㆍ중씨와 여막에 나아가 날이 새도록 궤연(几筵) 앞에서 호곡하고는 드디어 부엌에 나가 손수 찬구(饌具)를 받들어 상식(上食)하는 일을 추울 때나 더울 때나 폐하지 않았다.

그리고 겨울철에 눈이 오면 반드시 비를 들고 영역(塋域)을 소제하는 등 3년 간을 한결같이 처음 초상당한 것처럼 하였다. 슬픔이 이르면 문득 곡을 하였으며 사람들과 대화하지 않았고 일찍이 이를 보인 적이 없었다. 또한 제사 올리는 일에 근신하여 3일 동안 목욕 재계했고 옷을 벗지 않고 잤다. 매양 어버이의 생신날을 만나면 평소 어버이가 입던 옷을 내 놓고 제사를 올리면서 슬피 울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백씨와 중씨를 아버지같이 섬겼고, 내외종(內外從) 조카 수십 인과 항상 같이 모여 먹으면서 가르쳤다. 재물을 아낌없이 풀어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두루 구제하였으며 환난을 구원하여 해결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붕우(朋友)와 사귈 때에는 이해(利害)로 그 본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趙光祖)가 능주(綾州)로 귀양갔을 적에 구례 현감이 되었었는데 달려가 만났고, 남쪽으로 쫓겨간 친구에게 모두 힘을 다하여 도와주면서도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았다.

아들은 전(瑑), 사위는 노진(盧禛)인데 벼슬이 판서(判書)이다.

 

 

노우명(盧友明)

 

노우명의 자는 군량(君亮)이며 풍천(豐川) 사람으로 참판(參判) 숙동(叔仝)의 손자이다. 아버지 분(昐)은 예문관 교리(藝文館校理)이며 어머니는 거창 신씨(居昌愼氏)이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스승에게 나아가 힘써 배워 명성이 대단하였으며, 형인 진사(進士) 우량(友良)과 아우인 진사 우영(友英)과 함께 문장과 행실이 있었다. 나이 28세에 무오년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다. 어머니 상(喪)을 당하였는데, 그때는 바로 연산군이 단상(短喪)의 명을 내린 때였으나 삼년 복제를 변경하지 않고 입었다.

이로부터 과거 공부를 하지 않고 독서만을 스스로 즐겼다. 그리고 가세(家世)가 본디 가난하였으나 생산(生産)을 힘쓰지 않았다. 어렸을 때 조모(祖母) 김씨에게서 자랐는데 특별히 사랑을 받아 장차 토전(土田)과 장획(藏獲 노비(奴婢))을 후사(厚賜)하려 하니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며, 자그마한 집을 지어 신고실(信古室)이라 자호(自號)하고 매화와 대나무와 약초를 심었다. 궤안(几案)을 반드시 정제하여 책들을 늘어 놓지 않았으며, 사람들과 교제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찾아가 뵙는 자가 있으면 다 정성껏 접대하여 술과 밥을 공궤(供饋)하되 있고 없는 것을 따지지 않았으며, 와서 학문(學文)을 묻는 자가 있으면 가르쳐 주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김안국(金安國)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있을 때 안우(安遇)ㆍ노필(盧㻶)ㆍ김대유(金大有)와 함께 조정에 추천하자 집경전 참봉(集慶殿參奉)에 제배되었다가 현릉(顯陵) 참봉으로 전직되었는데 경진년(1520, 중종 15)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계미년(1523, 중종 18)에 졸하였다.

그는 사람됨이 단아하고 중후하며 간이하고 염결(廉潔)하였고 말을 강직하게 하였다. 그리고 평소에도 의관(衣冠)을 엄숙하고 단정하게 갖추고 있었으며 연고가 있지 않으면 일찍이 눕지 않았다. 여항(閭巷) 사람들의 예(禮) 아닌 말을 입에 담지 않았고, 마음이 담박하고 청고(淸苦)했으며, 분수를 편히 여기고 검약을 지켰다. 어버이를 효성껏 섬겼으며 남과는 믿음으로 사귀었다. 동복(僮僕)들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마음에 거슬리는 바가 있어도 꾸짖거나 욕하지 않았고 알아듣도록 일깨우기를 먼저하고 벌주는 일은 뒤로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비위(非違)를 보면 언제나 매우 꾸짖지 않은 적이 없었다. 시(詩)를 지으면 청담(淸澹)하였고 자의(字義)와 음운(音韻)을 알아서 글자의 편방(偏旁 글자의 좌변과 우변)과 점획(點畫), 그리고 청탁(淸濁)과 고저(高低)를 정밀히 해석하지 않음이 없었다. 글씨는 해서(楷書)를 잘 썼는데 동진체(東晉體 왕희지체(王羲之體)를 말한다)를 모방하였다.

그는 또 경에 밝은 자가 기송(記誦)하여 잊지 않으려고 점을 찍어 경전(經傳)에 표지(標識)한 것을 보면 그때마다 책망하기를,

 

“성현(聖賢)의 훈사(訓辭)를 어찌 감히 이같이 더럽힌단 말이냐?”

하였다. 그는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 선생과 한 동네에 살았으므로 일찍이 그 문하(門下)에서 공부하였는데, 오로지 민락(閩洛 정자(程子)ㆍ주자(朱子))의 서적을 정독했으며, 방안에 단정히 앉아 손으로는 등초(謄抄)하고 입으로는 기송(記誦)하였다.

그는 순흥 안씨(順興安氏) 전적(典籍) 기(璣)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안동 권씨(安東權氏) 생원(生員) 시민(時敏)의 딸을 후취로 맞았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희(禧)는 진사(進士), 진(禛)은 판서(判書), 관(祼)은 찰방(察訪)이다. 사위는 목사(牧使) 신잠(申潛)이다.

 

 

삼사 년 전에는 한낱 포의(布衣)였다

 

무술년(1778, 정조 2) 9월에 나의 종형(宗兄)인 금장공(禁將公)이 통제사(統制使)로 제배(除拜)되어 부임(赴任)할 때에 내가 1백 전(錢)으로 감장수[柿商]가 돌려보내는 말[馬]을 전세내었는데, 그것은 천안(天安)에 가서 벼도 거두고 또 천안 객사(客舍)에 있는 공에게 나아가 작별하고자 하는 뜻에서였다.

그런데 말이 바짝 말라 뼈만 남아서 잘 걷지를 못하므로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며 가서 객사에서 공을 뵙고 사근역(沙斤驛)을 향하여 출발하려는데 역리(驛吏)가 말을 바쳤다. 그런데 말의 대가리 길이가 3척(尺)이고 붉은 털에 사슴의 얼룩무늬 같은 옅은 흰 점이 있는 아주 훌륭한 준마였다. 신축년(정조 5 1781) 12월에 내가 사근역 찰방(沙斤驛察訪)으로 제배되어 다음해 2월에 이 말을 타고 부임했는데, 그 연수를 계산해 보니 5년이 되었고, 달 수로 계산해 보니 겨우 3년 남짓하였다.

나같이 세상 물정 모르는 서생(書生)이 성조(聖朝)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 갑자기 승진되어 이곳에 왔으니 포의(布衣)였던 나로서는 지극한 영광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천안에 들러 전객(佃客 소작인(小作人))으로 전에 나를 업신여겼던 자들을 불러 위로하며 대하니, 그들은 다 움츠리고 엎드려서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나는 벼슬이란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모두 인정(人情)의 동태를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었다.

 

삼사년 전 한낱 포의였던 나에게는 / 三四年前一布衣

역승이 하찮은 직이지만 보기드문 승진이네 / 郵丞雖冷驟遷稀

강건한 준마에 푸르른 일산 / 行行駿馬靑靑傘

가는 곳 어디든지 회음후의 옛 낚시털세 /到處淮陰舊釣磯

 

이 말[馬]이 지금은 비록 늙고 파리하나 타면 의자에 의지하고 침상(寢牀)에 앉은 것같이 편안하여 경상도(慶尙道) 11역(驛)에서 제일가는 말로 여겼다.

 

 

함양(咸陽)의 명현(名賢)들

 

함양에는 명현들이 한 세대 동안 성대했었는데 지금은 명현들이 유풍(遺風)이 없어졌다. 그곳에는 서원(書院)이 다섯 곳이나 있는데 남계서원(藍溪書院)과 당주서원(溏洲書院)은 바로 임금이 편액을 내린 서원이다.

남계서원은 문헌공(文獻公) 정일두(鄭一蠹 일두는 정여창(鄭汝昌)의 호)ㆍ동계(桐溪) 정온(鄭蘊)ㆍ개암(介菴) 강익(姜翼)을 배향하였고, 뇌계(㵢溪) 유호인(兪好仁)은 서원 안에 별사(別祠)를 지어 향사하였다.

당주서원에는 옥계(玉溪) 노진(盧禛)이 배향되었고, 백연서원(柏淵書院)에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ㆍ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을 명환(名宦)으로 배향하였다.

도곡서원(道谷書院)에는 덕곡(德谷) 조효동(趙孝仝)ㆍ죽당(竹堂) 정육을(鄭六乙)ㆍ송재(松齋) 노숙동(盧叔仝)을 배향하였는데, 죽당은 일두(一蠹)의 아버지이며 송재는 옥계(玉溪)의 증조부이다.

귀천서원(龜川書院)에는 남계(藍溪) 표연말(表沿沫)ㆍ춘당(春塘) 박맹지(朴孟智)ㆍ구졸(九拙) 양희(梁喜)ㆍ일로(逸老) 양관(梁灌)ㆍ우계(愚溪) 하맹보(河孟寶)ㆍ금재(琴齋) 강한(姜漢)을 배향하였다.

그런데 동계(桐溪)는 안음(安陰) 땅에서 낳았는데 인근(隣近)이라는 연유로 배향되었고,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도 함양 땅에서 태어났는데 홀로 배향되지 못했으므로 사람들이 다 그것을 한스럽게 여기고 있다.

 

 

유뇌계(兪㵢溪)

 

함양(咸陽) 사람들이 서로 전하기를 유뇌계(兪㵢溪 뇌계는 유호인(兪好仁)의 호)는 어머니가 늙은 까닭으로 서울에서 남방으로 돌아가는데, 성종(成宗)께서 구슬 두 개를 하사하였다.

그런데 한강(漢江)을 건너다가 배 안에서 구슬을 놓쳐 물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뇌계는 임금님이 준 것을 보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죽을 죄를 졌다 하여 북쪽으로 대궐을 바라보고 통곡하였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잉어 한 마리가 뛰어올라 배 안으로 떨어졌다. 그래서 잉어 배를 갈라보니 두 구슬이 들어 있었다.

뇌계가 졸(卒)하자 임금이 슬픈 마음을 금하지 못하고 풍수(風水)에 밝은 자에게 명하여 지리를 보아 장사지내되, 반드시 자손이 번성할 명당(明堂)을 가려서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뇌계의 아들 아무가 어질지 못한 주제에 다만 이름난 아버지의 자식임을 빙자하여 풍수를 잘 대우하지 않았다. 그러자 풍수는 마음속으로 노여워하여 고의적으로 자손이 영락하게 될 자리를 가려서 장사를 지내 주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 자손이 떨치지 못한다고 한다.

 

 

사근역승(沙斤驛丞) 선생안(先生案)

 

사근역승(沙斤驛丞)의 선생안(先生案)은 예부터 있었는데 중간에 유실(遺失)되었고, 현종(顯宗) 8년(1667) 정미에 찰방(察訪)인 조 상우(趙相遇)가 비로소 수집(修輯)하였다. 이영춘(李榮春)으로 첫머리를 삼고, 그 다음은 심 일장(沈日章)ㆍ이 형(李泂)ㆍ한행(韓行)을 기록했는데, 이 네 사람은 도임(到任)한 일자와 과만(瓜滿 임기(任期)가 다 찬 것을 말한다)의 연월(年月)이 없다.

그리고 이희경(李喜慶) 때부터 비로소 임기의 연월이 기록되었는데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9년(1581), 선조(宣祖) 14년 신사에 도임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영춘(李榮春)으로부터 조상우(趙相遇)에 이르기까지 무릇 42인이며, 조상우의 교체승(交遞丞)인 방이원(方以遠)으로부터 나에게 이르기까지 무릇 65인으로 총 1백 7인이다. 김종무(金宗武)는 선산(善山)에 있다가 만력 경인년(1590, 선조 23) 8월에 도임했다가 임진년(1592, 선조 25) 4월에 상주(尙州)에서 전사(戰死)하였고, 사간(司諫) 심대부(沈大孚)는 숭정(崇禎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 기사년(1629, 인조 75)에 도임했다가 바로 돌아갔다.

그리고 현감(縣監) 김수징(金壽徵)은 숙종(肅宗) 기미년(1679)에 도임했다가 바로 돌아갔고, 음죽(陰竹) 이인상(李麟祥)은 영종(英宗) 정묘년(1747) 7월에 도임했다가 기사년(1749) 8월에 임기가 차서 돌아갔는데 이들은 다 가장 이름이 나 있어 알아주는 자들이다.

또 지금의 우의정(右議政)인 김익(金熤)이 영종 경인년(1770) 1월에 필선(弼善)의 위패(位牌)를 어긴 죄로 외직(外職)에 보직되었다가 2월에 용서되어 돌아갔다. 역고(歷考)해 보니 선생안(先生案) 속에 제공(諸公)들의 재임(在任)의 연월(年月)은 만력(萬曆) 연간부터 숭정(崇禎) 임오년(1642, 인조 20)에 이르기까지는 4~7년 사이였으며, 이초로(李楚老)로부터 처음으로 재임 기간이 3년이었고 이 뒤로 빨리 교체된 자들이 서로 뒤를 이었으니 승제(乘除)의 이치를 관찰할 수 있다.

찰방(察訪) 변종수(邊宗洙)가 채무일(蔡無逸)을 선생안의 머리에 추록(追錄)하면서,

 

“중종(中宗) 임오년(1522)에 생원과(生員科) 제일(第一)로 뽑혔고 사근역 찰방(沙斤驛察訪)으로 있으면서 중종 35년 경자년(1540)에 병과(丙科)의 제일(第一)로 등과하여 벼슬이 헌납(獻納)에 그쳤다.”

하였다.

 

 

수수정(數樹亭)

 

능호(凌壺) 이인상(李麟祥)이 사근역 찰방이 되었을 때에 설치(設置)한 것이 많고 마음가짐을 공명하고 염직(廉直)하게 하여 관리들을 단속하였다.

내가 늙은 아전에게 50~60년 내려오는 동안 어떤 관원이 가장 훌륭하게 다스렸느냐고 물으니 그 아전이 능호라고 대답하였다.

대개 서화(書畫)와 문사(文詞)에 종사하는 사람은 거의가 사무(事務)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많으니, 미전(米顚 미불(米芾)의 별칭)과 예오(倪迂) 같은 사람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능호는 이치(吏治)를 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관아의 동헌에 건 한죽당(寒竹堂)이라는 편액을 대전(大篆)으로 팠는데 자못 강하고 굳세게 보였다. 마루 동쪽 모퉁이에 두충(杜沖)ㆍ홍매(紅梅)와 고송(古松)ㆍ수죽(脩竹) 등속이 심겨져 있으며, 능호가 조그마한 기와 정자를 나무 사이에 세웠는데 동쪽으로 하당(荷塘)을 내려다보아 소연(蕭然)한 풍치가 있으며, 그 정자에 걸린 수수정(數樹亭) 세 글자의 편액은 문의 현령(文義縣令) 송문흠(宋文欽)이 쓴 팔분체(八分體)였다.

그리고 북쪽 기둥에는 능호의 자서(自書)를 걸었는데 글은 다음과 같다.

 

사람은 거만한 관리가 아니었는데 / 古人非倣吏

스스로 세상 경영하는 사무를 빠뜨렸네 / 自闕經世務

우연히 하나의 미관에 기탁되어 / 偶寄一微官

두어 그루 나무 아래 거닐고 있네 / 婆娑數株樹

마힐(摩詰 왕유(王維)의 자) 시의 뜻을 취하여 정자의 이름을 지었다. 숭정(崇禎) 기사년(1629, 인조 7) 늦봄에 쓴다

 

 

이능호(李凌壺)

 

이능호(李凌壺 능호는 이인상(李麟祥)의 호)는 성품이 강직하고 과단성이 있었다. 함양(咸陽)에 일찍이 친하게 지내던 서생(書生)이 있었는데 하루는 서생에게

 

“내가 그대의 집을 찾고 싶지만 길이 남인(南人)의 촌(村)을 지나게 되므로 찾지를 못하네.”

하였다. 또 일찍이 한 서생의 집을 방문하여 그와 앉아 얼마 동안 이야기하는데 어떤 손님이 와 당(堂)에 올랐다. 그러자 능호는 주인(主人)에게 간다는 인사도 없이 갑자기 일어나 가버렸다. 서생이 괴이하게 여겨 그 후에 그 까닭을 물으니 곧 말하기를,

 

“지난번 그 손님은 남인(南人)이므로 내가 더럽혀질 것 같아 피하였던 것이네.”

하였다. 그리고 또 한 서생(書生)을 사랑하였는데, 하루는 서생이 좌간(坐間)에서 우연히 책을 집어 보았다. 그러자 능호가 정색하고 꾸짖기를,

 

“어른의 책을 젊은 사람이 어찌 감히 갖다 보는가?”

하고, 그로 인하여 사이를 멀리하여 물리쳤다고 한다. 이 말은 함양 사람 진생(陳生)이 전에 나에게 들려준 것이다.

 

 

신상주(申尙州)

 

신잠(申潛)의 자(字)는 원량(元亮)인데 고령(高靈) 사람이다. 증조(曾祖)는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이고 아버지는 예조 참판(禮曹參判) 신종호(申從濩)인데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열한째 아들 의창군 공(義昌君玒)의 딸에게 장가들어 홍치(弘治 명 효종(明孝宗)의 연호) 신해년(1491, 성종 22)에 신잠을 낳았다. 신잠은 7세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백형(伯兄) 고원위(高原尉) 신항(申沆)은 성종조(成宗朝)의 부마(駙馬)로 한때 문아(文雅)가 높았는데 신잠이 그를 따라 배웠다.

그는 문장의 재주가 날고 진취되어 계유년(1513, 중종 8)에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부화(浮華)함을 제거하고 명검(名檢)을 닦아 두루 당세(當世)의 선비들과 교유했으며, 또 논변(論辯)이 뛰어났었다. 기묘년(1519, 중종 14) 현량과(賢良科)에 합격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보직되었다. 고사(故事)에 군신(群臣)들과 사대(賜對)할 때에는 사관(史官)이 번번이 뒤에 들어갔다가 먼저 나오게 되었었는데, 신잠이 아뢰기를,

 

“임금의 미세한 언동(言動)도 사관이 삼가 기록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뒤에 들어가고 먼저 나오면 사실을 기록하는 의리에 손상됨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은 듣건대 성종조(成宗朝)에 한 간사한 사람이 있어서 이러한 틈을 타서 그 말이 쓰이게 되어서 마침내 화(禍)의 계제(階梯)가 되었다하니 이제부터는 사관이 먼저 들어왔다가 뒤에 나가는 것으로 상례를 삼으소서.”

하니, 중종대왕(中宗大王)이 그의 말을 옳다고 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사화(士禍)가 일어나 현량과를 혁파하고 사관이 뒤에 들어왔다가 먼저 나가는 법규도 없애고 시행하지 않게 되었다.

신잠은 관작을 삭탈당하고 한가하게 집에 있다가 신사년(1521, 중종 16)에 안정(安珽) 등과 함께 죄를 입고 정신(庭訊)을 받았는데, 끝내 죄상을 밝혀낼 수 없었지만 장흥부(長興府)에서 17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기(志氣)가 넓고 평탄하여 시(詩)를 읊으며 스스로 나날을 보냈다.

정유년(1537, 중종 32)에 양주(楊洲)로 양이(量移)되었다. 무술년(명종 33, 1538)에 편리하게 거주(居住)하도록 명하므로 아차산(峨嵯山) 아래에 집을 짓고 살면서 거문고를 타고 글을 읽으면서 날을 보내는 것을 취미로 삼았다.

계묘년(1543, 명종 38)에 대신(大臣)이 그의 인재가 나라를 빛낼 만하다고 천거하여 계품을 넘어 6품직을 제수해서 사옹원 주부(司饔院主簿)로 삼았는데, 임금이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잠이 지금 주부가 되어서 그 재능을 시험할 수 없으니 수재(守宰)로 고쳐 제수하여 그의 치적(治績)을 보고자 한다.”

하고, 태인 현감(泰仁縣監)에 보직하였다. 그는 예(禮)를 일으키고 풍속을 선량하게 하며 인재를 기르고 학문을 돈독히 하는 것으로 급무(急務)를 삼았다. 그때 마침 큰 흉년을 만났으나 온전히 구활(救活)한 것이 수천 사람이나 되었다. 관찰사(觀察使) 김광철(金光轍)이 그 사실을 올리니 상이 가상히 여겨 한 품계를 더하여 종묘서 영(宗廟署令)으로 제배하였다. 그리고 명종(明宗) 기유년(1549)에는 간성 군수(杆城郡守)로 제수되었다.

신해년(1551, 명종 6)에 상이 중외의 관직에 임하여 청렴하고 근실한 자를 가리라 명하니, 관찰사 유지선(柳智善)이 그의 청백하고 근실함을 상주하였으나, 그때에 신잠의 병세가 위독하였으므로 관찰사가 고사(故事)를 따라 파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상이 교서를 내리기를,

 

“잠의 청덕(淸德)이 이미 나타나서 이르는 곳마다 마음을 다하였으니 병들었다 하여 파직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그 직책만을 교체하고 그대로 품계를 올려 권장해 주었다.

임자년(1552, 명종 7)에 상주목사(尙州牧使)로 초배(超拜)되자, 잠이 병도 나았고 또 상의 사랑이 중첩(重疊)된 데에 감동하여 마침내 부임(赴任)하였는데 관찰사(觀察使) 정응두(丁應斗)가 흉년에 백성을 구제한 정치의 제일로 상주(上奏)하므로 상이 한 품계를 더하니 통정(通政)이었다.

갑인년(1554, 명종 9)에 상주(尙州)에서 졸(卒)하였다.

잠은 풍채가 준엄하고 식견이 높고 도량이 관대하며, 착한 일을 즐거워하고 의로움을 좋아하였으므로 그와 비견될 자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세속의 평범하고 천비한 의논을 일찍이 입 밖에 내지 않았으며, 일을 당해도 여유가 있어 목소리와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다.

그의 시대를 걱정하고 세속을 민망히 여기는 마음은 지성에서 나왔다. 그리하여 궁핍한 사람을 진휼(賑恤)하되 아끼는 것이 없었으며, 후생들을 장려하여 진출시키되 재능에 따라 이끌어 주었다.

그는 만년에 초서와 예서에 능했으며, 난초와 대나무를 아주 정묘(精妙)하게 그렸다. 때로는 친지(親知)들과 어울려 문장과 술로 즐기기도 하였는데 기색이 평온하고 화창하여 풍류가 사람을 움직이게 하였다. 그의 초취(初娶)는 종실(宗室) 당해부수(唐海副守) 모(某)의 딸인데 두 딸을 두었고, 후취(後娶)는 참봉(參奉) 노우명(盧友明)의 딸인데,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노우명의 아들 노진(盧禛)이 행장(行狀)을 지었다.

 

 

미타산(彌陀山)

 

미타산(彌陀山)은 사근역(沙斤驛)의 주산(主山)이다. 산 위에는 석성(石城)이 있는데 둘레가 2천 7백 96척(尺)이며 성 안에는 연못이 세 군데 있는데 가뭄이 들면 그곳에서 기우제를 지낸다.

고려(高麗) 신우(辛禑) 6년(1380) 경신에 왜놈 배 5백 척이 진포(鎭浦)에 정박하고 삼도(三道)를 노략질하되 상주부(尙州府)의 창고를 불지르고 경산(京山)을 거쳐 사근역(沙斤驛)에 주둔했다. 삼도원수(三道元帥) 배극렴(裵克廉) 등 아홉 장수가 왜(倭)와 사근역의 동쪽 3리(里)쯤에서 싸우다가 패(敗)하여 박수경(朴修敬)과 배언(裵諺) 두 원수(元帥)가 전사하였고, 전사한 사졸(士卒)들이 5백여 명이나 되어 냇물이 다 붉었으므로 지금까지도 피내[血溪]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은 그 이름이 싫어서 국계(菊溪)라 고쳐 부르기도 한다.

그때에 감무(監務)였던 장군철(張群哲)이 산성(山城)을 지키다가 왜적에게 도륙당한 바 되었으므로, 왜적이 그로 인하여 남원(南原)으로 향하여 인월역(引月驛)에 주둔했다가 우리 태조에게 섬멸되었다.

산성이 허물어졌으나 수리하지 않았는데 성종조(成宗朝)에서 다시 쌓았고 지금까지 다시는 수리하지 않았다. 이 성을 두고 이첨(李詹)은 이런 시를 지었다.

 

운봉산 아래 가을 바람 일찍 불어 / 雲峯山下秋風早

밝은 햇볕 찬 기후에 나뭇잎 말라질 제 / 日澹天寒木葉槁

섬 오랑캐 우리 군사 패배시켜 / 是時島夷敗我軍

함양 들판 푸른 풀에 붉은 피를 뿌렸네 / 血濺咸陽原上草

양부의 원수 진전에서 전사하니 /兩府元帥陣前亡

사졸들 미천한 몸 보전하기 어려워라 / 士卒微軀難自保

슬픈 호드기 두어 소리에 장부 눈물 흘리니 / 悲笳數聲丈夫淚

맹세코 나라 수치 늙기 전에 씻으리 / 誓雪國耻及未老

남쪽으로 가는 제장들아 군사 없는 이 그 누구뇨 / 征南諸將誰無軍

깃발 느릿느릿 정도를 되돌아오네 / 旌旗緩緩回征道

유호인(兪好仁)은 이런 시를 지었다.

 

사근성 경계에 음산한 구름 일어나니 / 沙斤城畔起陰雲

땅 귀신 밤마다 울고 비는 어지럽게 내리네 / 坤靈夜泣雨紛紛

경신년에 죽은 넋들 흐느껴 우는 소리 / 庚申萬鬼啾啾哭

당시의 장 사군을 한하는 듯하네 / 似恨悍當時張使君

 

 

혜풍시(惠風詩)

 

무술년에 나는 박재선(朴在先)과 더불어 북경에 들어갔는데 이해 가을에 유혜보(柳惠甫)는 심양(瀋陽)을 유람했고, 경자년에는 박연암(朴燕巖)이 열하(熱河)를 유람했는데 매양 취하면 여담(餘談)으로 유혜보가 중도(中途)에 그친 것을 조롱하였다. 임인년에 남사수(南士樹)와 이성위(李聖緯)가 연경에 들어갔는데 나는 사우(沙郵)로 오게 되어 작별하게 되었으나 이별시를 지을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사천 군수[泗川宰] 김석여(金錫汝)의 맏아들 사현(思玄)이 사우로 찾아와서 혜보(惠甫)가 사수(士樹)와 성위(聖緯)를 이별한 시(詩) 일절(一絶)을 외어 전해 주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았다.

 

해마다 시월 달 오가는 이 많아질 때 / 年年十月漲行塵

압록강 가 수자리사는 사람들 융의 갈아 입었지 / 換着戎衣鴨水濱

친구들은 다 북경에 갔는데 나는 심양으로 왔으니 / 人盡到燕吾到瀋

일천여 리 떨어져 있어 뜻대로 안 되는 게 사람 일이네 / 一千餘里不如人

 

 

깨끗한 볼기와 때 낀 볼기

 

함양(咸陽)에 한 선비가 있었는데 몸가짐을 매우 삼갔다. 그는 매일 반드시 양쪽 볼기를 씻었다. 그리고 남들이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 물어보면,

 

“세상 일은 알 수가 없다. 내가 지금 비록 삼가고 있으나 만약 관가에 죄를 얻어서 바지를 벗기고 태형(笞刑)을 받게 되었을 때에 볼기에 만약 시커멓게 때가 껴 있으면 그 부끄러움을 어떻게 한단 말이오.”

하였다. 그러다가 과연 죄없이 나포, 송치되어 관청 뜰에서 태장(笞杖)을 맞게 되었는데 볼기가 보통 사람보다 유달리 깨끗하므로 관장(官長)이 탄식하며,

 

“볼기가 저렇게 깨끗하니 이 사람이야말로 참선비로다.”

하고, 마침내 한 대의 태장도 내리지 않고 그 죄를 사면(赦免)해 주었다.

그리고 또 한 선비가 있어 죄를 짓고 나포, 송치되었는데 두 볼기에 때가 껴 그을음과 숯같이 검어서 사람의 피부와 같지 않으므로 관장이 소리를 높여 수죄(數罪)하려다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 집행을 중지하고 한 대의 태장도 내리지 않은 채 그대로 죄를 용서해 주었다. 그러나 볼기를 씻은 선비가 몸가짐을 매우 삼간 것은 세속을 경계할 만한 일이다.

 

 

한죽당섭필 하-이덕무

 

 

모기의 주둥이는 연꽃 같다

 

범석호(范石湖 석호는 범성대(范成大)의 호)가 모기를 두고 지은 시에 화훼(花喙)라는 두 글자가 들어 있다. 내가 사근역(沙斤驛)으로 부임한 것은 6~7월 사이였다. 밤이면 모기떼가 발[簾] 틈새로 파고들어 차츰 벽모서리로 기어 들어오는데 둥그렇게 부른 배가 번쩍거리는 것들이 매우 많았다. 아이를 시켜 불을 밝히고 잡아도 조금 후면 다시 들어와서 살을 물곤 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모기의 모양은 날개와 다리는 가늘고 약하며 주둥이는 코끼리 코처럼 길어서 앉아 있을 때는 반드시 주둥이로 버티고 날개는 들고 다리는 뒤로 빼서 ‘주둥이가 꽃모양 같다[花喙]’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모기는 마문(麻蚊)이 가장 독하고 죽문(竹蚊)이 조금 덜 독하다.

내가 이문원(摛文院 규장각의 부속 건물로서 각신들이 숙직하는 곳)에서 숙직할 때 이문원의 벽에 모기가 많았다. 8~9월이 되면 다시는 사람을 물지 않는다. 벽에 앉아 있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하나의 주둥이 끝이 더부룩한 것이 마치 연꽃 같았다. 이에 비로소 꽃 같은 주둥이[花喙]라 한 말이 잘된 비유임을 알았다. 그 후 양승암(楊升菴 승암은 양신(楊愼)의 호)의《단연록(丹鉛錄)》을 보니,

 

“안개가 피어날 때면 게와 자라가 살이 빠지고, 이슬이 내릴 때면 모기 주둥이가 터진다.”

한 말이 있었다. 옛사람들은 물건의 모습을 살핌에 있어 조그만 것도 빠뜨리지 않아서 이와 같이 정미(精微)하였던 것이다.

 

 

점필재(佔畢齋)가 두류산(頭流山)을 유람하다

 

점필재는 함양 군수(咸陽郡守)로 있던 임진년(1471, 성종 2) 중추(仲秋)에 뇌계(㵢溪) 유호인(兪好仁)ㆍ매개(梅溪) 조위(曺偉)와 함께 두류산(頭流山)을 유람하였다. 이때 지은 유록(遊錄)이 있으므로 이제 간략히 옮겨 적는다.

 

 

삼계(三計)

 

함양(咸陽) 땅에 성격이 돈후하고 신중한 한 선비가 있었다. 그는 항상 말하기를,

 

“하루를 위한 계책은 아침에 음주(飮酒)하지 않는 것이 제일이고, 1년을 위한 계책으로는 장(醬)을 많이 담그는 것이 제일이고, 일신(一身)을 위한 계책으로는 슬기로운 아내를 얻는 것이 제일이다.”

하였다.

 

 

엄천(嚴川)의 고적

 

계묘년(1783, 정조 7) 6월에 두류산(頭流山)을 구경갔다가 엄천사(嚴川寺)에서 쉬면서 이 절의 고적(古蹟)을 물으니 중이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죽은 아우의 명복을 비는 글이 실린 책 한 권을 내보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일찍이 들으니 ‘법신(法身)은 원만하여 사람을 비춰 주는데 마치 거울을 대할 때 피로를 잊는 것과 같고 혜력은 두루 통하여 만물을 이끌어 주는데 마치 큰 거리에서 마시기를 기다리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거울을 보면 얼굴의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이 구분되고 술잔을 들면 그릇의 깊고 얕음을 알 수 있듯이, 교화하는 방편이 치우침이 없고 수행하는 중생이 의탁할 데가 있어, 죽어서는 억울함을 풀게 되고 살아서는 고액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은 물론, 능히 효제(孝悌)의 정성을 다하면 쉽게 자비의 도움을 받게 된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정성을 다한다면 부처가 어찌 제자를 속이겠습니까? 제자의 자매는 일찍이 불행한 화난으로 깊은 한을 안고 있습니다. 부모를 잃은 뒤 믿을 데 없어 마음이 무너지고 의지할 데 없어 피눈물을 짓는 데다가 형제까지 잃은 슬픔을 더하였으니 그리는 정 갑절이나 더합니다. 하늘의 꾸짖음을 피할 길이 없고 땅속으로도 피할 길 없습니다. 어찌 유경(劉景)이 주대(周代)의 종통을 밝히고 이홍(李弘)이 위조(魏朝)의 예를 가리기를 기대하겠습니까?

제자가 궁중에서 여공(女功 방직ㆍ재봉 등의 여자들의 일)을 힘쓰고 왕가(王家)에서 며느리의 도리를 다하여 왔으나 이제는 기국(杞國)의 근심이 깊어지고 초(楚) - 2자 원문 빠짐 - 그만되었으니, 우두커니 홀로 있음에 내 몸이 있는 듯 없는 듯 정신이 아득합니다. 그러나 무슨 말로도 충정을 진술할 수 없으므로 부질없이 비녀를 뽑고 채색 옷을 벗고는 죄인으로 자처할 뿐입니다.

집안의 박복함을 돌아보건대, 이는 실로 길 가는 사람들도 다 슬프게 여기는 바입니다. 이제 여생은 한이 있고 원한은 다함이 없으니, 의해(義海 불법(佛法)을 말한다)에 마음을 쏟지 않으면 어떻게 전생의 인연을 밝히겠으며 법림(法林)에 의지하지 않으면 어떻게 저승의 공덕(功德)을 짓겠습니까?

이제 죽은 아우를 엄천사(嚴川寺)에 추복(追福 죽은 자를 위해 공덕을 지어 복을 얻게 함)하기 위하여 삼가 강원(講院) 증축 비용으로 벼 1천 섬을 희사합니다. 또 ‘배워서 지식을 모으고 자세히 물어서 의심을 밝히는 것’은 옛 성인이 말씀한 바이고 후생이 힘써야 할 일입니다. 감히 얼마 안 되는 재물을 여러 법류(法流)들에게 보시(布施)하는 것이 한 줌 흙으로 태산에 보태는 것과 같아 비록 부끄럽사오나 이로 말미암아 법해(法海)에 귀의하여 넓은 법당에 학승(學僧)을 모아놓고 청정한 자리에서 상외(象外)의 종지(宗旨)를 설(說)하기를 원합니다.

또 삼가 원하옵기는 죽은 아우가 번뇌의 굴레를 해탈하고 법회(法會)에 올라서 공덕은 사중(四衆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를 말한다)에 나눠주어 장자(長者)의 좋은 손님이 되고 법(法)은 대승(大乘)을 체득하여 불가(佛家)의 좋은 벗이 되었으면 합니다.

또 시방 세계(十方世界)의 용렬한 근기(根器)와 만겁(萬劫)의 혼탁한 무리들이 아우와 함께 반야(般若)의 배를 타고 보리(菩提)의 언덕에 이르기를 원합니다.”

 

 

[주D-001]법신(法身) : 3신(身)의 하나. 법은 진여(眞如). 법계(法界)의 이(理)와 일치한 부처의 진신(眞身)을 말한다.

[주D-002]큰 거리 …… 기다리는 것 : 큰 거리에 술동이를 놓아두고 지나는 사람들이 따라 마시기를 기다리는 것. 이는 성인(聖人)의 도(道)를 비유한 말이다.《淮南子 卷10 繆稱訓》

[주D-003]기국(杞國)의 근심 : 기(杞) 나라 사람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 어쩌나 하고 크게 걱정하였다는 고사. 기우(杞憂).

[주D-004]배워서 지식을 …… 의심을 밝히는 것 : 《주역(周易) 건괘(乾卦)》의 문언전(文言傳)에 보인다.

 

 

남계묘정비(灆溪廟庭碑)

 

남계서원(灆溪書院)은 문헌공(文獻公) 정일두(鄭一蠹 일두는 정여창(鄭汝昌)의 호) 선생을 향사(享祀)하는 곳이다. 그 봉사손(奉祀孫) 덕제(德濟)가 묘정비(廟庭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본암(本菴 김종후(金鍾厚)의 호)이 지었다.

이 비문을 두고 마을의 대성(大姓)과 사족(士族)들의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는 비문 내용에 성리학(性理學)의 도통(道統)을 열서(列書)하면서 회재 선생(晦齋先生 회재는 이언적(李彦廸)의 호)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본암(本菴)의 과실이라 하였다. 이어서 그렇게 쓰도록 종용한 덕제의 허물도 따졌다.

덕제가 부득이 본암에게 개찬(改撰)을 청하자, 본암이 드디어 제현(諸賢)을 차례로 기록한 것을 삭제하고 다만 ‘예닐곱 분이 나왔다.’고 써서 그대로 비석에 새겼다.

그러나 사론(士論)은 오히려 ‘예닐곱 분이 나왔다.’고 한 ‘예닐곱’ 중에는 또 회재를 넣지 않으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여기고 비판의 소리가 더욱 거세져서 노씨 선국(盧氏宣國)이 도끼로 비문을 찍어 본암의 이름을 깎아냈다. 정씨(鄭氏)는 감사에게 고소하였고 이어 선국(宣國)은 함양(咸陽) 옥에 갇혔다. 지금까지 두세 명의 감사가 바뀌도록 모두 이 사건의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 정씨의 말에 의하면,

 

“마을 사족(士族)의 조상들 가운데 이 서원(書院)의 창건에 공이 있는 이가 많은데 비문에는 다만 강개암(姜介菴 개암은 강익(姜翼)의 호)만을 일컫고 다른 사람은 조금도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쟁론(爭論)의 단서가 생긴 것이다.”

하고, 사족(士族)들의 말에 의하면,

 

“정씨가 사림(士林)들과 의론하지 않고 밤중에 비를 세웠으므로 공론들이 좋지 않다.”

하였다. 그 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기자(箕子)가 미개한 나라[夷狄]를 문명국[中華]으로 만든 이후 2천여 년 동안에 유학(儒學)은 존재가 없었다가 고려(高麗)에 와서 정포은(鄭圃隱 포은은 정몽주(鄭夢周)의 호)한 사람이 있었으나 논자(論者)들은 그의 충절(忠節)만을 말하고 유학은 덮어두고 말하지 않았으니, 당시에는 대체로 유학을 높일 줄을 몰랐던 것이다.

이에 우뚝이 사도(斯道)를 위하여 땅에 떨어진 유학의 실마리를 중국에서 이어온 이는 실로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의 호) 김 선생(金先生)과 일두(一蠹) 정 선생(鄭先生)을 필두로 하여 이를 이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호)ㆍ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호)ㆍ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호)ㆍ우계(牛溪 성혼(成渾)의 호)ㆍ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호)ㆍ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호)ㆍ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의 호) 제선생(諸先生)이 대대로 일어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크게 빛나서 천하의 도통(道統)이 우리나라에 돌아왔으니 아름답고도 훌륭하구나.

그러나 김(金)ㆍ정(鄭) 두 선생은 모두 화를 입어 언론(言論)과 풍지(風旨)가 크게 드러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학자들이 오래도록 사모하고 가슴아파하는 이유이다. 정 선생(鄭先生)은 함양(咸陽)에 세거(世居)하였으므로 그 자손이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다.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연간에 개암(介菴) 강익(姜翼) 선생이 발론하여 남계서원을 세워 선생을 제사하였고, 병인년(1566, 명종 21)에 사액(賜額)되었다.

대개 우리나라에 서원(書院)이 있게 된 것은 주무릉(周武陵 무릉은 주세붕(周世鵬)의 별호)의 죽계서원(竹溪書院)이 최초이고 남계서원이 그 다음이다. 아, 선생은 학자의 모범이고 남계는 서원의 으뜸이다. 어찌 이보다 더할 것이 있겠는가?

서원을 창건한 지 2백여 년이 지나도록 비를 세우지 못했는데 이제 여러 선비들이 돌을 다듬고 비문을 새겨 세울 것을 의론하고 종후(鍾厚)에게 비문을 짓기를 청하므로 종후는 감히 적임자가 아니라고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상고하건대, 선생의 사업(事業)과 행실(行實)의 대체(大體)는 《실기(實紀)》에 대략 나타나 있다. 그 영특한 자질과 탁월한 행실은 보고들음에 모두 탄복하겠으니, 이는 진실로 대현(大賢)의 일절(一節)이라 하겠으며, 경(經)ㆍ자(子)를 연구하고 성정(性情)과 이기(理氣)를 명백히 분석한 것 등은 추강 남공(秋江南公 추강은 남효온(南孝溫)의 호)의 찬술(撰述)에 자세히 갖추어 있으니, 후생이 어찌 감히 다시 이를 본떠서 말하겠는가?

공을 정려(旌閭)하고 포장(褒獎)한 것은 정암(靜庵) 선생에서부터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ㆍ문충공(文忠公) 이원익(李元翼)에 이르기까지 조정에 계속 건의하여 마침내 만력(萬歷) 경술년(1610, 광해군 2)에 공자묘(孔子廟)에 배향되었다. 이는 모두 여러 선비들의 소청(疏請)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개암(介菴)은 젊어서 구속되는 바 없이 행동하였으나 자라서는 기질을 변화시켜 도(道)로 들어가서 마침내 순후(醇厚)하게 되었다. 타고난 효성에다 학문은 정미(精微)한 경지에 이르렀고 법도를 세움에는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주로 삼았다.

천거에 의해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에 임명되었는데, 임명되고 나서 곧 죽었다. 이때 겨우 40여 세였으나 당시의 동료들이 모두들 노성(老成)한 숙덕(宿德)으로 높였다.

동계(桐溪) 선생의 휘는 온(蘊)이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행의(行誼)로 천거되었다. 얼마 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엄정한 태도로 곧은 말을 잘하였고 폐주(廢主 광해군) 때에는 아우를 죽이고 모비(母妃)를 금고(禁錮)하는 의론을 반대하다가 10년 동안이나 제주도에서 귀양살았다.

그후 인조(仁祖)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여러 번 소를 올려 오랑캐와 강화하는 것을 간쟁하다가 되지 않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할복(割腹)을 기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그 후로는 은퇴하여 산속에서 세상을 마침으로써 천하 만대의 막중한 강상(綱常)을 한 몸에 짊어졌다. 아, 정 선생의 도는 높기도 하였고 강ㆍ정(姜鄭 강익ㆍ정온) 두 선생은 하나는 독학(篤學)으로, 하나는 높은 절의로써 모두 여기에 모셔지게 되었으니, 이는 길이 후세에 썩지 않을 만하다. 어찌 비석을 세워야만 전할 것이겠는가. 그렇지만 이후로 이 서원에 들어와서 이 비를 보는 사람들이 이 비로 해서 여러 선생들의 도덕과 절의에 감격하여 스스로 힘쓸 바를 알아, 들어와서는 집에서 효도하고 마을에서 공순하며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한다면 이 비를 세우는 것 또한 도움됨이 있을 것이다. 여러 군자들이여, 어찌 서로 면려(勉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후학(後學) 청풍(淸風) 김종후(金鍾厚)가 짓고 황운조(黃運祚)가 쓰다.

 

[주D-001]김(金)ㆍ정(鄭) …… 화를 입어 : 김ㆍ정은 김굉필(金宏弼)과 정여창(鄭汝昌). 이들은 모두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연산군(燕山君) 4년(1498)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일파로 몰려서 김굉필은 희천(熙川), 정여창은 종성(鍾城)에 각기 유배되었고, 그 후 다시 갑자사화(甲子士禍 : 1504)가 일어나 김굉필은 사사(賜死)되고 정여창은 이미 죽은 뒤였으므로 부관참시(剖棺斬屍)된 것을 말한다.

[주D-002]죽계서원(竹溪書院) : 주세붕(周世鵬)이 안향(安珦)을 제사하기 위해 세운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순흥(順興)의 죽계(竹溪)에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주D-003]실기(實紀) : 정구(鄭逑)가 인조(仁祖) 13년(1635)에 엮은 것으로 1책이다. 정식 명칭은 《문헌공실기(文獻公實紀)》.

[주D-004]추강 남공(秋江南公)의 찬술(撰述) : 《秋江集 師友名行錄》에 “정여창(鄭汝昌) …… 지리산에 들어가 3년간 나오지 않고 오경(五經)을 연구하여 그 깊은 진리를 다 터득, 체(體)와 용(用)은 근원은 한가지이지만 갈린 끝만이 다르고, 선(善)과 (惡)의 성(性)은 같으나 기질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 그의 성리학은 누구나 존경하였다 …… ”고 한 것을 말한다.

 

 

군자사(君子寺)

 

계묘년(1783, 정조 7) 6월 23일에 나는 아들 광류(光霤)와 함께 두류산(頭流山) 구경을 가서 군자사(君子寺)에서 묵었다. 이 절의 사적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기에 이를 줄여서 적는다.

 

“천령(天嶺 경남 함양(咸陽)의 옛이름)의 남쪽 50여 리에 지리산(智異山)이 있고 지리산의 동쪽 기슭아래 큰 시냇가에 이 절이 있다.

진(陳) 나라 대건(大建 선제(宣帝)의 연호) 10년(578) 무술,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이 즉위하기 전에 왕위를 피해 이곳에 있을 때 여기에서 태자를 낳았고 환도(還都)하여서는 이곳의 집을 절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이름을 군자사라 한 것이다. 그후로 거듭 난리를 만나 흥폐(興廢)를 거듭하다가 고려(高麗) 경원(慶元 송 영종(宋寧宗)의 연호) 4년(1198) 무오에 불일국사(佛日國師)가 이 산 위에 있는 무주암(無住庵)에 와 머물면서 내관(內觀)에 정진(精進)하였다.

얼마 후 그가 승평선사(昇平禪社)로 돌아갈 때 이 산 아래를 지나다가 이 절터를 보고 절을 지으려다가 유감스럽게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듬해에는 사법(嗣法) 제자인 진각국사(眞覺國師)에게 명하기를 ‘나의 뜻을 잘 이어받아 그곳에 가서 절을 지으라.’ 하였다.

그리하여 국사가 그 영수(領袖)로 하여금 먼저 불당을 새로 짓고 점차로 승사(僧舍)를 완성하게 한 다음 대중에게 고하기를 ‘절이 이미 완성되었으니 내가 감히 오래 이곳에 머무를 수 없다.’ 하고 그의 문제(門弟)인 신담(信談)을 시켜 이곳을 주관하게 하고 금대암(金臺庵)에 물러가 있다가 다시 단속사(斷俗寺)로 옮겨갔다.

그후 세상이 많이 바뀌면서 이 절은 또다시 흥폐를 거듭하다가 연우(延祐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4년(1317, 충숙왕 4) 정사에 혜통화상(慧通和尙)이 이 절에 와서 절을 크게 수리하고 증축하였다.

고려 말기에서 조선초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도이(島夷 일본을 말한다)의 침략을 거치면서 이 절 또한 불에 타서 파괴되었다. 홍무(洪武) 37년 갑신에 천태(天台)의 영수(領袖) 행호 대선사(行呼大禪師)가 새로 크게 확장하므로 옛 규모보다 더 커져서 상실(像室)과 경대(經臺) 등 모두 완비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강희(康熙 청 성조(淸聖祖)의 연호) 19년(1680, 숙종 6) 경신에 청신사(淸信士) 순일 운석(淳一韻釋)이 옛 누(樓)를 고쳐 새롭게 하고 신관도인(信寬道人)이 기와를 새것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단청은 올리지 못했다가 갑자년(1684) 봄에 통정(通政) 태감법사(太鑑法師)가 유악(幼堊)을 칠하였다.

강희(康熙) 23년(1684)에 방호(方壺)의 필추(苾芻 비구(比丘)를 말한다) 형곡 복환(荊谷復還)이 쓰다.”

동사(東史)를 상고하건대, 진평왕(眞平王)은 후사가 없는데 지금 ‘이곳에서 태자를 낳고 인하여 군자사라 명명하였다.’ 하였으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원문에 ‘自爾厥’ 라고 한 것의 ‘’ 자는 ‘后’ 자인 듯한데 이 글에 ‘’로 썼으니 생각건대, ‘后’자가 비록 ‘後’자와 통용되기는 하나 아마도 후왕(后王)의 후(后)자를 혐의쩍게 생각하여 고의로 ‘口’를 빼고 ‘’로 쓴 것인가 보다. 이 절은 현재 퇴폐(頹廢)하여 단지 비구승(比丘僧) 10여 명이 있을 뿐이다.

 

[주D-001]내관(內觀) : 불교 용어. 바깥 경계를 떠나서 마음을 고요히 하고 자기를 관찰하는 공부를 말한다.

[주D-002]홍무(洪武) 37년 갑신 : 홍무는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로서 31년으로 끝나고 37년은 없다. 갑신년은 태조 사후 6년째가 되는 명 성조(明成祖) 영락(永樂) 2년(1404)에 해당한다.

 

 

신(愼)ㆍ권(權) 두 처사(處士)

 

거창(居昌) 신돈항(愼敦恒)은 향리(鄕吏)이다. 유업(儒業)을 익히어 독서하고 행실을 닦았으며 가죽띠에 포의(布衣)를 입고 있는 모습이 매우 훌륭하였다.

집에도 경상도(慶尙道)에서 간행된 서적이 거의 빠짐없이 소장되어 있었다. 그는 함양(咸陽) 권극중(權克中)과 친하게 지냈다. 극중은 집이 매우 한미(寒微)하였으나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이 뛰어났다. 우도(右道) 인사들이 그들을 칭찬하기를,

 

“신 처사(愼處士)는 성격이 온화하고 까다롭지 않으며 자세하고 착한데다 항상 양보하고 겸허하며, 권 처사(權處士)는 몸가짐이 엄격하고 깨끗하다. 그리고 남을 가르치기에 게으르지 않다.”

하였다. 나는 돈항(敦恒)은 보았으나 극중(克中)은 아직 만나보지 못하였다. 돈항의 아들 천능(千能)은 이제 겨우 약관(弱冠)을 넘은 나이로 학문과 재예가 숙성했다. 그는 일찍이 나와 종유(從遊)하였는데 한번은 그 시문을 나에게 보여주며 정정을 청하였다. 그의 시에 이런 것이 있었다.

 

고니와 까마귀도 떼지어 서로 친하는데 / 鵠與烏群便相親

학이 닭과 어울린다고 성낼 게 뭐 있으랴 / 鶴隨鷄伴豈相嗔

청하노니 그대는 높은 자세를 낮추게나 / 爲君暫屈昻藏氣

날 가까이해도 그대 몸 결백하긴 변함 없으니 / 近我無傷潔白身

 

 

석호집(石湖集)

 

내가 다시 화산우(花山郵 사근역(沙斤驛)을 말한다)로 돌아갈 때에 강산(薑山 이 서구(李書九)의 호)에게 책을 빌려 주기를 청하니 강산이 범성대(范成大)의《석호집(石湖集)》을 빌려 주었다.

마침 뜰앞의 두 그루 감나무는 푸른 잎이 막 우거지고 집 위의 붉은 빛 죽순(竹筍)은 지붕을 지났고 붉고 누른 장미와 해당화는 눈을 부시게 한다. 매일 공무가 파하고 나서 잠자는 시간 외에 뽑아서 베껴 둔 그의 시 몇 수를 여기에 싣는다.

 

 

임 장군(林將軍)의 영정(影幀)

 

계묘년(1783, 정조 7) 늦겨울에 상(上)이 특명으로 나를 사근역 승(沙斤驛丞)에서 체직(遞職)하여 광흥창 주부(廣興倉主簿)로 전직시켰다. 내가 아우 공무(功懋)와 함께 대설(大雪)을 무릅쓰고 조령(鳥嶺)을 넘어 단월역(丹月驛) 달천(獺川)에 도착하니 해가 이미 저물었다.

촛불을 켜들고 임 장군의 사당(祠堂 임경업(林慶業)을 모신 곳)을 배알하고 화상을 보니, 타원형의 얼굴에 눈썹은 검은데 빳빳하기가 솔잎 같았고 그 중에는 수호(秀毫)가 서너 개 있는데 강하기가 찌를 듯하였으며, 성글게 난 수염은 자못 길었고 눈은 세모져 있었다.

 

 

신라의 방언(方言)

 

지방의 관장(官長)이 방언(方言)을 알면 그 지방의 속정(俗情)을 알 수 있다. 내가 처음 사근역(沙斤驛)에 부임했을 때, 아전이나 하인들의 말을 얼핏 듣고는 알 수가 없었다. 이는 대개 그들이 신라의 방언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들 또한 나의 말을 잘 알아 듣지 못해서 착오를 일으키는 일이 많았다. 얼마 지나서는 나도 자못 방언을 익혔으므로 드디어 백성을 대하는 데 방언을 사용하게 되었다.

한번은 환곡(還穀)을 거두어 창고에 들일 때 시험삼아 하례(下隷)들에게 방언으로 분부하기를,

 

“거치(居穉)가 온전치 않으면 나락(羅洛)에 물이 새게 된다. 청이(請伊)로 까분 뒤에 사창귀(沙暢歸)로 단단히 묶어서 정지간(丁支間)에 들여 놓으라.”

하였다. 마침 서울에서 온 손님이 옆에 앉아 있다가 입을 가리고 킥킥 웃으면서 무슨 말이냐고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일일이 풀이해 주었다.

 

“거치(居穉)는 섬(苫)을 말하고, 나락(羅洛)은 벼를 가리키며, 청이(請伊)는 키[箕]를, 사창귀(沙暢歸)는 새끼를, 정지간(丁支間)은 창고를 가리킨다.”

 

 

달구 장운(達句長韻)

 

달구 장운(達句長韻)의 서문은 다음과 같다.

사근역(沙斤驛) 이승(李丞)이 내각(內閣 규장각을 말한다) 검서관(檢書官)의 직함을 띤 채 외직으로 나오면서, 각학사(閣學士)로서 순상(巡相)으로 있는 이공(李公)의 감영(監營)으로 나를 찾아왔다가 자신이 정철재(鄭徹齋)에게 올린 22운(韻)으로 된 시를 내보였는데, 나는 시가 좋기에 놓아두게 하였다. 이승(李丞)이 떠나고 나서 곡강(曲江) 성 사군(成使君)이 외각(外閣 교서관(校書館)을 말한다) 교리(校理)에서 나와 그 임지로 부임하면서 또 나를 찾아왔다.

이승(李丞)과 곡강(曲江)은 나와 문장(文章)으로 벗을 맺은 지 20년인데 이제 갑자기 대령(大嶺)의 남쪽에서 만난 것이다. 이 두 사람은 내가 오랫동안 시를 짓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왔다. 내가 승(丞)을 보내고 돌아왔을 때 곡강(曲江)이 뒤를 이어 찾아 온 것이 기뻐서 며칠을 함께 묵으며 술을 마시고 이승의 시를 꺼내 놓고 서로 탄복하여 칭찬하고는 곧 각촉(刻燭 초에 금을 그어놓고 초가 그 금까지 탈 동안의 시간을 말한다)하고 이승의 운(韻)을 따라 시를 지어 그 우열을 겨루었다.

이때 내 손님에 원생(元生)이 있었는데 그는 철재의 후파(侯芭 인명인데 제자로 쓰인 말)이다. 철재와 시랑(侍郞) 공기(公紀 민종열(閔種烈)의 자)의 청으로 나에게 와 있었는데 순상공(巡相公)도 날마다 그를 불러 함께 얘기하곤 하였다. 원생이 철재를 그리는 내용으로 나의 시에 화답하고는 우리가 지은 시들을 소매속에 넣고 감영에 들어가 순상공을 뵈니 순상공이 ‘어째서 나는 참여시키지 않았는가? 그대들이 나를 감사로서 대우하는가?’ 하고, 원생에게 붓을 잡게 하여 단숨에 줄줄 시를 부르는데 급히 써도 미쳐 따라 쓸 수 없었다. 공이 또 ‘주천(酒泉) 정 태수(鄭太守)가 볼 일이 있어서 이곳에 오기로 하였다. 이처럼 아취(雅趣) 있는 일에 주천의 시가 없어서는 안 된다. 진사 동병(東屛) 김자용(金子容)도 왔는가? 아직 오지 않았거든 주인(主人 여기서는 원생이 묵고 있는 집의 주인인 홍원섭(洪元燮)을 가리킨다)에게 어느 날 오느냐고 물어보라.’ 하였다.

이튿날 과연 주천 태수(酒泉太守)가 왔기에 곡강(曲江)을 더 머물게 하여 무릇 8일간을 우리 집에서 묵었다. 초가을 좋은 날에 하늘이 맑게 개어 밝은 달이 떠오르자 술상을 차리고 좋은 향(香)을 피우고는 고금(古今)의 인물(人物)과 시문(詩文)을 논하니 서로 의견이 조금도 어긋나는 바가 없었다.

술이 얼근해지자 서로 초서(草書)를 쓰니 하룻밤에 먹물 서너 말이 소비되었다. 순상공(巡相公)은 여러 번 기생을 시켜 옆에서 보고 있다가 종이 위에 먹물이 마르면 즉시 거두어 가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주천(酒泉)이 늦게 도착하여 혼자 시를 짓지 않으려 하자, 원생(元生)은 종이를 펴서 앞에 내밀고 곡강(曲江)은 떠드는 소리를 그치게 하고, 나는 흥얼거리며 분위기를 돋우고, 순상공 또한 자리를 피해주며 그 뜻을 펴 시를 짓게 하였다.

주천은 그때마다 웃기만 하고 시를 지으려는 기색이 없더니, 헤어져 돌아갈 때 금강(琴江)을 건너 북쪽으로 10리를 가서는 홀연히 시를 지어 보냈으므로 좌중이 모두들 크게 놀랐다.

이때, 동병(東屛)도 이미 도착하여 연거푸 시 두 편을 이루니 여러 사람도 따라서 시를 지었다. 주천은 순상공이 어렵게 여기는 처지이고 곡강이 경외(敬畏)하는 입장이며, 동병은 주천이 마음으로 허여하여 으레 구선(癯仙 매화(梅花)의 별칭)이라 부르는 입장이다.

내가 영남에 부임해서 몇 해 동안 영남의 준재(雋才)를 찾은 결과 만난 사람이 바로 구선이다. 또 구선과 원생(元生)은 직접 가르치고 배운 사제간이므로 원생을 우편에 앉혔다. 공기(公紀)가 일찍이 나에게 보낸 편지에 ‘남금(南金) 곡강(曲江)이 술을 들어 하례하며「문원(文苑)의 주인이 될 사람은 이 두 선비가 있을 뿐입니다.」하였다.’고 한 귀절이 있었다.

시축(詩軸)이 이루어지자 순상공이 곡강을 시켜 두 벌을 쓰게 하여 한 벌은 철재(徹齋)에게 보내어 화답을 청하고 또 초재(蕉齋 심염조(沈念祖)의 호이다) 심 안사(沈按使)에게 편지까지 보내어 시 짓기를 청하였다. 초재 또한 내각학사(內閣學士)로서 나와는 젊어서 동사랑(同舍郞)이었으므로 철재와 같이 오랜 친구이다.

8월에 원생이 서울로 갈 때 내가 원생에게 시랑 공기를 찾아가서 ‘내가 이승(李丞)과 곡강으로 해서 근자에 다시 시를 짓게 되었으며, 장차 여러 학사들의 시를 얻어 강호(江湖)의 친구들에게 구비(求備)시키고자 한다.’는 말을 전하게 하였다. 계묘 중양(重陽)에 홍원섭 태화(洪元燮太和 태화는 원섭의 자)가 쓰다.

원운(原韻)은 사근역승(沙斤驛丞) 이덕무 무관(李德懋懋官 무관은 덕무의 자이다)이 지은 것이며, 철재(徹齋)는 각학사(閣學士) 정 시랑 지검(鄭侍郞持儉 정지검이 이조 참판을 지냈으므로 시랑이라 한 것이다)의 호이다. 곡강(曲江)은 사군(使君) 성대중 사집(成大中士執 사집은 대중의 자이다)이고 문희(聞喜)는 수재(秀才) 원득정 수지(元得鼎受之 수지는 득정의 자이다)이다.

동병(東屛)은 진사 김득후(金得厚)로 호는 구선(癯仙), 자는 자용(子容)이고, 자경(子敬)은 주천태수(酒泉太守) 정지순(鄭持淳)이고 징청주인(澄淸主人)은 안찰사(按察使) 이공 병모(李公秉模)이다.

그 시를 보면서 그 지은 사람을 몰라서는 안 되기에 홍원섭 태화(洪元燮太和)가 적었다.

 

매죽헌(梅竹軒)에 곡강 사군(曲江使君)을 머물게 하고 술을 마시면서, 사근승(沙斤丞)이 철재(徹齋) 학사에게 올린 장편시의 운을 따라 함께 시를 짓다.

 

원생(元生)이 소매에서 통판(通判 홍태화(洪太和)가 당시에 대구통판(大丘通判)으로 있었다)과 곡강(曲江)이 사근승(沙斤丞)의 장구(長句)를 차운한 시를 내보이고, 이어서 주석(酒席) 풍류의 성대함이 근래에 보기 드문 것이었음을 말하기에 기꺼이 그 운을 따라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시축(詩軸)에 쓰기를 청하였다.

 

달성(達城)에 들렀다가 사근(沙斤) 이승(李丞)이 우리 종씨인 정 학사(鄭學士)에게 준 시를 보았다. 달성 홍 사군(達城洪使君)과 곡강 성 사군(曲江成使君)은 이미 이에 화답하는 시를 지었고 감사 이공(李公)도 뒤를 이어 화답하였다.

또 이공은 정 학사(鄭學士)가 이미 이승의 시에 화답한 것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이 시를 찾아서 구하고 심 학사(沈學士 심염조(沈念祖)를 가리킨다)가 현재 황해감사로 있으므로 이공이 편지를 보내 화답을 청하였고 또 나에게도 그 시를 차운해서 시를 지어 함께 시축에 쓰기를 명하였다. 홍(洪)ㆍ성(成)두 사군도 굳이 나에게 화답을 청하므로 천박한 재주를 생각지 않고 감히 다음과 같이 그 끝에 쓰다.

 

내가 달성(達城)으로 가는 길에서 주천 사군(酒泉使君)을 만났다. 사군이 나에게 ‘자네는 급히 가보게. 통판(通判)이 자네 오기를 기다리고 있네. 통판과 곡강(曲江) 성 사군(成使君)이 각기 22운(韻) 장구(長句)를 짓고, 감사공(監司公)도 이에 화답하는 시를 지었네. 그리고는 내게 화답하는 시를 지으라 하기에 대답은 해놓고 미쳐 짓지 못했네. 자네는 급히 가보게. 내 시가 완성되면 수체(水遞)편에 보내겠네.’ 하였다.

내가 달성에 도착하니, 통판이 그 시들을 내 보이며 ‘이 시는 모두 각촉(刻燭)하고 지은 거라네.’ 하였다. 내가 이 시들을 너댓 번 읽어보니, 구절구절이 모두 법도에 맞아서 전혀 창졸간에 지은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통판이 내게 ‘곡강(曲江)이 자네가 온다는 말을 듣고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오지 않자 섭섭하게 여기며 돌아갔네. 또 감사공의 시짓기를 독촉하는 편지가 매일 오다시피하니, 자네가 시를 짓지 않을 수 없네.’ 하였다. 나는 막 위축되어 물러서다가 대가들의 서열에 이름을 함께 싣는 것을 요행으로 여기고 곧 그 운을 따라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제공(諸公)이 내게 기대하는 뜻에 답하였다.

 

 

신라가 처음 우역(郵驛)을 둔 해

 

신라(新羅) 소지왕(炤智王) 9년(487) 정묘 3월에 처음으로 우역(郵驛)을 두고 관도(官道)를 닦았다. 이 해는 바로 제(齊) 나라 영명(永明 무제(武帝)의 연호) 5년에 해당한다.

 

 

모시강의(毛詩講義)

 

계묘(1783, 정조 7) 중하(仲夏)에 나는 어사(御史) 김기태(金基泰)의 격문에 따라서 초계(草溪)ㆍ고령(高靈) 등의 창고를 조사하러 갔다가 내쳐 감영(監營)에까지 가게 되었다.

마침 감사 이공(李公 이병모(李秉模)를 말한다)이 내각(內閣 규장각)《모시강의(毛詩講義)》를 고열(考閱)하고 있다가 나를 별관(別舘)에 머물게 하고 이를 교정케 하였다.

얼마후 우무(郵務 이덕무의 본직인 사근역(沙斤驛)의 업무)가 바빠져서 사근역(沙斤驛)으로 돌아왔다. 이공이 또《모시강의》를 보에 싸서 한죽당(寒竹堂)으로 보내왔으므로 이에 착수하여 6일 만에 끝냈다. 대개 이공은 바로 원임 직각(原任直閣)이고 나는 이때 검서직을 가진 채 영남에서 벼슬하고 있을 때여서 한 사람은 감사이고 한 사람은 우승(郵丞)이었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었다. 이때에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각신 방백에 검서 승은 / 閣臣方伯檢書丞

일찍이 없던 아름다운 일 / 盛事天涯見未曾

옥국 어느 사람이 승람을 증수할지 / 玉局何人修勝覽

고적조에 응당 영남(嶺南)의 이 일을 첨가하리 / 應將古蹟嶠南增

 

난타가 나더러 눈동자 남다르다더니 / 蘭坨謂我異人眸

온 서적 교정타가 좋은 세월 다 보냈네 / 消盡光陰萬帙搜

지금까지 남은 업무 마치지 못해 / 慧業如今猶未了

이 몸 따라 서국도 남쪽으로 내려왔네 / 隨身書局又南州

 

책 한 권 보고 나서 술 한 병 마시니 / 一卷繙來吸一壺

좋은 안주 감영에서 연달아 보내오네 / 珍肴繹絡自營廚

우리님 나에게만 잘해 줄 뿐 아니라 / 我公不獨於余好

규장각 지붕 위 까마귀까지 사랑하네 / 爲愛奎章閣上烏

 

연꽃 바람 댓잎 이슬에 새벽 공기 서늘한데 / 荷風竹露曉泠泠

우거진 숲 속에서 꾀꼬리 소리 들려오네 / 深樹嬌鶯抱膝聽

병상에서 일어나니 흰 모시옷 차가운데 / 病起晴嵐嫌白苧

두류산 맑은 빛이 책에 비쳐 푸르르네 / 頭流山色照書靑

 

앵도는 알알이 석류꽃을 샘내는데 / 櫻桃顆顆妬榴花

어느덧 천중절(天中節)이라 물화가 아름답네 / 節屆天中歎物華

모시를 다 읽고 머리 돌려 생각하니 / 讀罷毛詩回首憶

지난 이때에 어선이 내렸였네 / 今朝御扇賜臣家

 

가련하다 동관과 청금을 / 可憐彤管與靑衿

소서에 어찌 자음시(刺淫詩)라 아니했나 / 小序如何不刺淫

주문의 공안을 감히 무너뜨리니 / 敢壞失門公案了

모신과 이불이 유림을 어지럽혔네 /毛甡李紱鬧儒林

 

[주D-001]이때에 지은 시 : 이 시는 《청장관전서》 제 12권 「아정유고」 4 ‘내각(內閣)에 비치된 모시강의(毛詩講義)를 교정하다’에 보이는데 약간 자구(字句)상의 차이가 있다.

[주D-002]옥국(玉局) …… 증수할지 : 옥국은 옥당(玉堂)으로 홍문관(弘文舘)을 말하고 승람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말한다.

[주D-003]동관(彤管)과 …… 아니했나 : 동관은 《시경(詩經)》의 패풍(邶風) 정녀(靜女)편을 가리키고 청금(靑衿)은 정풍(鄭風) 자금(子衿)편을 가리킨다. 소서(小序)는 한(漢) 나라 위굉(衛宏)이 쓴 것으로 《시경》 각 편의 머리에 붙인 서설을 말한다. 이 소서에는 “정녀는 그 당시의 무도한 임금과 부덕한 부인을 풍자한 것이고, 청금은 난세가 되어 학교가 황폐한 것을 풍자한 것이다 …… ” 하였는데, 주자의 집전(集傳)에는 이 두 시를 음분시(淫奔詩)라 하였다.

[주D-004]주문(朱門)의 …… 어지럽혔네 : 주문은 주자(朱子)를 가리키고 공안(公案)은 공론에 맞는 안건을 말한다. 모신(毛甡)은 모기령(毛奇齡)의 초명. 그는 주자의 학설을 심하게 공격하였고 이불(李紱) 역시 주자의 설에 반대하였으므로 한 말이다.

 

 

교룡성(蛟龍城) 북쪽 산은 창[戟] 모양과 같다

 

나는 남중(南中)을 오갈 때마다 말 위에서 졸다 깨서는 시 한두 연(聯)씩 읊었다. 그러나 미쳐 이의 짝을 채우기 전에 대부분 잊어버리곤 한다. 이제 마침 세 연이 생각나는데, 이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남원(南原)을 지나면서 광한루(廣寒樓)에 올랐을 때에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교룡성 북쪽 산은 창 모양 같고 / 蛟龍城北山如戟

오작교 남쪽 강은 비단 같구나 / 烏鵲橋南水似羅

 

또 함양(咸陽)의 학사루(學士樓)에서 지은 두 연은 다음과 같다.

 

쌍계에 비가 개니 은어가 뛰어오르고 / 雙溪雨歇銀魚上

팔령에 구름 걷히니 검은 학 나네 / 八嶺雲晴墨鶴飛

 

일두의 사당 황폐하고 꽃만 피었는데 / 一蠹祠荒花的歷

외기러기 나는 마을 빗기운 가득하네 / 孤鴻村逈雨冥濛

 

[주D-001]교룡성(蛟龍城) : 남원에 있는 산성.

[주D-002]일두(一蠹)의 사당 : 일두는 정여창(鄭汝昌)의 호. 남계묘정비(蘫溪廟庭碑)조 참조.

 

 

상산찬(商山饌)

 

내가 사근역(沙斤驛)에 부임했을 때 우공(郵供)이 충분치 못했을 뿐 아니라 내 자신의 식생활도 매우 박하게 하였다. 하루는 손님이 나의 식사하는 것을 보고는,

 

“왜 음식이 그리도 담박하오?”

 

하기에 내가 장난삼아,

 

“이것은 상산찬(商山饌)이오.”

 

하였다. 손님이,

 

“채소만 있고 영지(靈芝)가 없는데 어찌 상산찬이라 하오.”

 

하기에 내가,

 

“신김치 짠김치에 익힌 나물과 국이 모두 무이니, 이 어찌 사호(四皓)가 아니오?”

 

하였다. 하루는 또 손님이 나의 식사하는 것을 보고는,

 

“오늘 음식은 무슨 찬(饌)이오?”

 

하기에 내가,

 

“이 음식은 풍년찬(豐年饌)이오.”

 

하였다. 손님이,

 

“금년은 흉년이 들었는데 어째서 풍년이라 하오?”

 

하기에 내가,

 

“이 음식은 신김치ㆍ짠김치ㆍ생채(生菜)가 모두 무이니, 이는 삼백(三白)이오. 옛말에 이르기를 ‘납일(臘日) 전의 삼백은 풍년의 징조이다.’ 했소.”

 

하였더니, 손님이 마침내 껄껄 웃으며,

 

“동파(東坡)의 효반(皛飯)에 비하면 그래도 뜻이 심오하오.”

 

하였다.

 

[주D-001]상산찬(商山饌) : 상산사호(商山四皓)가 먹던 음식. 진(秦) 나라 말기에 전란을 피하여 섬서성(陝西省) 상산(商山)에 은거한 네 사람의 백발 노인. 즉 동원공(東園公)ㆍ하황공(夏黃公)ㆍ녹리선생(甪里先生)ㆍ기리계(綺里季). 뒤에 모두 한 혜제(漢惠帝)의 스승이 되었다. 여기서는 은자가 먹는 담백한 음식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주D-002]동파(東坡)의 효반(皛飯) : 동파는 송(宋) 나라 소식(蘇軾)의 호. 효반은 백반(白飯)을 가리킨다. 동파가 유공보(劉貢父)에게 “나는 동생과 과거 공부를 할 때 매일 삼백(三白)을 먹었는데 매우 맛이 좋아서 이후로는 세상에 따로 팔진미(八珍味)가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하므로 삼백이 무엇인가고 묻자, 동파가 “한 줌 소금과 생무우 한 접시에 백반 한 그릇이다.”고 대답한 데서 나온 말이다.《琅琊代醉編 皛飯毳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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