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수실록편수관

함양군수연표

함양관직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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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陽郡守實錄』咸陽歷史館, 智異山文學館 金侖嵩 編

『함양군수실록』(上)

김윤숭 編

함양역사관 纂

지리산문학관 발행

『咸陽郡守實錄』(上)

新羅 速含郡 太守, 天嶺郡 太守

高麗 許州 都團練使, 咸陽縣 監務

朝鮮 咸陽縣 監務 1392(태조1)~1395(태조4)

知咸陽郡事 1395(태조4)~1466(세조12)

咸陽郡守(上) 1466(세조12)~1629(인조7)

『咸陽郡守實錄』(中)

咸陽縣監 1629(인조7)~1639(인조17)

咸陽郡守(中)1639(인조17)~1729(영조5)

咸陽府使 1729(영조5)~1788(정조12)

咸陽郡守(下) 1788(정조12)~1897

『咸陽郡守實錄』(下)

大韓帝國 咸陽郡守

大韓帝國 倭占時代 咸陽郡守

大韓民國 咸陽郡守

2015.01.15. 咸陽歷史館, 智異山文學館 金侖嵩 題


三國史記 卷第十 新羅本紀 第十  >   헌덕왕(憲德王)  >   十四年春三月十八日 김헌창 난의 진압 과정과 진압 후의 논공행상(822년 3월 18일(음))

김헌창 난의 진압 과정과 진압 후의 논공행상 ( 822년 03월18일(음) )

18일에 완산주(完山州) 장사(長史) 최웅(崔雄)과 주조(州助) 영충(令忠) 등이 왕경으로 도망와 반란을 보고하니, 왕이 곧바로 최웅에게 급찬의 위와 속함군(速含郡) 태수를, 영충에게 급찬의 위를 주고 차원(差員) 장수 8명에게 왕도의 8방(方)을 지키게 한 후에 군사를 출병시켰다. 일길찬 장웅(張雄)을 선발로 잡찬 위공(衛恭) 파진찬 제릉(悌凌)이 그 뒤를 잇고, 이찬 균정(均貞), 잡찬 웅원(雄元), 대아찬 우징(祐徵) 등은 삼군을 통솔하고 정벌을 떠났다. 각간 충공(忠恭), 잡찬 윤응(允膺)이 문화관문(蚊火關門) 을 지키고 명기(明基)와 안락(安樂) 두 화랑이 각각 종군을 청하여, 명기와 그를 따르는 무리는 황산(黃山)으로 향하고 안락시미지진(施彌知鎭)으로 향했다. 이때에 헌창은 장수를 보내 주요 도로를 차지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장웅도동현(道冬峴)에서 적병을 만나 격퇴하였고, 위공제릉장웅의 군대에 합세해 삼년산성(三年山城)을 공격해 승리하였다. 병사들이 속리산(俗離山)으로 나아가 적병을 공격해 섬멸하였고, 균정 등은 적과 성산(星山)에서 싸워 멸하였다. 여러 군사들이 함께 웅진(熊津)에 도착해 적과 큰 전투를 벌였는데, 목을 벤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헌창은 간신히 몸을 피하여 성에 들어가 견고히 수비하니, 여러 군사들이 포위 공격을 한 지 10일 만에 성이 함락되려 하였다. 헌창이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자 종자(從者)가 목을 잘라 머리와 몸을 각각 묻었다. 성이 함락되자 옛 무덤에 있는 그의 몸을 찾아내 다시 베고 종족(宗族)과 도당(徒黨) 무려 239명을 죽이고 백성들은 놓아주었다. 그 후 공(功)을 논하여 작위와 상을 줌에 차등을 두었다. 아찬 녹진(祿眞)에게 대아찬의 위를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고, 삽량주(歃良州) 굴자군(屈自郡)은 적과 가까웠으나 난에 가담하지 않아 7년 동안 조세를 면제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1권

 
 
 경상도(慶尙道)
함양군(咸陽郡)

【명환】 신라 영충(令忠) 헌덕왕(憲德王) 14년 웅천 도독(熊川都督) 헌창(憲昌)이 반란을 일으켜서, 무진(武珍)ㆍ완산(完山) 등 주를 협박하여 제 편으로 만들었다. 완산 장사(完山長史) 최웅(崔雄)이 영충과 함께 서울에 도망쳐 와서 보고하였다. 임금이 곧 영충을 속함군 태수(速含郡太守)로 임명하였는데, 위계는 급찬(級湌)이었다. 최치원(崔致遠) 치원이 해인사 중 희랑(希朗)에게 보낸 시 끝에 방로태감 천령군태수(防虜太監天嶺郡太守) 알찬(遏粲) 최치원이라 적었다.
본조 송희경(宋希璟)ㆍ이차약(李次若) 숭인(崇仁)의 아들이다. 채륜(蔡倫)ㆍ최덕지(崔德之)ㆍ조상치(曺尙治)ㆍ정종소(鄭從韶) 모두 수령[知郡]이었다.
『신증』 김종직 고을 사람이 추모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세웠다. 조위(曺偉).


[희랑 화상에게 증정하다[贈希朗和尙].

#9,388.<첫 번째>.

보득이 금강지에서 설한 가르침을, 부살들이 철위산에서 결집하였네

   步得金剛地上說<보득금강지상설>   扶薩鐵圍山間結<부살철위산간결>

필추가 해인사에서 강경하였으니, 잡화가 이로부터 삼절을 이루리라

   苾?海印寺講經<필추해인사강경>   雜花從此成三絶<잡화종차성삼절><崔致遠:新羅:古譯院(譯)>

희랑 화상(希朗和尙)에게 증정하다 : 희랑 화상은 통일 신라 시대에 해인사(海印寺)에 있던 승으로, 고운과 시문(詩文)으로 사귀었고, 《화엄경(華嚴經)》에 정통했다. 뒤에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귀의를 받았으며, 견훤의 귀의를 받은 관혜(觀惠)의 남악(南岳)에 대항하여 북악(北岳)이라는 일파를 세웠다. 그의 목상(木像)이 해인사에 있다. 해인사의 부속 암자인 희랑대(希朗臺)는 그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와 관련하여,《가야산해인사고적(伽倻山海印寺古蹟)》에 “희랑대덕 군이 하절기에 가야산 해인사에서 《화엄경》을 강하였는데, 나는 오랑캐를 막아 내느라고 청강할 수가 없었다. 이에 한 번 읊조리고 한 번 노래하되, 5측(側) 5평(平)을 써서 10절을 지어 장(章)을 이루어서 그 일을 기린다. 방로태감 천령군태수 알찬 최치원[希朗大德君 夏日於伽倻山海寺 講華嚴經 僕以?虜所拘 莫能就聽 一吟一? 五側五平 十絶成章 歌頌其事 防虜太監 天嶺郡守 ?粲 崔致遠]”하였다. 이 명기(名記)로 보면 이 시는 10수임이 분명한데, 현재는 6수만이 전해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보득(步得)이~가르침 : 화엄(華嚴)의 교설을 가리킨다. 보득은 범어(梵語) Buddha의 음역으로, 깨달은 사람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석가모니(釋迦牟尼)를 가리킨다. 이 밖에 몰태(沒馱), 보타(步他), 부도(浮圖) 등으로 음역하기도 한다. 석가가 6년 고행 끝에 중인도(中印度) 마갈다국(摩竭陀國)의 도성인 가야성(伽耶城) 남쪽 보리수 아래 금강좌(金剛座) 위에서 대각(大覺)을 이루고는, 그로부터 14일째 되는 날에 문수(文殊)와 보현(普賢) 등 상위의 보살(菩薩)들을 위해서 방편이 아닌 자내증(自內證)의 법문을 그 자리에서 설했는데, 그 내용을 모은 것이 바로 《화엄경》이라고 한다.

부살(扶薩)들이 철위산(鐵圍山)에서 결집하였네 : 전설로 전해 오는 이른바 ‘철위의 결집’을 말한다. 결집은 불타가 입멸한 뒤 그 유법(遺法)을 제대로 보전할 목적으로 비구들이 한곳에 모여 입으로 전해 오는 교법을 정리하고 편집하는 것을 말하는데, 불타가 입멸한 해의 제1차 결집부터 서기 1954년의 결집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모두 여섯 차례의 결집이 이루어졌다. 철위의 결집은 문수(文殊)와 미륵(彌勒) 등의 대보살(大菩薩)들이 불타의 10대 제자 중 다문제일(多聞第一)로 꼽히는 아난(阿難)을 데리고 철위산에 가서 《화엄경》ㆍ《법화경(法華經)》ㆍ《열반경(涅槃經)》 등 대승 경전(大乘經傳)을 결집했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는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대승불교의 신봉자들에 의해 대승 경전도 똑같이 불설(佛說)이라는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설이라고 한다. 부살은 보살(菩薩)과 같은 말이다. 보살은 범어 bodhisattva의 음역인 보리살타(菩提薩?)를 줄인 말로, 깨달은 중생 혹은 대각을 구하기 위해 수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필추(苾?) : 범어(梵語) bhik?u의 음역으로 비구(比丘)라고도 한다. 희랑을 가리킨다.

잡화(雜花)가~이루리라 : 희랑의 《화엄경》 강론을 계기로 해서, 그동안 난해하여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던 《화엄경》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이른바 화엄학이 앞으로 성황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잡화는 화엄을 가리킨다. 《고운집》 권2 〈무염 화상 비명(無染和尙碑銘)〉의 사(詞)에 “오백 년 운세에 맞춰 이 땅에 태어나서, 십삼 세에 속세 떠나 출가한 뒤에, 화엄이 대붕의 길을 이끌어, 험한 바다 위에 배를 띄웠어라.[五百年擇地 十三歲離塵 雜花引鵬路 ?木浮鯨津]”라는 말이 나오는데, ‘잡화인붕로(雜花引鵬路)’의 주(註)에 “부석산에서 《화엄경》을 수업하였다.〔授花嚴于浮石〕”라고 하여 잡화를 화엄으로 해석하였다. 삼절(三絶)은 공자(孔子)가 만년에 《주역》 읽기를 좋아해서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위편삼절(韋編三絶)’의 준말로, 열심히 책을 읽으며 공부하는 것을뜻한다.

 

#9,389.<두 번째>.

용당의 묘설을 용궁에서 들여온 뒤, 용맹이 용종의 공을 제대로 전했네

   龍堂妙說入龍宮<용당묘설입룡궁>   龍猛能傳龍種功<용맹능전룡종공>

용궁의 용왕이 정녕 환희함은 물론이요, 용산은 의룡의 걸출함을 더욱 표하리라

   龍國龍神定歡喜<용국룡신정환희>   龍山益表義龍雄<용산익표의룡웅><崔致遠:新羅:古譯院(譯)>

용당(龍堂)의~표하리라 : 불경(佛經) 그중에서도 특히 《화엄경》은 ‘용(龍)’이라는 글자와 관련이 깊다. 용왕(龍王)의 용궁에 불교의 경장(經藏)이 소장되어 있었다는 전설에 기인하여 불경을 용장(龍藏)이라고 하고, 용궁에 들어가서《화엄경》을 가지고 왔다는 용수(龍樹)의 또 다른 이름이 용맹(龍猛)이고 용승(龍勝)이며, 또 이러한 연유에서《화엄경》을 용경(龍經)이라고도 한다. 용당의 묘설(妙說)은 용궁에 보관되어 있었다는 《화엄경》을 가리킨다. 묘설은 부처의 설법을 가리킨다. 당나라 법장(法藏)의 《화엄경전기(華嚴經傳記)》 권1에 의하면, 불타가 입멸하고 700년쯤 뒤에 용수가 용궁에서 《화엄경》의 3본(本)을 보았는데, 상(上)과 중(中) 2본은 분량이 엄청나게 많아서 수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10만 게(偈) 48품(品)의 하본(下本)만 암송하여 인도에 전파했다고 한다. 용종(龍種)은 과거 구원겁(久遠劫) 이전에 남방(南方) 평등 세계(平等世界)에서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이루어 용종상여래(龍種上如來)로 있었다는 문수(文殊)를 가리킨다. 용맹이 용종의 공을 전했다는 것은 지혜의 화신으로 일컬어지는 문수처럼 용수가 난해한《화엄경》을 알기 쉽게 해설했다는 말로, 그가 《대부사의론(大不思議論)》을 저술하여 《화엄경》의 문의(文義)를 해석하고, 다시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을 지어 《화엄경》 〈십지품(十地品)〉의 일부를 주석한 것을 가리킨다. 용산(龍山)은 해인사(海印寺)가 있는 가야산(伽倻山)을 뜻한다. 석가가 성도(成道)하고 나서 자기가 실제로 깨달은 경지인 화엄 즉 용경의 내용을 보살들에게 알려 주기 전에 해인(海印)의 삼매(三昧)에 들었다고 한다. 또 가야산의 가야는 석가가 성도한 마갈다국(摩竭陀國)의 도성 이름이기도 하다. 의룡(義龍)은 교의에 밝은 고승이라는 뜻으로, 희랑을 가리킨다. 《고운집》 권3 〈지증 화상 비명(智證和尙碑銘)〉에 “의룡이 구름처럼 일어났다.〔義龍雲躍〕”라는 내용이 있는데, 그 주(註)에 “의정이 경의학(經義學)에 능통했기 때문에 의룡이라고 하였다. [義淨能通義學 故曰義龍]”라는 말이 나온다.

 

#9,390.<세 번째>.

마갈제성의 광명이 두루 비치고, 차구반국의 불법이 더욱 빛나네

   磨?提城光遍照<마갈제성광편조>   遮拘盤國法增耀<차구반국법증요>

오늘 아침 부상에서 떠오른 지혜의 해, 문수가 동묘에 강림한 것을 알겠도다

   今朝慧日出扶桑<금조혜일출부상>   認得文殊降東廟<인득문수강동묘><崔致遠:新羅:古譯院(譯)>

마갈제성(磨?提城) : 마갈다국(摩竭陀國)과 같다.

차구반국(遮拘盤國) : 차구가국(遮拘迦國)과 같다. 서역(西域)의 우전국(于?國)에서 동남쪽으로 2천여 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그곳의 국왕이 특히 대승불교에 대한 신심이 깊어서 궁중에 반야(般若)ㆍ대집(大集)ㆍ화엄(華嚴) 등 3부(部)의 대승 경전을 봉안하고 전독(轉讀)의 법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당나라 승려 지승(智昇)이 지은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권7에 보인다.

오늘~알겠도다 : 희랑의 강경을 찬미한 것이다. 동묘(東廟)는 동방의 사원이라는 뜻으로, 해인사를 가리킨다.

 

#9,391.< 번째>.

‘천언의 비교를 하늘에서 전수받고, 해인의 진전을 바다에서 꺼내 왔네

   天言?敎從天授<천언비교종천수>   海印眞詮出海來<해인진전출해내>

멋지도다 해인의 뜻 해우에서 밝힘이여, 천의는 단지 천재에게 맡기려 할 뿐이라오’

   好是海隅興海義<호시해우흥해의>   只應天意委天才<지응천의위천재><崔致遠:新羅:古譯院(譯)>

진전(眞詮) : 진제(眞諦)와 같은 뜻의 불교 용어이다. 진제는 세속의 법도인 속제(俗諦)와 상대되는 말로, 출세간(出世間)의 최상인 구경(究竟)의 진리를 뜻한다.

멋지도다~뿐이라오 : 해인사(海印寺)가 비록 동쪽 변두리 신라의 가야산 속에 있지만, 하늘은 이를 전혀 상관하지 않고서, 오직 희랑이라는 불교 교학의 천재를 통하여 석가가 해인 삼매의 경지에서 선포한 화엄의 지고한 뜻을 밝히게 하려고 하였을 뿐이라는 말이다. 해우(海隅)는 바다 한구석이라는 뜻으로, 신라를 가리킨다.

 

#9,392.<다섯 번째>.

도수의 고담은 용수가 해석했고, 동림의 아지는 남림이 번역했네

   道樹高談龍樹釋<도수고담룡수석>   東林雅志南林譯<동림아지남림역>

빈공이 피안에서 금성을 떨쳤다지만, 가야에서 불적을 이은 것과 같으리오

   斌公彼岸震金聲<빈공피안진금성>   何似伽倻繼佛跡<하사가야계불적><崔致遠:新羅:古譯院(譯)>

도수(道樹)의~해석했고 : 용수가 《화엄경》에 대한 논을 지어 해설했다는 말로, 그가 《대부사의론(大不思議論)》을 저술하여 《화엄경》의 문의(文義)를 해석하고, 다시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을 지어 《화엄경》<십지품(十地品)>의 일부를 주석한 것을 가리킨다. 도수는 보리수(菩提樹)를 가리킨다.

동림(東林)의~번역했네 : 동진(東晉)의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 혜원(慧遠)의 제자 법령(法領)이 차구반국(遮拘盤國)에 가서 화엄의 전분(前分) 3만 6천 게송을 구해 왔고, 불현 삼장(佛賢三藏)이 《화엄경》을 번역할 적에 남림사(南林寺)의 법업(法業)이 구술한 내용을 붓으로 적어 50권을 이루었다고 하면서, 동림과 남림이 협조한 인연을 언급한 대목이 고운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나온다. 불현(佛賢)은 각현(覺賢) 혹은 불타발타라(佛?跋陀羅)라고도 한다. 아지(雅志)는 경전을 완전히 구비하여 번역하려 했던 혜원의 평소의 뜻이라는 말이다.

빈공(斌公)이~같으리오 : 희랑의 강론이 중국에서 행해진 어떤 고승의 《화엄경》 강의보다도 뛰어나다는 말이다. 빈공은 만년에 남림사(南林寺) 법업(法業)의 제자가 되어 《화엄경》을 전수받고 강경(講經)의 제일인자가 된 담빈(曇斌)을 가리킨다. 남조 송 명제(宋明帝) 태시(泰始) 초에 장엄사(莊嚴寺)에서 대법회를 개최했을 적에, 천자의 조칙을 받고 당시의 고승 혜량(慧亮)과 함께 번갈아 법주(法主)가 되었으며, “담빈과 혜량이 금성을 떨친다.[斌亮振金聲]”라는 말과 함께 “맑은 말과 오묘한 실마리가 끊어지려다가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淸言妙緖 將絶復興]”라는 칭송을 받았다. 피안(彼岸)은 생사가 있는 차안(此岸)을 떠나서 생사를 초탈한 열반의 경지에 올랐다는 말이다. 금성(金聲)을 떨쳤다는 것은 《화엄경》을 본격적으로 강론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공자는 집대성한 분이시다. 집대성이란 종(鍾)과 같은 금의 소리가 먼저 퍼지게 하고 나서, 맨 마지막에 경쇠와 같은 옥의 소리로 거둬들이는 것을 말한다. [孔子之謂集大成 集大成也者 金聲而玉振之也]”라는 말이 나온다. 불적(佛跡)은 부처의 자취라는 뜻이다.

 

#9,393.<여섯 번째>.

삼삼의 광회의 숫자는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십십의 원종의 뜻이야 잘못될 리가 있겠는가

   三三廣會數堪疑<삼삼광회삭감의>   十十圓宗義不虧<십십원종의부휴>

유통을 말한다면 현험을 밀고 나가야 하리니, 경의 미진한 해석은 문자가 이상한 탓이로다’

   若說流通推現驗<야설류통추현험>   經來未盡語偏奇<경내미진어편기><崔致遠:新羅:古譯院(譯)>

삼삼(三三)의 광회(廣會) : 부처가 《화엄경》을 설한 아홉 차례의 법회라는 뜻이다. 《신역 화엄경(新譯華嚴經)》에서는 일곱 곳에서의 아홉 차례 법회라는 뜻의 칠처구회(七處九會)를 말하고, 《구역 화엄경(舊譯華嚴經)》에서는 칠처팔회(七處八會)를 말한다고 하였다. 참고로 칠처(七處)는 보리장(菩提場), 보광명전(普光明殿), 도리천(?利天), 야마천(夜摩天), 도솔천(兜率天), 타화천(他化天), 서다림(逝多林)이다.

십십(十十)의 원종(圓宗) :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교리를 펼치는 화엄종(華嚴宗)이라는 뜻이다. 십이라는 숫자는 화엄종에서 무궁무진하게 전개되는 법계(法界)를 표시한다. 그래서 화엄종에서 주장하는 법계연기론(法界緣起論)의 용어 가운데 하나인 ‘중중무진’을 ‘십십무진(十十無盡)’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일즉일체 일체즉일(一卽一切一切卽一)’이나 ‘일즉다 다즉일(一卽多多卽一)’을 ‘일즉십 십즉일(一卽十十卽一)’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중국 불교의 교판(敎判)에서는 《법화경(法華經)》을 소의경전(所依經傳)으로 하는 천태종(天台宗)과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화엄종을 원종이라고 칭한다.

유통(流通ㅓ)을~하리니 : 화엄의 교설이 막힘없이 전해지게 함으로써,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유통을 말하려고 한다면, 지금 희랑 화상이 강경하며 증험해 보여준 것과 같은 방식으로 계속해서 밝혀 나가야 할 것이라는 말이다. 유통은 불법(佛法)을 먼 지역까지 빠짐없이 전파하여 말세 중생이 모두 봉행하게 해야 한다는 뜻의 불교 용어이다. 불경의 내용을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의 세 부분으로 크게 나누는 것을 삼분과경(三分科經)이라고 하는데, 이는 동진(東晉)의 도안(道安)이 창시하여 유송(劉宋) 이후에 성행한 것으로, 유통에 관한 부분을 소홀히 하지 않는 중국 불교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현험(現驗)은 지금 분명히 드러나 증험이 되고 있는 사실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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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蘆原?| 원글보기

 

 

*. 전시 명칭 : 해인사 희랑조사상 ‘진품’ ‘복원품’ 동시 공개 전시회
*. 전시 기간 : 2010년 10월2일~10월 31일
*. 전시 장소 : 구광루
*. 주최 및 주관 : 법보종찰 해인사

1. 전시회 개최 연유와 목적

해인사 소장 보물 제999호 희랑 조사상은 오랜 시간이 경과하는 동안 환경적 훼손<박리. 박락. 균열>과, 인위적 훼손<촛농, 긁힘, 라벨지>으로 변화되고 손상되어 2008년 9월부터 2009년 2월까지 문화재청 도움으로 보존처리를 실시하였는데 유물 상태를 고려하여 최소한의 보존 처리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보존처리 이후 더 나은 보존 환경을 유지하기 위하여 상설 전시나 원거리 이동은 자제해야 할 것으로 판단되어 그 동안 전시를 하지 않았으며 대여 요구에도 일체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해인사를 방문하는 방문객들이 팔만대장경 다음으로 희랑조사상의 관람을 중요시하고 전시. 관람을 계속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해인사에서는 희랑 조사상 ‘진품’의 더욱 안정된 보존 관리를 위하여 전시, 참배용 ‘복원품’ 희랑 조사상을 조성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법보종찰해인사(주지 회암 선각)에서는 2010년 해인사 개산대재에 맞추어 진품과 복원품의 동시 공개 전시회를 가져 진품에 대한 일반인들의 마지막 관람기회를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진품’은 보존 관리상 안전한 진열장을 마련하여 진열장 유리창을 통해서 관람하도록 하며, ‘복원품’은 좌대에 올려 노출시켜 관람 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또한 전시기간 중 ‘복원’된 희랑조사상의 복장을 위하여 복장 모연을 행사를 진행합니다.
조사상의 복장 모연은 불자들에게는 신앙적인 의미로,
비불자들에게는 자신의 희망을 심는 타임캡술의 의미로 동참이 이루어지도록 할 것입니다.

복장은 다라니(전신사리보협진언) 종이에 자신의 이름과 소원을 적어  ‘복원’ 희랑조사상 몸속에 넣는 것으로 불교신앙으로 본다면 업장이 소멸되어 성불과 극락왕생의 인연을 심는 일이요, 문화적으로 이해한다면 동시대를 살아온 공동체의 다양한 희망의 타임캡술이 될 것이니 복장 모연 행사도 이번 전시회의 중요한 신앙 또는 문화 행사로 승화 될 수 있도록 잘 진행하고자 합니다.

전시 후 ‘진품’ 희랑 조사상은 해인사 박물관 수장고 내 특수 제작된 희랑조사상 나무함 속에 안전하게 보존 할 것이며, ‘복원’된 희랑 조사상은 모연 접수된 복장물로 복장을 한 후 일정기간 큰절에서 참배 후 박물관으로 옮겨 상설 전시실에서 참배, 관람 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2. 해인사의 중창주이자, 해인사 제3대 조사로 추앙받는 희랑 대사는 누구인가?

희랑 스님은 신라 진성여왕 3년 을유乙酉(889)에 거창군 주상면 성기聖基마을에서 출생하였으며, 속성俗姓은 주씨朱氏이고, 15세에 해인사로 출가하여 나이 78세 때인 고려광종(7년) 966년 병인년에 입적하신 분이다. (* 한찬석, 합천해인사지. 거창군사편찬위원회 자료>

스님이 태어난 시기는 신라의 하대下代(780~935)에 속하며, 이 시대는 궁예와 견훤을 비롯하여 수없이 일어난 반란으로 통일 신라는 정치적·군사적 통제를 잃고 국가적인 혼돈과 무질서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스님이 출가한 해인사는 802년 순응順應 · 이정利貞 스님의 창건이레 이들 스님의 뒤를 이은 결언決言 스님과 현준賢俊 스님(최치원의 친형)의 활약으로 신라 왕실과 밀접히 교류하면서  신라말 화엄종의 중심도량으로 면모를 굳건히 하고 있었다.

신라 말과 고려 초의 두 왕조에 걸쳐 생존했던 희랑대사에 대해 명확하게 알려주는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희랑대사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는 고려 화엄불교의 대가 균여(917~973)대사의 <균여전> 기록에

“스님은 북악의 법손이다. 옛날 신라 말 가야산 해인사에 두 분의 화엄대가가 계셨다. 한분은 관혜공인데 백제 견훤의 복전이 되었고, 한분은 희랑공인데 태조 왕건의 복전이 되었다. 이 두 사람은 초심 때는 향화를 올리며 서원을 맺었으나 어른이 되어 서원이 이미 달라졌으니 어찌 주장이 같겠는가! 문도들에게 내려가면서 점차 물과 불처럼 되었다. 더구나 법의 맛을 각기 다르게 받았으니 그 폐단을 없애기 어렵게 된 것이 오래였다. 그 때 세상 사람들은 관혜공의 법문을 일컬어 남악이라 하고, 희랑공의 법문을 북악이라 일컬었다....”  

‘가야산 해인사 고적’ 사료에
“ ......신라의 말기에 승통 희랑 스님이 해인사 주지로 계시면서 ‘화엄신중삼매華嚴神衆三昧’를 얻었을 적에, 고려 태조 왕건이 백제의 왕자 월광月光(?)으로 더불어 싸웠는데, 월광은 미숭산에 있으면서 식량이 넉넉하고 군병이 강하여, 왕건의 힘으로는 대적할 수가 없었다. 이에 왕건은 해인사에 들어와서 희랑공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백제를 물리칠 방법을 청하자, 희랑공이 ‘용적대군야차왕勇敵大軍夜叉王’을 보내어 돕게 하였다. 백제 월광이 금갑金甲을 입은 신병神兵이 공중에 가득함을 보고 두려워 항복하였다. 그래서 태조는 희랑 스님을 공경하여 받들면서 전지田地 오백결五百結을 드리니 스님은 옛 사우寺宇를 새로 중건하였다. …”

지리적으로 해인사는 후백제에서 신라에 이르는 중간지역에 위치하고 있어서 군사적 전략의 요충지대에 놓여 있었고, 해인사와 멀지 않은 팔공산에서 견훤과의 일대전투를 벌인 왕건은 휘하의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 등 많은 장수들을 잃고 패배하였으며 자신도 겨우 사지死地에서 탈출하는 곤욕을 치르게 된다. 목숨이 위급한 것은 물론 자신의 오른팔과도 같았던 심복인 신숭겸과 장수들을 잃은 정신적인 허탈감을 떨칠 수 없었던 왕건은 희랑스님에게 귀의하여 용기와 각오를 돈독하게 다지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화엄학에 있어 북악파의 대표였던 희랑스님은 왕건의 존사尊師와 복전이 되어 고려 건국을 돕게 되었고, 국가적인 신임과 후원을 받아 해인사를 크게 중창하고 화엄학을 크게 융성케 하였으며 이적異蹟을 많이 남기신 고승이었다.

또한 그 당시에 희랑스님이 큰 명성을 대변하는 최치원의 시
‘증희랑화상贈希朗和尙’ 6편이 남아 있는데

<제1편>에
보득금강지상설步得金剛地上說 금강 같은 참다운 지혜의 말씀 모아
부살철위산간결扶薩鐵圍山間結 미륵보살이 철위산에서 대승경을 결집했네
필추해인사강경苾?海印寺講經 필추가 해인사에서 경전을 강하니
잡화종차성삼절雜花從此成三絶 잡화가 이로부터 삼절을 이루리. (이하 5편은 생략)

이 시에서 최치원은 희랑 대사를 용수보살이나 문수보살에 비겼는가 하면, 하늘이 우리나라를 교화 시키려 보냈다거나, 부처님으로까지 비견하고 있다. 또한 해인사에 화엄경을 강의하여 화엄종을 크게 떨쳤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주목된다. 최치원이 해인사에 머문 때는 아마도 900년경 이후 이었을 것이므로  희랑대사는 이 당시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어서 10세기 중에는 북악파의 조사로 추대되었을 것이며 아울러 해인사 개산조 순응. 이정 조사의 제1.2대 조사에 이어 해인사의 제3대 조사로 추앙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탁기兪拓基의 <유가야기游伽倻記>에는
희랑 스님과의 인연으로 불교에 귀의한 태조 왕건은 광종에게 내린 훈요십조訓要十條의 첫머리에 ‘우리나라의 대업은 반드시 모든 부처님의 보호와 지켜 주심에 힘입은 것이다(일왈아국가대업一曰我國家大業 필자제불호위지력必資諸佛護衛之力)’라고 천명하면서 불교에 대한 귀의와 신봉을 후대에 부촉하였으며, 희랑 스님이 입적한 후에 광종은 즉위년(949년 기유 오월)에 희랑 스님에게 ‘해인존사원융무애부동상적연기상유조양시조대지존자海印尊師圓融無碍不動常寂緣起相由照揚始祖大智尊者’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는데, 여기에는 해인사로 출가하여 거주하면서 신라말에는 승통으로 주지하였으며, 고려초에는 왕의 존사로서 건국에 일조하였고, 화엄과 선을 원만하게 포융하면서도 화엄종의 중심인물로 화엄종찰인 해인사를 중창하였고, 고려시대에 불교가 국가적인 숭상과 후원을 받아 제세濟世의 역할을 다하도록 하여 화엄의 사상을 빛낸 조사라는 희랑스님의 업적을 담고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3. 조사상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해인사 희랑 조사상(예술성 작품성)은 어떤 것인가?

희랑 조사상(좌고 82㎝. 1989년 4월 10일에 보물 제999호로 지정)은 희랑 스님의 생전 모습을 그대로 제작한 조각상이다.

희랑스님이 살아생전에 스님이 직접 조성하였다는 설과 열반 직후 후학들이 조성하였다는 설이 있는데, 나이든 고승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을 감안한다면 이 조각은 스님이 입적하기 얼마 전이나, 열반 직후에 조성되어진 것으로 진영 조각의 진수를 가장 잘 묘사함으로써 10세기 중엽 고승의 造像조상 가운데 최고의 걸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최근 희랑대사상 보수 보존처리 작업을 하는 과정 중에 희랑조사상의 내부구조를 투시하기 위하여 X-ray를 촬영한 결과 지금까지 목조상으로 알려진 것과 다르게 목재심에 옻칠이나 직물 지류를 사용하여 조형된 목심 건칠상으로 밝혀짐으로 인해 한국에서 유일한 목심 건칠상이자 가장 이른 시기의 불교공예 가운데 최고의 작품으로 현재 국보로 승격 신청 중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나라의 유일한 승려의 목심 건칠진영 상이라는 점에서도 미술사적 가치가 큰 작품으로 중국 요遼대에 제작되었다고 전해지는 일련의 건칠 승려상과의 비교 검토가 요구되는 뛰어난 상像으로 조성 양식은 신라말기에 유행했던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표현하였으며, 이상적 사실주의가 아닌 현실적인 즉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하여 초상기법이나 불상양식 연구 등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는 祖師像조사상의 백미이다.

상像은 체구에 비해 머리가 다소 큰 편이다. 얼굴은 길고 이마에는 주름살이 깊이 파였으며, 자비로운 눈매, 우뚝 선 콧날, 잔잔한 입가의 미소는 조사 스님의 살아있는 듯한 인자한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여윈 몸에는 흰 바탕에 붉은 색과 녹색의 둥근 점이 있는 장삼을 입고 그 위에 붉은 바탕에 녹색 띠가 있는 가사를 걸치고 있는데 그 밑에 금색이 드러나는 것으로 미루어 원래 모습에는 금빛이 찬연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양손은 단정히 맞잡고 가만히 앉아 정면을 응시하는 정적인 모습과 인자하면서도 굳은 의지마저 느껴지는 긴 얼굴에는 희랑스님의 깊은 학식과 경륜이 함축되어 있는 듯하다.

일반적으로 초상화가 그러하듯 마치 정확한 의학적 지식에 기초한 듯 골격과 근육의 구조를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한 점이 특징이다.

생략할 곳은 과감히 생략하고 강조할 곳은 대담하게 강조하여 스님의 범상하지 않은 위용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목심에 베나 지류를 붙여서 조성하였기에 매우 섬세하고 생동감이 넘치고 인간적인 따뜻한 정감도 느낄 수 있다.

그리하여 희랑 조사상은 스님의 내면적인 정신성까지 조형화한 사실적 표현에서 한국적인 초상 조성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특이한 것은 희랑 대사의 가슴 한가운데 조그마한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사전寺傳에는 흉혈국인胸穴國人이라는 구전과
그리고 이 구멍은 여름에 모기가 극성을 부려 스님들이 수행에 지장을 받자 희랑스님이 가슴에 구멍을 내어 모기들에게 피를 ‘보시’하여 해인사의 모든 모기가 자신에게 모여들었고 다른 스님들이 편안히 정진할 수 있게 하였다는 구전과,
또한 화엄 삼매에서 방광放光을 한 자취라는 구전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처럼 화엄종의 대종장이며, 해인사 중창의 대공덕주이자 고려 태조의 복전으로서 명성을 높인 희랑스님께서는 현재 해인사 산내 암자 희랑대 독성전 옆의 바위에서 좌선삼매 수행하셨다고 구전되는데 희랑대는 나반존자를 모시고 수행하는 영험있는 기도처이다.

*. ‘복원’ 희랑 조사상은 2009년 초부터 시작하여 1년 반의 기간으로 조성되었는데
조각은 김원철 彫刻匠 . 채색은 정경문 丹靑匠이 맡았으며 (*아래 참조)
복원 경비는 해인사 희랑대 감원 경성스님 조달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1권

 
 
 경상도(慶尙道)
함양군(咸陽郡)

【명환】 신라 영충(令忠) 헌덕왕(憲德王) 14년 웅천 도독(熊川都督) 헌창(憲昌)이 반란을 일으켜서, 무진(武珍)ㆍ완산(完山) 등 주를 협박하여 제 편으로 만들었다. 완산 장사(完山長史) 최웅(崔雄)이 영충과 함께 서울에 도망쳐 와서 보고하였다. 임금이 곧 영충을 속함군 태수(速含郡太守)로 임명하였는데, 위계는 급찬(級湌)이었다. 최치원(崔致遠) 치원이 해인사 중 희랑(希朗)에게 보낸 시 끝에 방로태감 천령군태수(防虜太監天嶺郡太守) 알찬(遏粲) 최치원이라 적었다.
본조 송희경(宋希璟)ㆍ이차약(李次若) 숭인(崇仁)의 아들이다. 채륜(蔡倫)ㆍ최덕지(崔德之)ㆍ조상치(曺尙治)ㆍ정종소(鄭從韶) 모두 수령[知郡]이었다.
『신증』 김종직 고을 사람이 추모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세웠다. 조위(曺偉).


 
번호 왕대 기사명
1 세종 4년 임인(1422) 1월 10일 (무진) 사헌부 집의 박안신 등이 송희경을 처벌할 것을 상소하다
... 이에 매여 있다. 일찍이 법을 어기고 사람을 죽인 죄를 범한 사람은 다시 천거하여 쓰지 말고, 만약 천거하는 사람이 있으면 거주(擧主)천거한 사람.까지 죄를 줄 것이라.’고 하였는데, 삼가 보건대, 송희경(宋希璟)은 일찍이 금산 군수(錦山郡守)가 되었을 때, 형을 굽혀 두 사람을 죽였는데, 지금은 지함양군사(知咸陽郡事)가 되었으니, 원컨대 이미 내린 명령...
2 세종 7년 을사(1425) 12월 10일 (을해) 지함양군사 최덕지와 임강·안음·비안 현감 박지생·김명양·권후 등을 인견하다
지함양군사(知咸陽郡事) 최덕지(崔德之)·임강(臨江) 현감 박지생(朴枝生)·안음(安陰) 현감 김명양(金明諹)·비안(比安) 현감 권후(權厚) 등을 인견하고 이르기를,“이전에는 다만 2품 이상인 수령만을 접견하였으나, 내가 자세히 생각하여 보니, 시골의 먼 곳을 내가 친히 가서 다스리지 못하고 어진 관리를 선택하여 나의 근심을 나누어 주어 보내는 것이니, 그 임...
3 세종 23년 신유(1441) 7월 25일 (기미) 함양군 포와 지함양군사 권자홍에게 상을 맡게 하다
함양군(咸陽君) 이포(李KC_JO_E951)에게 명하여 주상(主喪)하게 하고, 지함양군사(知咸陽郡事) 권자홍(權自弘)으로 상장(喪葬)의 제사(諸事)를 맡게 하였으니, 자홍은 빈의 종형(從兄)이었다.【원전】 4 집 352 면【분류】 *왕실-의식(儀式)
4 세종 23년 신유(1441) 8월 14일 (무인) 하직하는 지함양군사 정양과 용담 현령 이거경을 인견하다
지함양군사(知咸陽郡事) 정양(鄭穰)과 용담 현령(龍潭縣令) 이거경(李居敬)이 하직하니, 인견하고 말하기를,“내가 들으니 연변(沿邊)의 군현(郡縣)에 비가 너무 많이 왔고, 또 풍변(風變)이 있었으나 곡식을 해(害)하기에는 이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그 실상을 알지 못한다. 실농(失農)한 백성이 혹 유이(流移)하는 일이 있으니, 마땅히 진휼(賑恤)하...
5 세종 30년 무진(1448) 1월 25일 (임자) 지함양군사 이보흠을 대구로 옮겨 임명하다
경상도 감사(監司)에게 유시하기를,“지함양군사(知咸陽郡事) 이보흠(李甫欽)을 대구(大丘)로 옮겨 임명하라.”하였는데, 사창(社倉)의 편의 여부와 당시에 둔 창고를 시험하게 하고자 함이었다. 또 보흠(甫欽)에게도 이를 유시(諭示)하였다.【원전】 5 집 50 면【분류】 *재정-창고(倉庫)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노선경(盧善卿)
생몰년 미상. 조선 세종 때의 문신.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양필(良弼), 호는 동악(東岳). 아버지는 도염서승(都染署丞) 갑생(甲生)이다.
1435년(세종 17) 식년정시(式年庭試)에 병과로 급제, 서승(署丞)이 되었고, 이듬해 중시(重試)에 발탁되어 사간원에 들어갔다.
1464년(세조 10) 승(僧) 원각(圓覺)이 왕에게 아뢰어 도성 안에 절을 짓고, 또 왕을 청하여 황곡사(篁谷寺)에 가자 그 옳지 못함을 상주하여 원각을 참수시킨 일이 있었다. 권귀(權貴)의 미움을 사서 함양군수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고령현감이 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나서는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전념하였다. 창녕의 동산서원(東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동악고》가 《광주노씨세고 光州盧氏世稿》에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光州盧氏世稿(盧應禧編). 〈權五虎〉

 

이보흠

[간략정보]

  • 한자
  • 분야
  • 유형
  • 시대
  • 성격
  • 성별
  • 생년
  • 몰년
  • 본관
  • 관련사건
  • 대표관직(경력)
  • 집필자

[정의]

?∼1457(세조 3). 조선 전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경부(敬夫), 호는 대전(大田). 아버지는 부사직 현보(玄寶)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29년(세종 1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430년 동부훈도관(東部訓導官)으로서 공법(貢法)의 논의에 참여해 전제(田制)와 세법을 상론하였다. 1434년에는 사정(司正)으로서 우효강(禹孝剛)·김순(金淳) 등의 문사와 함께 ≪자치통감훈의 資治通鑑訓義≫ 찬수에 참여하였다.

이어 집현전박사를 역임하고, 1443년 감찰로서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성균주부가 되었다. 이어 축성법에 대한 건의나 공법 논의 등에 참여하였다.

1445년에는 외직을 맡을 때의 경험 등을 토대로 사창법(社倉法)에 관한 건의를 해, 사창 제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세자(뒤의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48년 지함양군사(知咸陽郡事)의 외직을 맡고 있던 중 사창 제도를 시행하려는 세자의 뜻에 따라 지대구군사(知大丘郡事)로 옮겨 최초로 사창법을 시험적으로 실시하였다. 대구 지방의 효과적인 사창법의 시행으로 ‘순량(循良)’의 칭송을 얻었으며, 문종은 즉위 후 총애하던 그를 임기를 채우지 않고 경직(京職)에 초탁(超擢)하려 했으나 사창제의 계속적 실시를 위해 임기를 마쳤다.


신자교(申子橋)

字(자)는 혜옹(惠翁), 1435년(세종17) 司馬試(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450년(세종32)에는 秋場文科(추장문과)에 丙科(병과)로 급제한 후 咸陽 郡守(함양군수)를 거쳐 司諫院 司諫(사간원사간)을 역임하였다.

신자교 (申子橋) - 사성공파의 파조

  출생 (1413∼1484)

 감찰공의 큰아들로 태어나 사성공파의 파조입니다.

 자손

 딸 하나가 있었는데 이조판서를 지낸 오팽숙이 사위였습니다.

 관력

 세종 32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성과 함양군수를 지낸뒤 사간원 사간을 지냈습니다. 그래서 사성공이라고 부르지요. 단종이 왕위를 세조에게 넘기자 안질을 핑개로 벼슬을 버리고 남원으로 돌아갔습니다.

<국조 문과 방목>

신자교(申子橋)   

       문종(文宗)0년(1450년), 식년시(式年試) 병과2(丙科2)  

  

>>> 인적사항

  생년(生年)   

  자(字)   혜옹(惠翁)

  호(號)    

  본관(本貫)   고령(高靈)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신제(申梯)

  생부(生父)    

  조부(祖父)   신포시(申包翅)

  증조부(曾祖父)   신덕린(申德隣)

  외조부(外祖父)   유두명(柳斗明)

  처부(妻父)   문유질(文由質)

  숙(叔)   신장(申檣)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사용(司勇)

  품계(品階)   통정대부(通政大夫)

  관직(官職)   군수&(郡守&)

신제 (申梯) - 감찰공(監察公)  

  출생(1393∼1443)

 감찰공(監察公)의 자는 이섭(利涉)이요 호는 회헌(晦軒)이며 1393년(태조 2년) 계유(癸酉)에 출생하셨습니다.  

 관력

 감찰공께서는 천품이 순수하였으며 일찍이 가정의 전통을 이어받아 항상 백씨(佰氏) 암헌공의 가르침으로 학문을 배우며 성장하시었고 벼슬은 문음(門蔭)으로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에 오르시어 감찰공이라 합니다.  

 업적

 빙가(聘家)인 영광 유씨(靈光 柳氏)집안에 서얼 자광(子光)이 못된 사람임을 예견하시고 그와는 절대로 상통하지 말 것을 돌에 새겨 집안과 자손들에게 경계시키셨는데, 과연 자광이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켜 사림(士林)을 도륙하였습니다. 이에 이르자 모든 사람들이 감찰공의 선견지감(先見之鑑)에 놀라고 감탄하였습니다.

1443년(세종 25년) 정월 1일에 돌아가시니 51세였습니다. 유자광 [柳子光, 1439 ~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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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 자민루(字民樓)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선덕(宣德) 정미년에 군수 권상(權詳)이 세웠다. 제민루(濟民樓) 귀산(龜山) 남쪽에 있다. 선덕 계축년에 군수 반저(潘渚)가 세웠으니, 곧 의학루(醫學樓)이다. 교수관(敎授官) 문헌(文獻)이 기(記)를 지었다. 소루(小樓) 객사 남쪽에 있다. 천순(天順) 년간1457~1464세조3~10에 군수 정종소(鄭從韶)가 세웠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기(記)에, “죽령(竹嶺) 남쪽에 자리잡은 고을 중에 영천이 제이(第二)가 된다. 그 산천은 밝고 빼어났으며, 그 고을 터는 상쾌하고, 그 백성의 풍속은 검소하고 순박하였다. 이 고을에 원으로[製錦] 오는 이가 가끔 군자(君子)가 많았으나 그 중 남의 이목에 표표히 뛰어난 이는 하호정(河浩亭)ㆍ정습인(鄭習仁)ㆍ최원부(崔元傅) 세 사람뿐이었는데, 지금의 수령 오천(烏川) 정 선생(鄭先生)도 역시 그들과 같이 칠 수 있는 이었다. 그는 어버이 봉양을 이유로 대부(臺府)를 사직하고 이 고을을 맡았다. 무릇 그의 시설한 것은 마치 현보(縣譜)를 가진 듯하거니와, 공경으로써 윗사람을 받들고 따사로움으로써 백성을 사랑하고, 정직함으로써 간사한 자를 다스리었다. 넉넉한 자질로 다스리기 쉬운 백성을 교화하니, 비유하건대, 소백정[庖丁]이 날선 칼날로 소뼈 사이를 쳐서 소를 잘 잡듯 하였으니, 어찌 어긋날 걱정이 있겠는가. 1년이 되지 않아 경치가 잘 되고 백성이 화락하였다. 한가한 날 자민루(字民樓)에 올라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이 고을은 사신ㆍ빈객이 죽령을 넘어 왕래하는 요충이다. 사신이 있으면 반드시 빈좌(賓佐)가 있다. 매양 뜨거운 여름을 당하면 집이 찌는 듯 답답하여, 마음을 맑은 바람에 씻어 번민함을 버리려고 생각할 적에, 사신은 이 누(樓)가 있지만 빈좌들은 어디에 거처할 것인가. 이것이 어찌 하나의 결함이 아니겠는가.’ 하고 드디어 사방을 둘러보다가 동남쪽 구석에서 쓸모없는 집 한 채를 얻었으므로 이에 이를 개척하여 새롭게 하되, 그 기둥을 약간 높이고 곁에는 울타리를 두르고, 그 아래에는 땅을 파서 못을 만들어 두어 말[斗]의 고기를 넣고, 못 안에 있는 섬에는 참대[苦竹] 여덟 아홉 그루를 심고 잡꽃을 그 사이에 간간히 심었더니, 난초는 그 기슭을 덮고 부용은 그 물결을 가렸다. 벽을 바를 적에 내가 가서 올라보니, 소나무는 죽죽 벌였고 울타리는 한가했으며, 푸른 이랑 누런 두렁은 수를 놓은 듯 엇갈리어 준조(尊俎)에 빛났다. 뽕나무밭을 매는 자와 농사짓는 이들이 그늘에서 쉬지는 못하지만 소장(訴狀)을 가진 이는 장애될 근심 없어, 산업을 권면하고 농사를 처리하는 정치에 도움됨이 적지 않았다. 이에 잔을 들어 주인에게 축하하며 말하기를, ‘세상의 수령(守令) 가운데, 게으른 이는 남을 의지할 뿐 스스로 진작하지 못하니, 비록 관청이 퇴락해도 받치고 붙들어 그냥 세월만 보낼 뿐 손 하나 감히 놀리지 못하오. 그리고 강한 이는 그 지혜를 뽐내어 백성의 힘을 가벼이 동원하매 번거롭게 명령을 내리면서 영선(營繕)이 그치지 않으니, 많은 백성들이 매맞는 것처럼 고통스러워하오. 선생이 한 것은 이들과 같지 않으니, 여력(餘力)에서 나온 것이며, 옛것을 새로이 한 것이며, 어두운 것을 밝게 한 것으로 터럭만치도 백성을 수고시키지 않았고 재물을 소비하지 않았소. 그래서 비록 군청에 있으면서도 이 역사가 있은 줄 몰랐고, 지나가는 길손이 비와 이슬을 피할 수 있으며, 쉴 자리를 염려하지 않게 한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어진 사람의 행동이라 이르는 것이요. 아, 선생의 뒤를 이어 일을 하는 이가 선생을 모범으로 삼는다면 현명한 수령되기를 바랄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했다. ○ 옛 사람의 시(詩)에, “반마(班馬)로 오르니 억지로 스스로 넓히며, 잔춘(殘春)의 마음은 바로 근심의 실마릴세. 울 밑에서 잔을 드니 붉은꽃 싫도록 보고, 처마 아래에 발을 거니 푸른 산 받아들이네. 기다란 휘파람은 능히 원별(遠別)을 위로하고, 흩어진 놀이는 잠시 환관(環觀)을 다하네. 오천(烏川)의 풍경은 모두 시의 재료, 읊으면서 한가로움을 얻게 해주네.” 하였다.


성종 285권, 24년(1493 계축 / 명 홍치(弘治) 6년) 12월 24일(갑신) 4번째기사
덕천 군수 양관 등에게 한 자급을 더하다

이번 정사(政事)에서 덕천 군수(德川郡守) 양관(梁灌)·함양 군수(咸陽郡守) 김준손(金駿孫)·창녕 현감(昌寧縣監) 박한주(朴漢柱)·의흥 현감(義興縣監) 김수문(金秀文)·함안 군수(咸安郡守) 강백진(康伯珍)·금산 군수(錦山郡守) 이집(李緝)·익산 군수(益山郡守) 김호(金浩)·영암 군수(靈巖郡守) 강삼(姜參)·고부 군수(古阜郡守) 최한원(崔漢源)에게 모두 한 자급(資級)을 더하였는데, 본도(本道)의 관찰사(觀察使)가 염근(廉謹)하게 봉공(奉公)한다고 계문(啓聞)하였기 때문이었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양관(梁灌)은 무인(武人)으로서 용렬하고 비루하며 무능(無能)하였다. 그가 덕천(德川)에 있을 때 관사(官事)는 다스리지 아니하고 평소에 좌상(左相) 노사신(盧思愼)에게 아부하였는데, 노사신이 감사(監司) 이칙(李則)에게 서신(書信)을 보내어 칭찬[褒美]하기를, ‘부지런하고 공손하며, 청렴하고 검소하다.’ 하였으므로, 이칙이 이로써 칭찬하여 아뢰니, 이러한 상(賞)이 있었던 것이다. 청도 군수(淸道郡守) 정이교(鄭以僑)는 탐오(貪汚)함이 견줄 바 없었으므로, 그 어미가 이를 미워하였다. 집이 영천(永川)에 있었으므로 청도(淸道)와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병(病)이 났다고 정이교(鄭以僑)를 부르니, 정이교가 달려가서 보고 형제(兄弟)들이 와서 모였다. 그러나 어미는 실제로 병들지 아니하였다. 그 어미가 정이교에게 수죄(數罪)하기를, ‘너의 부친(父親)은 여러 고을의 수령(守令)이 되었으나, 청렴(淸廉)하다는 명망을 얻었는데, 이제 너는 겨우 일개 군수가 되어 큰 집을 짓고, 또 늙은 어미에게 맛있는 음식을 계속 보내며, 밤낮으로 처가(妻家)에 관물(官物)을 실어나르니, 네가 정종소(鄭從韶)의 아들이 되어 어찌 너의 부친을 욕되게 하느냐?’ 하며 판자를 잘라서 그 등을 수십 차례 때리고 집안 사람들에게 같이 밥을 먹지 말라고 일렀다. 이극균(李克均)이 감사가 되자, 하고(下考)27025) 에 두니, 사람들이 명쾌(明快)하게 여겼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5책 285권 17장 B면
【영인본】 12책 456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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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소(鄭從韶 ; 세종조∼성종조)의 자는 가정(可貞), 호는 정헌(靖軒),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아버지는 문예(文裔)며, 영천(永川)에서 태어났다. 1447년(세종 29) 봄에 문과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하여 성균관학록(成均館學錄)이 되고 같은해 가을에 또 문과 중시(重試)에서 을과 1인으로 급제하니 성삼문, 박팽년, 이개, 류성원(柳誠源)과 동방(同榜)으로 지기의 도교가 두터웠다. 이어 성균관과 집현전의 여러 직을 역임하고 이조좌랑을 거쳐서 친로(親老)로 인하여 향인의 외직(外職)을 청해서 의성현령에 재임 중 병자옥사를 듣고 병을 칭해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후에 조정에서 사간원좌헌납(司諫院左獻納) 등 여러 번의 제서(除書)가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다가 만년에 김종직의 권유로 영천군수(榮川郡守)에 나가 후에 예천군수 와 안동진관병마첨절사, 함양군수(咸陽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그 후 입조하여 봉상시부정(奉常寺副正)으로 경연(經筵)에 나가서 성종에게 경사(經史)를 강하였고 전라도진휼사(全羅道賑恤使), 종사관(從事官)으로 다녀와서 성균관사성으로 끝을 맺었다. 절의가 아니었다면 능히 경상(卿相)에 오를 문장과 덕행을 겸비한 사람으로 유림에서 상계(上啓)하여 숙모전(肅慕殿) 서무(西廡)에 배향되었다.

신의립(辛義立 ; 1565∼163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자방(子方), 호는 죽옥(竹屋). 할아버지는 중곤(仲坤)이고, 아버지는 진사 내옥(乃沃)이며,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로 충순위(忠順衛) 구수(龜壽)의 딸이다. 1603년(선조 3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충주교수(忠州敎授)가 되었다. 그 뒤 평안도사·북청판관을 거쳐 양산군수·풍기군수·호조정랑·함양군수·청도군수 등을 지냈다. 서장관으로 연경에 다녀온 뒤에는 1618년 (광해군 10) 공조참의를 지냈으며, 이어 형조참의·병조참의·김해부사·대구부사·철산부사를 거쳐서 1622년 동부승지로서 접반사를 겸하여 부호군이 되었다. 저서로는 ≪죽옥유집≫이 있다.

  이지화(李之華 ; 1588∼1666)의 자는 이실(而實), 호는 차포(茶圃), 또는 부강거사(浮江居士). 본관은 전의(예안) 全義(禮安). 이지영(李之英)의 동생으로 장현광, 서사원(徐思遠)의 문인이다. 1610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3년 문과에 합격. 예문관검열, 성균전적, 병조좌랑, 예조정랑, 사간원정언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정언으로 있을 때 권간(權奸) 이이첨(李爾瞻)을 공격하다가 해를 입어 낙향한 후 인조반정으로 다시 정계에 나아갔으며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장현광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주로 군향(軍餉)의 일을 맡아보았다. 그 후 형조좌랑, 호조정랑, 공조정랑, 예천군수(醴泉郡守)를 역임하고 병자호란 때에는 호서지방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 후 파주목사(坡州牧使), 김해부사(金海府使), 창원부사(昌原府使), 병조참의, 정주목사(定州牧使), 함양군수(咸陽郡守)에 임명된 후 1654(효종 5)년 영해부(寧海府)에 귀양되었다.

서명

현대어서명
청구기호
濯淸軒先生實紀
탁청헌선생실기
古 923.2511-G994t
본문

明宗 때의 文臣 郭趪(1530-1569)의 實記로‚ 2卷 1冊의 木版本이다. 후손 郭永甲이 遺文 및 관련기록을 모아 編輯하고 郭鍾錫(1846-1919)이 校正하여‚ 1900年(光武 4)에 刊行하였다. 곽황은 字가 景靜‚ 號가 濯淸軒이며‚ 本貫은 玄風이다. 1556年 別試에 登第 하여 禮曹佐郞을 거쳐 禮安縣監과 咸陽郡守를 지냈다. 예안현감으로 재직할 때에는 李滉(1501-1570)의 門下에서 從遊하며 善政을 베풀었고‚ 易東書院을 세우는 데도 기여하였다.卷1에는 遺文‚ <挽>(李滉)‚ <祭文>(李滉)‚ <家狀>(郭崇敬)‚ <行狀>(崔興璧)‚ <墓表>(郭希天)‚ <墓碣銘>(鄭宗魯)‚ <墓誌銘>(李晩寅) 및 奉安文‚ 常享文‚ 通文이 수록되어 있다. 遺文으로는 詩 1수(同諸公賦高枕遠江聲‚ 7율)와 書簡(答金惇敍) 2편이 실려 있으며‚ 遺詩 아래에는 金富倫 등 7인이 쓴 次韻詩가 附錄되어 있다. 書簡 2편은 모두 안부를 물은 데 대한 答禮의 글이다. 李滉은 곽황이 젊은 나이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挽>과 <祭文>을 쓸 정도로 그 재능을 아꼈으며 곽황이 咸陽으로 옮겨갈 때에는 贈別詩를 주었다고 하는데‚ 그 시는 <家狀>에 제 시되어 있다. 卷2에는 앞에 곽황이 受贈받은 詩 7수와 <易東書院記>‚ ≪苞山誌≫‚ ≪國朝榜目≫ 등 여러 문헌의 곽황과 관련된 기사를 抄錄한 ‘補遺’가 수록되어 있다. 本書를 통해 모범적인 牧民官으로서의 곽황의 생애뿐 아니라 李滉과 그 門人들의 문학과 활동양상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황재문)

 

2012년 판 강진군지 역대 강진현감 선생안 오류를 정정하다.

1. 13세 諱 彦讓(1531-158511.3) 선조님의 약력

1567년 대과 문과에 급제

1573년 성균관박사 겸 中學訓導者

1574년 사헌부 감찰

1579년(선조 12년 기묘) 봉열대부 능성현령역임(현 화순)

1579.07월  백성들이 영세불망비를 세움(현재 능주향교정문에 위치함)

효성이 지극하여 군수직을 사임하고 시묘살이 3년을 하심.

1582.07-1583.01 강진현령 역임(백성들이 선정비세움 - 분실됨).

1584년(선조 17년) 조산대부 함양군수 부임, 진주 진관병마동첨절제사 겸직

1585년(선조 18년) 함양군수 봉직 중 과로로 관사에서 순직.

1586년 함양군수시절 청덕과 선정을 베풀었기에 백성들이 이를 기리고자   청덕선정비를 세움 (현재 함양읍 상림공원에 위치함)

2. 강진군지 역대 현감 선생안 오류정정사실을  종보 제81호에 기사로 싣다.

능성(화순), 강진, 함양 등 3개군  군수로 봉직하고 떠난 고을 마다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선정비를 세워준 사례는 아마도 彦자 讓자 선조님이 유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우 드문 일 것입니다.

이처럼 훌륭하신 선조님이신데 2012년 판 강진군지 역대 강진현감선생안에서 누락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를 처음 발견한 서울 홍은동 정규는 발견 당일 바로 강진군에 오류정정요청 민원을 제기하였고, 국세청 전 부이사관 영규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한편 관련 고문서 수집에 나섰습니다.

영규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도움이 될 종친을 찾던 중 종일과 유진 등을 섭외하여 협조를 요청하였습니다.

광주남구문화원장인 종일은 고문서 2종을 찾아 복사본을 영규에게 보내주었고 영규는 이를 정규에게 전했습니다.

정규는 규장각과 서울중앙도서관 등을 통하여 고문서를 수집하였고 영규를 통해 종일이 보내준 고문 1종과 근대서적 1종을 포함하여 총 8종 서적에서 조선시대인 1491년부터 1800년대 말까지 271대에 걸친 강진현감 선생안을 재직 년대별로 모두 정리하여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총괄표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양성이씨세보 내 수록된 彦자 讓자 선조님 생애부분 복사본과 번역본(번역은 서울 방배동 25세 춘강 민성씨가 하신 것임),

대과 문과 급제 교지 사진,

조산대부 함양군수 교지 사진,

함양읍 상림공원내 역사인물공원 비석군에 세워진 이언양군수 청덕선정비 사진,

화순군 향교 정문에 세워진 이언양군수 영세불망비 사진,

등 정확한 사료를 증거로 제출하였습니다.

정규는 이러한 사료와 분석자료 등을 강진군에 제시하며 5차에 걸친 민원을 제기하는 동시에 영규에게 이 자료와 민원제기 및 답변 내용을 알리며 영규의 인맥을 통해 해결책을 마련하도록 부탁하였습니다.

영규는 이 사료와 분석자료를 유진서장에게 보내면서 분통함을 전하였고 만약 이렇게 명백한 사실을 강진군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면 변호사를 선임하고 법적절차를 밟아 반드시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전달하였습니다.

유진서장은 이 자료를 받아 검토한 다음 이를 근거로 관련기관에 억울한 사정이 없도록 고증을 철저히 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정규, 영규, 종일, 유진 등 종친들의 5개월간 힘겨운 노력으로 2012년 판 강진군지 역대 강진현감선생안 중 52대 현감란에서 누락되었던 李 彦자 讓자 현감을 바로 잡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정규가 이를 대종회에 보고하였고(아래 경과보고 참조)

대종회에서는 양성이씨종보 제81호에 기사로 실어 칭찬해주셨습니다.

이에 대 양성인의 한 사람으로서

무궁한 자부심을 느끼며

경환 대종회회장님과

택범 사업부회장님

영직 사무국장님 등

집행부 모든 분들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대 양성이씨 위상제고를 위해 불철주야 노고가 많으신

대종회 임직원을 비롯한 모든 양성인은

앞으로도 대 양성인의 발전을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이라 믿습니다.


*** 첨부화일 : 고문서 등 8종 서적의 역대 강진현감 선생안 분석 정리표

2013. 01. 28.


24세 이정규 배상 (011-253-4240)


장수 이씨

장수(長水)는 전라북도에 있는 지명이다. 장수이씨는 이알평(李謁平)의 52세손이며, 고려 충선왕 때 정승으로 장천부원군에 봉해진 이임간(李林幹)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손자 이을진(李乙珍)이 공민왕 때 정승을 지냈고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助功臣)에 책록되어 장천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장천의 훗날 지명인 장수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이종무(李從武)는 정종 때 상장군으로 제2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좌명공신이 되었고 세종 때 삼군도체찰사로 대마도를 정벌하여 보국숭록대부와 의정부좌찬성에 올랐으며, 장천부원군에 봉해졌다. 선조 때 이희급(李希伋)은 함양현감을 지내던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싸워 적을 격퇴한 공으로 선무이등공신이 되었다. 그 외에 화가 이중섭(李仲燮)도 장수이씨의 후손이다.

http://www.ugyo.net/cf/frm/ykFrm.jsp?CODE1=01&CODE2=03&B_SUJI_ID=KSAC_M_A00600027&B_BOOK_ID=KSAC_T_A00600027_001&B_KWON_ID=002&B_STYLE_ID=003&B_KISA_ID=00001&SHKW

정경달

  • 한자
  • 분야
  • 유형
  • 시대
  • 성격
  • 성별
  • 생년
  • 몰년
  • 본관
  • 관련사건
  • 대표관직(경력)
  • 집필자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광(靈光). 자는 이회(而晦), 호는 반곡(盤谷). 아버지는 몽응(夢鷹)이다.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산군수로서 의병을 모으고 관찰사 김성일(金誠一), 병마절도사 조대곤(曺大坤)과 함께 기략(奇略)을 써서 적을 금오산(金烏山) 아래에서 대파하였다.

1594년에는 당시 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계청(啓請)으로 그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이때 세운 전공이 책록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하였다.

한때 이순신원균(元均)의 모함으로 투옥되었을 때 조정에 나아가 왕에게 “이순신의 애국심과 적을 방어하는 재주는 일찍이 그 예를 찾을 수 없습니다. 전쟁에 나가 싸움을 미루는 것은 병가의 승책(勝策)인데 어찌 적세를 살피고 싸움을 주저한다 하여 죄로 돌릴 수 있겠습니까? 왕께서 이 사람을 죽이면 나라가 망하겠으니 어찌하겠습니까?” 하고 이순신의 석방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 『임진장초(壬辰狀草)』

 


낭옹일고 (浪翁逸稿)

祖考通訓大夫行豊基郡守府君行年記 7

저자의 조부인 泰村 高尙顔(1553∼1623)의 일대기를 연보 형식으로 정리한 글로, 㰡”태촌집㰡•에도 수록되어 있다.

◦1601년(49세, 선조 35) 知禮縣監이 되어 민폐를 없애고 학교를 일으키고 농업을 권장함.
◦1602년(50세, 선조 36) 咸陽郡守가 되어 任所에서 죽은 悠然堂 金大賢의 상례를 주선함.
◦1603년(51세, 선조 37) 함양 고을의 노인들을 모아 양로연을 베풂.
◦1604년(52세, 선조 38) 藥圃 鄭琢의 장례에 참석함.
◦1606년(54세, 선조 40) 蔚山判官에 제수됨.


유순무柳舜懋 1605선조38년 을사 2월 6일 무관 출신 부임, 3월 3일 고대 정경운 등 향회에서 이미 별세한 전 함양군수 이희급李希伋의 청덕추모비 문안 논의.


이성길 <무이구곡도>

이성길. 무이구곡도. 1592년, 견본수묵담채, 33.6 x 40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성길(1562 ~ ?)이 31세에 그린 그림이다. 그는 문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진중에서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무이구곡도가>는 중국 푸젠성(福建省) 무이산(武夷山) 계곡의 아홉 구비[九曲] 경치를 읊은 것이다. 무이산은 푸젠성의 제일 명산으로 36개의 봉우리와 99개의 동굴이 있는 경치 좋은 곳이다. 약 8㎞의 계곡에 아홉 구비의 이름을 각각 가지고 있다(眞洞·玉女峯·仙機巖·金鷄巖·鐵笛亭·仙掌峯·石唐寺·鼓樓巖·新村市).

남송(南宋) 때 성리학의 대가 주희(朱熹)는 1183년 무이구곡 제5곡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무이정사잡영 武夷精舍雜詠>을 썼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184년 <무이구곡도가>를 썼다. <무이구곡도가>는 첫 수를 제하고는 무이구곡의 산과 물의 경치를 묘사하고 있다. 자연 묘사가 주가 되나 도학(道學 : 朱子學·性理學)을 공부하는 단계적 과정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말 성리학이 들어왔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와서야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에 의하여 주자의 사상과 작품들이 완전히 소화·흡수된다. 그 뒤 이 <무이구곡도>는 조선조 성리학자 사이에 주자학을 실물을 통해서 보다 가깝게 접하게 하는 기능을 하였다.

<무이구곡도>가 언제 어떤 형태로 우리 나라에 전래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현존하는 작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592년(선조 25년) 이성길(李成吉)이 그린 <무이구곡도>로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은 이황이나 이이 당시의 <무이구곡도>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 그 이전에 중국에서 건너온 초기의 <무이구곡도>는 조형상 대상 묘사가 더 사실적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것은 이 무이구곡도를 실제 무이 계곡의 사진과 비교해 보면 상당히 비슷해서 이 그림의 주제인 무이구곡을 아주 세밀히 그렸던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15세기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와도 회화 기법의 양식상 상당히 비슷하여 조선 전기 산수화 양식사 연구에도 도움이 된다.

이러한 <무이구곡도>는 그 뒤 이이가 지은 <고산구곡가>를 통해서 중국적인 운()을 따르는 시작법(試作法)이나 묘사 대상인 자연에 대한 우리 나라 시인·화가들의 태도를 바꾸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정철(鄭澈)의 <관동별곡>과 같이 우리의 글을 한자와 섞어 쓰는 자연 묘사 시가의 영향도 있었다. 하지만 이이와 정철 때에 와서 우리 가사 문학에서 일어난 시대적 경향이었다. 여기에 성리학의 자연에 대한 치밀한 묘사 서술 태도가 시와 그림을 통해서 직접·간접으로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무이구곡도>라는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畫)가 그려지게 된 동기는 주희의 <무이구곡도가>에 있다. 이것이 언젠가 우리 나라에 들어와 그 뒤 조선조 성리학의 특수한 발전과 함께 주희의 <무이구곡도가>나 <무이구곡도>를 그냥 답습하는 학파와 이를 우리 산천에 근거하여 변형, 발전시킨 다른 학파가 나와 우리 회화사 발전에 구체적으로 작용하였다. 오늘날에도 구곡도가나 구곡도를 그린 화첩(畫帖), 두루마리 또는 병풍 등이 항간에 상당히 유전되고 있다.


디지털포천문화대전 http://pocheon.grandculture.net/Contents?local=pocheon&dataType=01&contents_id=GC05001037

한자 李成吉

이칭/별칭 덕재(德哉), 창주(滄洲)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명산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전병무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62년 - 이성길 출생

몰년 시기/일시 1621년 - 이성길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0년 - 이성길 신도비 건립

묘소|단소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명산리  

신도비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명산리  

성격 문신|화가

성별 남

본관 고성(固城)  

대표 관직 병조 참판

[정의]

경기도 포천지역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이자 화가.

[가계]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덕재(德哉), 호는 창주(滄洲). 아버지는 참봉 이정려(李精瓈)이다.

[활동 사항]

이성길(李成吉)[1512~1621]은 성품이 호방하여 세상에 구애됨이 없었다. 17세에 출입을 삼가고 독서에 열중하여 경사(經史)에 통독하였다.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장원하여 진사가 되고, 이어 증광 문과에 병과 15위로 급제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도대장 이양원(李陽元)의 종사관이 되었다가 한양에서 철수하게 되자 아버지와 함께 관북(關北)으로 갔다. 경성에 이르러 당시 북평사 정문부(鄭文孚)가 의병을 일으키자 적극 동참하였다. 경성과 회령 일대에서 반란군 국경인(鞠景仁) 등을 처단하고 왜적을 무찔렀다. 다시 명천과 길주에서 왜적을 공격하여 격파하였고, 12월에는 임명(臨溟)과 쌍포(雙浦)에서 싸워 대승하였다. 다음 해 종성으로 쳐들어온 여진족을 물리치고 단천에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군대를 철퇴시켜 관북을 탈환하니, 이른바 ‘북관 대첩(北關大捷)’이 바로 이것이다. 이 전공으로 수성도 찰방에 제수되었다.

1594년(선조 27) 병조좌랑에 임명되었고, 1596년(선조 29) 북청 판관에 전임되었다가 함흥 판관이 되었다. 1597년(선조 30) 병으로 관직을 사임하였다. 다시 1601년(선조 34) 사복시 첨정, 여산 군수가 되었고, 1602년(선조 35) 형조정랑이 되어 암행어사로 함경도를 순회하였다. 1603년(선조 36) 왕명으로 문무관을 모아 놓고 친시(親試)를 보았는데, 수석을 하여 말 한 필을 하사 받았다. 그해 6월 양산 군수로 나아갔다. 이후 합천 군수와 덕원 부사를 거쳐 1607년(선조 40) 성균관 전적으로 중앙에 복귀하였다. 1609년(광해군 1) 호조정랑을 지냈고, 1611년(광해군 3) 판결사가 되었으며, 1613년(광해군 5) 동지사로 중국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1615년 함양군수, 이후 훈련 도정, 분조(分朝)의 병조참의,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621년(광해군 13)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오다가 금교역에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그림에도 재능이 있어 임진왜란 당시 쌍포에서 싸워 대승한 것을 화폭에 그린 「쌍포 승첩도(雙浦勝捷圖)」가 전한다. 진중에서 그린 「무이 구곡 도권(武夷九曲圖券)」도 전하는데, ‘무이 구곡’이란 중국의 복건성과 강서성 경계에 높이 1300m 되는 무이산을 중심으로 무이 산맥이 형성되어 곳곳에 명승지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아홉 구비가 뛰어나다고 하여 유래한 이름이다. 성리학의 원조 송나라 주자(朱子)도 천하 절경인 이곳 계곡에 운곡 서원(雲谷書院)을 세우고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강론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화가가 이 무이 구곡을 주요 소재로 다루었다. 이성길의 「무이 구곡 도권」은 필치가 정교하고 섬세하면서도 활력이 넘쳐서 선경(仙境)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다는 평가를 받는 명작이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명산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80년 후손들이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명산리에 신도비를 세웠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포천문화원 인물소개  http://www.pcmh.or.kr/html/11_7_26.html

이성길(李成吉) 1561(명종16)~1620(광해12)

 

 
자는 덕재(德哉), 호는 창주(滄州), 본관은 고성, 참봉 정려의 자이다.
1589년(선조22)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어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좌랑에 이르렀다.

-이성길선생 신도비-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도대장 이양원(李陽元)장군의 종사관이 되었다가 서울에서 철수하게 되자 부친과 함께 관북(關北)으로 갔다 경성(鏡城)에 이르러 북평사 정문부(北評事 鄭文孚)를 따라 의병을 일으켜 광주성(光州城)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국경인(鞠景仁)등 반역자를 처단했다. 다시 명천(明川)과 길주(吉州)에서 적을 만나 격파하고 12월에 임명(臨溟)과 쌍포(雙浦)에서 왜적과 싸워 대승하였다. 이 전투에서 전승한 것을 화폭에 그렸는데 이것이 쌍포승첩도(雙浦勝捷圖)인데 지금도 전한다.
다음해 종성(鍾城)으로 쳐들어 온 여진족을 물리치고 단천(端川)에서 가등청정(加藤淸正)의 군대를 철퇴시켜 관북이 평온하게 되었다.
1594년(선조27) 병조좌랑에 임명되었고, 1596년(선조29) 북청판관(北靑判官)에 전임되었다가 함흥판관(咸興判官)이 되었다.
1597년(선조30) 병으로 관직(官職)을 사임하였다. 1601년(선조34) 여산군수가 되고 1606년(선조39)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가 이듬해 형조정랑이 되어 암행어사로 함경도에 파견되었다.
1608년(선조41) 4월 왕명으로 문무관을 모아 놓고 친시(親試)를 보았는데 수석을 하여 말 한필을 하사 받았다. 동년 6월에 양산군수로 나갔다.
1611년(광해3) 판결사(判決事)가 되고 1616년(광해8) 동지사로 중국에 다녀와서 훈련도정(訓練都正)이 되었으며 이어서 호조참의가 되었다가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1621년(광해13)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오다가 금교역(金郊驛)에서 순직(殉職)하니 향년 60세였다.
그림에도 재능이 있어 진중에서 그린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가 전한다.
묘는 군내면 명산리에 있고 1980년 비를 세웠는데 노산 이은상이 글을 짓고 일중 김충현이 썼다.
다음은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 해설이다.
【무이구곡이란 중국 복건성 강서성 경계에 해발 1300m가 되는 무이산이 있는데 이 산을 중심으로 북동에서 남서로 뻗쳐 무이산맥을 형성하고 있다. 이 산중에는 명승지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아홉구비가 특출하여 무이구곡이라 불리운다. 성리학의 원조 송나라 주자도 천하 절경 이곳에 강학의 문곡 서원을 세우고 학문을 강론하였다.
문무를 겸비한 창주공은 그림에도 능하여 임진왜란 때 진중에서 무이구곡도를 그리었는데 그 필치의 정교하고 섬세함과 활력이 넘치는 운필은 선경(仙境)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은 명화이다.
이 그림은 문화재 2216호로 지정되어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광해군일기 63권, 5년(1613 계축 / 명 만력(萬曆) 41년) 2월 30일(무오) 1번째기사
동지사 조존성 등이 황제 칙서를 가지고 돌아오다
동지사 조존성(趙存性)·이성길(李成吉) 등이 연경에서 황제 칙서를 가지고 돌아오자, 왕이 모화관에 나아가 맞이하였다.
광해 66권, 5년(1613 계축 / 명 만력(萬曆) 41년) 5월 15일(임신) 5번째기사
양사 장관이 책임을 수행치 못한 동지사 조존성 등의 파직을 청하다
탑전에서 양사 장관이 아뢰기를,

“지난 해 동지사(冬至使)의 문견 사건(聞見事件)을 보건대, 그 속에 중국 조정의 상공(相公)이 시를 지어 주면서 엄만(嚴萬)에 대한 일을 말했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정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사신의 입장에서는 정문(呈文)하여 이를 해명했어야 마땅한데도 멍청하게 살피지 못한 채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왔으니, 이는 전대(專對)해야 할 책임을 수행치 못한 것으로서 지극히 잘못한 것입니다. 동지사 조존성(趙存性)·이성길(李成吉)과 서장관 권진기(權盡己) 모두에게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따랐다.【시의 내용을 보면 엄만이 우리 나라로부터 뇌물을 받고 조사를 공평하게 하지 않은 것을 비난한 것이었는데, 그 가운데 “동방에 준 오동잎 결국 현실화되었는데, 율무는 예로부터 한나라 신하 그르쳤네665) [東方桐葉竟成眞薏苡從來誤漢臣]”란 귀절이 있었다. 】

   府使李侯得駿淸德善政碑(부사 이후 득준 청덕 선정비

   謹按萬歷乙卯 李公諱成吉 來守是郡 最著聲績 今侯以公之六代孫

   亦莅玆土 愛民淸德 紹修先烈 爲永世遺愛之蹟 侯之世德 猗歟盛哉

   이득준 부사는 그의 6대조 이성길 공이 광해 7년(1615)에 함양군수로 와서 공적을 남겼는데 그 후손으로 부임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사욕이 없어 선대를 이어 업적을 쌓았기에 이를 기리기 위해 정조 12년(1788)비를 세웠다.

    歲戊申三月 日建(正祖十二年一七八八年)

   광해 120권, 9년(1617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10월 16일(정미) 4번째기사
   정광경·이명한·이성길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광경(鄭廣敬)을 응교로, 이명한(李明漢)을 공조 좌랑으로, 〈겸춘추관 기사관 이성길(李成吉)을 분병조 참의(分兵曹參議)로〉 삼았다.

   광해 121권, 9년(1617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11월 25일(병술) 10번째기사
   폐비 문제에 대한 상소를 의정부에서 논의하다

분병조 참판 이성길(李成吉)은 의논드리기를,

“전후로 올린 유생들의 항의하는 상소는 종묘 사직을 위한 대계(大計)가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재야 선비들의 충언을 받아들이고 온 나라의 공정한 논의를 따라 속히 묘당의 대신들, 그리고 훈척인 재상들과 함께 자세히 토론해서 서둘러 대의(大義)를 결정하소서.”


 


●이지화(李之華) 1588(선조 21) ∼ 1666(현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이실(而實), 호는 다포(茶圃)·부강거사(浮江居士)·동계
(東溪). 대구출신. 경두(慶斗)의 손자로, 현감 종문(宗文)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전경창(全慶昌)의 
딸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1610년(광해군 2)사마시에 합격하고, 1613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설서·검열·대교를 역임하고 
1621년에 정언으로 있을 때 이이첨(李爾瞻)을 탄핵하다가 파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다시 등용되어 예천군수가 되고, 계속하여 정주·김해·창원·파주의 목사
를 지냈다.
그뒤 병조참의·예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장현광의 막하에서 군
량의 조달에 힘썼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의병을 지휘하여 왕을 호종(扈從)하기도 하였다.
1654년(효종 5) 함양군수로 있다가 안렴사(按廉使)의 배척을 받고 영해에 유배되었다가 풀린 뒤로는 
벼슬을 하지 않고 다산(茶山)에 머물며 한적하게 지냈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淸選考, 全城世稿, 大東野乘


오명열

  • 한자
  • 분야
  • 유형
  • 시대
  • 성격
  • 성별
  • 생년
  • 몰년
  • 본관
  • 대표관직(경력)
  • 집필자

1621(광해군 13)∼1698(숙종 2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용여(用汝), 호는 조은(釣隱). 극인(克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璜)이고,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郎) 치순(致舜)이며, 어머니는 정척(鄭惕)의 딸이다.

1657년(효종 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후 오수찰방(獒樹察訪)·감찰·예조정랑·강진현감(康津縣監)·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부안현감·봉상시부정자(奉常寺副正字)·함양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영광의 예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와 ‘임계조은(臨溪釣隱)’이라 자호(自號)하였다. 은퇴한 뒤에도 조정에서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성품은 곧고 담론을 좋아하였다.


아버지 時彦(시언) 증호조참의, 생부 時冕(시면) 충의위
동생-遇周, 隣周, 後周, 曼周
 
 姜弼周(강필주)◇○<박사공 16세/11-135><문량공(휘 희맹)…통정공파>

  1621∼1682 자는 대로(大老), 호는 송암(松菴). 영광에 살았으며 부모님 생전인 1648년(인조 26) 무자식년 사마시 생원(生員) 3등에 입격, 1656(효종 7) 병신별시(丙申別試) 이민적(李敏迪)방에 급제하여 시강원 필선(侍講院 弼善), 1666년(현종 7) 7월 승문원 박사를 지냈다. 1675년(숙종 1) 4월 보령현감(保寧縣監)으로 있으면서 청백하다 하여 상을 받았으나 정사(精舍)를 짓다가 다음해 탄핵을 받았고 1680년(숙종 6) 특별히 함양현감을 제수 받았다.<왕조실록 36집 524면∼38집 323면> [저서] 송암집(松菴集)
 
배위 의인 원주 邊氏(변씨), 1618년 11월 11일∼1665년 3월 13일 별세, 아버지는 승훈랑 泰胤(태윤), 조부는 참판 겸 제학 망암 以中(이중), 증조부는 승지 澤(택), 외조부는 승훈랑 함양 朴侃(박간)
 
묘 전북 고창군 성송면 갈산 뒤기슭 유좌, 비가 있다 
  
아들 敏著(민저) 증사복시정, 萬著(만저), 重著(중저)
  
사위 李翊(이익) 전의인, 柳宗漢(유종한) 


 


松坡集(奎6328), 李海昌(朝鮮)著. 7卷 2冊 木板本 28×19.2cm. 四周雙邊 半郭:18.8×14.2cm. 有界 10行 20字 注雙行. 版心:上下花紋魚尾. 李海昌(1599∼1651)의 詩文集.1715년(肅宗 41) 손자 必相 必重이 간행하였다. 李海昌의 字는 季夏, 號는 松坡, 本貫은 韓山이고 仁後의 아들이다. 任叔英의 문인으로 1624년(仁祖 2)進士에, 1630년 式年文科에 급제, 檢閱, 正言을 거쳐 1638년 持平으로 金尙憲을 伸救하다가 盈德에 유배당했다. 1644년 副修撰에 복직되어 吏曹正郞, 春秋館 編修官, 應敎, 侍讀官, 司諫 等을 역임하였다. 西河 任相元이 序를, 完山 崔錫鼎이 跋 을 썼으며 附錄은 없다. {권1}:詩와 賦를 제외한 文으로 責愁文, 告楓谷神文, 祈雨告 龍神文, 秋日遊海門序, 重逢錄序등 序 14편, 秋日愚谷鄕飮記, 盧士俊墓碣銘 등 7편, 京畿監司 金南重, 金光煌, 平安監司 鄭維城, 咸境監司 李厚源 等에 보낸 敎書 4수, 左議政李時白不允批答, 擬漢罷輪臺詔, 賀誕日箋 등 箋 3수, 金尙憲을 논박한 朴啓榮, 柳碩 등을 削職시키자고 한 論柳朴兩臺啓, 親病乞遞館職疏, 溺響箴 등이 수록되었다. { 권2}부터 {권7}까지는 모두 詩로 {권2}:五言絶句 3수, 七言絶句 23수, {권3}:五言律詩 32수, {권4}; 七言律詩 126수, {권5}:五言排律 4수, 七言排律 3수, {권6}:五言古詩 13 수, {권7}:七言古詩 31수 및 賦 3수가 수록되었다.

국동마을 유래(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국동리와 공주시탄천면국동리는 정무목사가 작명한 마을 이름이다)
정무(鄭堥): 숙 ‧ 영조때 인물(신사생, 1641~1705.1.29, 64세)님이 일대기에서 국동마을을 만들어 갔다.
본은 연일(延日), 자는 이실(而實), 통덕랑 증(좌승지)의 정석기의 아버지와 남원양씨 어머니사이의 3남(정규, 정중)2녀 중 3남으로 29세에 생원 진사시(헌종10년, 1689, 기유 식년시 생원 2등, 3위)합격, 이후 운봉현감(1677~1680), 화순현감 , 함양현감, 남원부사, 강화군수, 화양경역지, 공주목사(정삼품)를 거쳐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6명으로 첫째부인은 함양박씨(임오생, 1642~1680년11월 14일 졸수, 39세)는 1남하신(1669~1690 22세 졸)과 2녀를 두었다. 둘째부인은 칠원윤씨(신유생, 1661~1683년 1월14일, 23세졸)는 1남 하현(1679~1705년 31세 졸수)을 두었다.
셋째부인은 풍천노씨(병오생, 1666~1705년 6월30에 졸수 40세)는 1남 정하언과 1녀를 두었다. 넷째부인은 전의 이씨로 1남 하성을 두었으며 다섯째부인은 안동김씨로 1남 하철을 두었다. 여섯째부인은 대구서씨로 1남 하경과 1녀을 두었다. 부인을 6명이나 둔 것은 단명하는 관계로 이루어졌으며 자녀도 6남 4녀를 두었다.
관직에 근무 시에는 선민정치(화순현감시절 , 신유년 10월에 부임하여 병인년 8월까지 재임)를 하였다. 이를 기리기위해 전남 화순군 동면 운동리 신운동에 선민정치마애비가 있다. 비문에 ‘和順縣監위 鄭堥愛民善政“(갑자년 정월에 세웠으며 갑신년 10월에 다시 만들었다.) 이 기록 되었다. 그리고 기오헌(寄傲軒):도 현감 정무 님이 건립하였으나 경오(庚午:1630)년에 헐려 없어졌다. 정무공은 1684년1월부터 1686년 8월까지 전남화순군 동면 운봉3리(국동마을)에서 재직하였다.   정무께서는 선민정치를 하시여 마애비가지 주민들이 1684년 1월에 세웠는데 퇴색이 되어 1704년에 다시 만들어 세웠다.
그리하여 함양군수, 남원부사를 거쳐 공주목사로 부임하여 공주 목사로 재직하면서 자기묘를 탄천면국동리에 잡고 동래이름도  전남 화순군 동면 운동리국동마을 고대로 벤치마킹하여 국동(菊洞)마을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함양군수재임시 영세불망비를 <郡守鄭侯堥永世不忘碑> 는 조선후기 정무 군수의 치적을 잊지 않고 기리기 위해서 숙종 27년(1701) 3월에 영세불망비를 세웠다.( 康熙四十年三月 日建(肅宗二七年 一七0一年)  정무공은 선민정치를 공주목사를 끝으로 관직을 끝내면서 공주일대에서 풍수에 제일 빼어난 지역인 충남 공주시 탄천면 국동리 원 국동에 치표를 하며 풍수고을 국동 잠들고계시다. 그리고 그곳 원국동에 후손들의 삶에 터전을 정하여 거주토록 하였다.
참고: 연일정씨 판결사공파 문헌록, 지당집, 오성지, 사마방목,

 

영조 15년 8월 11일 (을유) 원본895책/탈초본49책 (2/33)
1739년 乾隆(淸/高宗) 4년

<검객설생전(劒客薛生傳)> 연구(硏究) - <검객기문(劒客記聞)>과의 대비를 중심으로 -

저자명안순태문서유형학술논문학술지국문학연구 29권 시작쪽수 92p, 전체쪽수 29p 1598-2076 권호별 논문보기 발행정보국문학회 |2014년

초록본고는 南周獻(1769~1821)의 <劒客薛生傳>이 兪漢雋(1732~1811)의 <劒客記聞>을 개작한 양상에 대해 고찰하고 조선후기 劍俠傳형성의 맥 락에서 이 작품이 지니는 특징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兪漢雋의 <劒 客記聞>은 주인공이 어려서 도적에게 부친을 잃고 검술을 연마하여 부친 의 원수를 대신 갚아 준 지방관에게 은혜를 갚는다는 내용이다. 南周獻은 兪漢雋보다 한 세대 뒤의 인물로 유한준과 교유한 사실도 확인되어 유한준 의 문집과 거기 수록된 <검객기문>을 접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유한준 의 <劒客記聞>을 개작하여 <劒客薛生傳>을 지었는데, 이 작품은 유한준 의 작품 가운데 주인공이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삽화를 빼고 나머지 삽화들 로 재구성한 후 논찬을 덧붙인 것이다. 삽화의 改削을 통해 전체 이야기를 계기적으로 서술하여 작품의 완결성이 높이고 있으며 세부 서술에서 소설 적 형상화를 추가하여 작품의 흥미성을 높이고 있다. 또 논찬을 추가하여 작품의 통일성 제고에도 기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劍俠이 출현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이다. 18~19세기에 들어 서 劍俠에 관한 傳등 검협 관련 한문단편이 다수 등장하는데 이는 전란 이 후 검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검협과 관련한 이야 기가 민간에 전하게 되고, 작자들이 그 이야기를 채택해 傳등으로 창작하 는 일이 잦아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劍術의 전통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우리나라는 임진왜란 때 倭劍術의 능란함에 충격을 받고 국가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검술을 익히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劍士의 수가 늘고 민간에 검객과 관련한 이야기가 다양하게 전하게 되었는데 문사들은 민간의 검객· 검협 관련 이야기를 취해 검협전을 짓게 된다. <劍僧傳>·<劍女>·<保寧 少年事>·<劍客記聞>·<五臺劍俠傳>, 그리고 유한준의 <劒客記聞>과 남 주헌의 <劒客薛生傳>은 모두 이러한 배경에서 출현한 것이다. 유한준의 <劒客記聞>이 傳聞한 내용을 크게 수정하지 않는 선에서 기록한 것이라 면 남주헌의 <劒客薛生傳>은 작품의 완결성을 고려하고 소설적 형상화를 더하여 완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조선후기 검협전은 임진왜란의 경험, 劍士의 수 증가, 그와 관련한 민간의 검협 관련 설화가 그 주요한 형성 배 경이 되고 있으며, 남주헌의 <검객설생전>은 조선후기 검협전이 형성되게 된 여러 배경을 특징적으로 잘 보여주면서도 작품의 완결성 측면에서 높은 성취를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 下直, 濟州牧使趙東漸, 長城府使李時鼎, 錦山郡守尹審, 咸陽縣監吳命厚, 安義僉使高萬世, 乶下僉使沈德一


이 시대 공무원들이 본 받아야 할 이조 정조대왕 때

청백리 함양부사 이득준 공의 아름다운 이야기.....    http://blog.daum.net/lgm3290/4

이득준공은 이조정조때 벼슬을 지낸 청백리로 이름이 나 있으며 그 분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현대를 사는 모든 이들에게 영원한 귀감이 되고 있다.

첫 번째 이야기 :

성대중이 지은 청성잡기에 수록되어있는 이야기인데, 이득준 공이 강진현감(1771.02.17.

~1772.8)으로 첫 부임을 했을 때, 지방 세금으로 받아 창고에 모아둔 쌀을 배에 싣고 중앙인 한양(지금의 한강어구)으로 이송하는데 배가 떠나기 전 뱃사공들이 쌀 60석을 관아에 바치면서 눈감아 달라고 하였다. 이득준공이 이상히 여겨 이게 무슨짓 인가 하고 물으니 사공들 말이 운반도중 배에서 먹을 양식은 강진관아에 뇌물로 바치고 세금으로 바칠 쌀은 배에서 양식으로 축을 내니 결국 한양에 도착하면 죄를 피할 수 없어 차라리 도착 전 고의적으로 배를 망가트려 풍랑 때문에 배가 빠졌다고 하면 죄를 면 할 수 있어 이렇게 합니다하니 이득준공이 즉각 받기를 거절하고 앞으로 관아는 물론 하위직 아전들에게도 일체 주지말라고 엄명하면서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배불리 먹이고 안전하게 운반 할 것을 지시하니 뱃사공들이 손뼉을 치면서 감읍하여 대답하기를 물건 싣는 것을 감독하는 관원이 귀공과 같다면 어찌 배를 일부러 바다에 버리는 일이 있겠습니까. 지금 이렇게 배를 운항하면 무사히 돌아 올 것이 틀림없습니다하였다.

두 번째 이야기 :

정조대왕과 함께 개혁에 앞장섰던 정약용공의 목민심서에 기록된 이득준공의 창조정신 이야기입니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이득준공이 젊어서 강진현감으로 근무하였는데 현감관저 안 뜰에 직접 노비들과 함께 채소를 가꾸어 노비가 바쳐야 할 만큼의 양을 모두 덜어주고도 먹고 남아 측근들에 나누어 주었다.” 사계절 채소를 가꾸니 기름지고 무성해져 이웃에까지 나누어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점잖만 빼고 권위적이던 시대에 이런 인품을 갖춘 관리가 있었으니 요즘 말하는 창조정신을 관리로서 몸소 실천 한 분이겠지요.

세 번째 이야기:

이득준공이 벼슬이 높아져 함양도호부사(1786.4~1787.6)로 근무를 한 바가 있습니다. 이 보다 약 180년 전 이득준공의 6대조 할아버지인 이성길공(문인/화가 대표작 무이구곡도, 현재 국립박물관에 보존)이 젊은 시절 함양군수로 재직한 바 있어, 두 대에 걸쳐 함양 백성들을 위해 열심히 노력 한 바 귀감이 되므로 함양백성들이 부사 李侯得駿淸德 善政碑(이후득준청덕 선정비)”라는 선정비석을 세워 지금도 경상남도 함양군 상림공원 역사비림지역에 세워져 있어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네 번째 이야기

이득준공이 함양부사직에서 선천도호부사로 이임한지 1년이 지나서, 함양에 사는 전 병조참지(국방부서기관) 박효삼이라는 사람이 정조대왕에게 상소하기를 거창,함양,안의,산청,삼가 등 이웃고을 5개 지역을 비롯한 경상도지역의 많은 고을의 수령들이 세금으로 받은 곡식들을 탕진하고 탐혹한 정책을 펴서 백성들이 고생을 하고 있으니 벌을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이조실록에 기초한 박효삼과 정조대왕의 대화 내용과 중신회의결과를 계재 합니다.

박효삼이 정조대왕께 부사원택진과 부사 이득준을 벌을 주라고 상소.

정조대왕 왈 어려운 시기에 너의 상소는 대단히 가상하다고 격려, 만일 사실이 라면 "팽아의 형전을 이럴때 써야지 어데다 쓰겠는가?"라고 답신.

정조대왕 왈 이 건에 대해 당시의 관찰사와 어사를 불러 하문하니 오히려 그 지방에 있던 수령들이 법을 무서워하고 고을을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하답.

정조대왕 왈 상기 두 의견이 상이하여 어사 최현중을 파견하여 보고를 들으니 원택진과 이득준은 폭정을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음.

문무협의최고관청인 비변사에서 정조대왕에게 보고하기를 전국적으로 도·량·형으로 인한  폐단 이 같은데 어데를 지정해서 벌을 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박효삼의 상소를 그대로 시행해서는 안된다고 보고.

정조대왕이 어전회의를 열어 상기 수령들에 대한 건을 논의하니 좌의정 채제공 을 비롯한 신하들이 이들에게 벌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 이유는 :

첫째 어사 최현중의 보고는 직접 조사한 것이 아니고 들은 것만을 보고 한 것으 로 실제로 정식 조사를 해야하고,

둘째 옛날 고려시대 이전부터 내려오던 곡식을 되는 말()의 기준이 없어 각 고 을마다 달라서 문제가 되고,

셋째 마르지 않은 낱곡식을 가을 추수에 바로 세금으로 받아서 창고에 겨울 내 쌓아 두었다가 봄에 바짝 마른 것을 백성들에게 빌려주는데 습기가 말 라서 자연히 그 양이 줄게 되어 차이가 나는데 그 격차가 심하여 각 수령 들의 능력 및 책임의 한계를 넘는 것으로서 국가 시책을 근본으로 고쳐야만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넷째 환곡을 사용한 것이 공적 또는 사적으로 사용했는지를 면밀히 조사하여 처 벌해야 한다고 진언.

정조대왕 왈 그러면 이 일은 좌의정과 우의정이 의논하여 척결하라 하였다. 

정조대왕의 정치일기인 일성록에 의하면 정조13(1789) 42(무자) 熙政堂(희정당)에서 대신/비변사/전 경상우도감사/소분 병조참지 박효삼(상소인)/입직승지 등과 함께 일상적인 정사를 하는 자리에서 박효삼의 상소내용에 대해 친히 물으면서 임금이 직접 조사하였다. 이 결과 박효삼이 제가 잘못알고 상소했습니다.”라고 사죄하니 정조 왈 늙은 몸으로 먼곳까지 와서 상소를 하였으니 그 뜻이 가상하다 하였다.

그 후도 형벌을 받았다는 사실의 기록이 없습니다.

만일 처벌을 받았다면 그렇게 큰 죄를 지었는데 계제직으로 승차시키고 계속 벼슬을 주었겠습니까? 이 또한 이조실록에 기록되었겠지요.

위 사실은 이조실록 정조대왕편에 들어가서 이득준을 치시면 7번의 기록이 있는데 그 중 맨 마지막 실록에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웅 이순신 장군도 전쟁중도에 간신들의 상소에는 역적의 괴수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후에 임금이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결과 사실이 아님을 확신하고 다시 전장에 나가게 하여 큰일을 하게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순신 장군을 상소대로 역적이나 군율을 어긴 나쁜 사람으로 인용 할 수 있겠습니까.

그 후에도 이득준공은 계속 승급하여 경상좌수군절도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고 73세까지 벼슬을 하였으며 76세에 돌아가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득준공의 후손들의 입장에서는 받지도 않은 형벌을 받은 것으로 오해 될 수 있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단지 상소문에 있는 사실만으로 결론을 내어서는 안된다는 의견을 드립니다. 또한 예문에서 서술 된 바와같이 고인 명을 적시하면 독자들이 마치 엄청난 죄인으로 혼돈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예문을 계시하려면 과정과 최종결과도 계시해야 할 것이며 블로그에 올린 사람의 사견이 첨가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역사만으로 이해되어야하며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 이득준공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였습니다.

 

이득준공의 경력사항

1753.4  한량 이득준 무과병과 258급제 출신자

1762. 정월 선략(宣略)장군 충무위부사용

1762.1.16 선략장군 서도참군

1764.6.30 어모장군 훈련원 주부

1764.12.25 어모장군 오위도총부도사

1765.6.22. 통훈대부 형조정랑

1765.12.24 통훈대부 언양현감

1768.12.21. 어모장군 오위도총부경무(五衛都摠府經厯)

1768.12.23. 통훈대부 언양현감

1769.6.4 통정대부 언양현감

1769.6.19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 순천영장

1771.2.17 통정대부 강진현감

1772.9 절충장군 용양위부호 우림위장(羽林衛將)

1780.3.15 통정대부 평산도호부사

1780.3 황주진관 평산 병마동첨절제사

1781.12 절충장군 백령진 수군첨절제사

1783.12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 사복장(司僕將)

1784.6.29 통정대부 통진도호부사

1784.6 수원진관 통진병마동첨랑제사

1786.4.11 통정대부 함양도호부사

1787.6.22 통정대부 선천도호부사

1787.6. 선천진 병마첨절제사, 평안도 청북수군 방어사

1788.6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

1789.10.10 통정대부 통진도호부사

1790.5 절충장군 충무위부사용

1795. 절충장군 강화부 중군 수성장

1795.12.6.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

1796.8.9 절충장군 경상좌도수군절도사

1798.12 황주진관 봉산병마 동첨절제사

1798.12.18 통정대부 봉산군수

1831.10. 절충장군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이득준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경연참찬관

1856.4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경연참찬관 절충장군 경상좌도수군절도사 이득준

가선대부 병조참판 동지의금부사 훈련원도정(都正)


디지털성남문화대전

한자 李汝恒

영어공식명칭 Lee Yeo-hang

이칭/별칭 자상(子常)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전통인물

지역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성봉현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남

생년 1593년(선조 26)

몰년 1657년(효종 8)

본관 연안(延安)

대표관직 훈련원 봉사

묘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  

상훈 소무원훈(昭武原勳)

 

[정의]

조선 후기 성남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이자상(李子常)이다. 아버지는 증승지(贈承旨) 이승윤(李承尹)이고, 어머니는 풍천임씨(豊州任氏)로 임영노(任榮老)의 딸이다. 초배는 한양조씨(漢陽趙氏)로 병사(兵使) 조의(趙誼)의 딸이며, 계배는 양천허씨(陽川許氏)로 주부(主簿) 허혜(許譓)의 딸이다. 아버지 허승윤(許承尹)[1571-1592]이 임진왜란 당시 백의로 호종하다 순절하여 유복자로 출생하였다.

 

[활동사항]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으로 대가(大駕)가 남행할 때에 양성현감으로 소사에 나와 기다려 지성으로 받들었다. 이후 임천군수(林川郡守)를 비롯한 호서의 여러 고을 방백을 지냈다.

 

[묘소]

묘가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에 있고, 묘에는 비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박선수(朴瑄壽)

1. 생몰 1821(순조 21)~1899 2. 급제 -44세, 1864년(고종 1)증광별시문과에 장원급제 3. 암행어사 연보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자 박규수의 동생임 -45세, 1865년 사간원 대사간 -47세, 1867년 경상도 암행어사 4. 관련기록 《고종 004 04(1867)/07/18(기사) / 경상도 암행 어사 박선수가 보고서를 올리다 》 경상도 암행 어사(慶尙道暗行御史) 박선수(朴瑄壽)를 불러들여 만나보았다. 보고서를 올려 다음과 같은 인사 조치를 제의하였다. 통제사(統制使) 김건(金鍵), 전 통제사 이봉주(李鳳周), 전 경주 부사(慶州府尹) 홍익섭(洪翼燮), 전 상주 목사(尙州牧使) 김증현(金曾鉉), 전 진주 목사(晉州牧使) 이항익(李恒翼), 전 함안 군수(咸安郡守) 백낙헌(白樂憲), 전 연일 현감(延日縣監) 윤양계(尹養桂), 전 기장 현감(機張縣監) 정태원(鄭泰源), 자인 현감(慈仁縣監) 이장렬(李章烈), 전 영양 현감(英陽縣監) 윤필구(尹弼求), 칠원 현감(漆原縣監) 유진국(兪鎭國), 함양 군수(咸陽郡守) 서호순(徐頀淳), 전 창원 부사(昌原府使) 이명석(李明錫), 전 김해 부사(金海府使) 허전(許傳), 전전(前前) 동래 부사(東萊府使) 강로(姜?), 칠곡 부사(漆谷府使) 박주운(朴周雲), 전 예천 군수(醴泉郡守) 임승수(林勝洙), 전 경산 현감(慶山縣監) 조병위(趙秉瑋), 전 고령 현감(高靈縣監) 이시익(李時翼), 전전 비안 현감(比安縣監) 정재주(鄭在周), 전전 자인 현감(慈仁縣監) 조익증(趙翼增), 창락 찰방(昌樂察訪) 김정섭(金鼎燮), 전 유곡 찰방(幽谷察訪) 배상규(裴相奎), 전 금천 찰방(金泉察訪) 이철남(李喆南), 전 성현 찰방(省峴察訪) 홍찬섭(洪贊燮), 부산 첨사(釜山僉使) 윤석우(尹錫禹), 전 다대 첨사(多大僉使) 허규(許奎) 등에게 죄를 주고, 사천 현감(泗川縣監) 박신영(朴愼永)에게 임금의 인장이 찍힌 글과 안팎 옷감[表裏]을 주는 은전을 베풀며, 대구 판관(大邱判官) 박봉하(朴鳳夏), 선산 부사(善山府使) 김병우(金炳愚), 거제 부사(巨濟府使) 권혜(權?), 전 부사 박해구(朴海龜), 전 개령 현감(開寧縣監) 이병일(李炳一), 영산 현감(靈山縣監) 남종응(南鍾應), 전 삼가 현감(三嘉縣監) 정현석(鄭顯奭), 전 문경 현감(聞慶縣監) 이국녕(李國寧), 진해 현감(鎭海縣監) 남정우(南正祐), 서생 첨사(西生僉使) 이면식(李勉植), 전 좌수 우후(左水虞候) 김사익(金思翊), 전 대구 영장(大邱營將) 서형순(徐珩淳) 등에게 모두 표창으로 품계를 올려줄 것을 제의하였다.

연월일 高宗 15年, 戊寅(1878년, 淸 德宗 光緖 20年, 日本 明治 27年) 5月 10日(己未)  

高宗 15年 5月 10日(己未) 慶尙右道暗行御史 李正來의 書啓에 依하여 不善治守令인 前尙州牧使 金奭根·前前牧使 李承敬·前星州牧使 李稷鉉·前前金海府使 徐會輔·前固城府使 申相珪·咸陽郡守 李象先·昆陽郡守 王昌鎬·前郡守 趙羲周·前前郡守 李奎性·前統制使 申植·前統虞候 黃顯默·前加德僉使 梁柱燮 등을 治罪하며 知體顯監 金洛鉉을 褒償 陞敍케 하다.

[출전]
承政院日記 高宗 15年 5月 10日
日省錄 高宗 15年 5月 10日
高宗實錄 高宗 15年 5月 10日
公車日錄 5 戊寅 15年 5月 10日

연월일 高宗 15年, 戊寅(1878년, 淸 德宗 光緖 20年, 日本 明治 27年) 7月 5日(癸丑)  

議政府의 啓言에 따라 勒捧勒貸하여 犯贓한 前靈光郡守 李起鎬·前求體縣監 鄭寅台·英陽顯監 李秉奎·前古阜郡守 李秀殷·咸陽郡守 李象先·前全州判官 權用圭·前高敞縣監 柳敦秀·前慶州營將 許鍍를 照律하여 杖 100·流 3,000里定配·追奪告身하다.

[출전]
承政院日記 高宗 15年 7月 5日
日省錄 高宗 15年 7月 5日
高宗實錄 高宗 15年 7月 5日

연월일 光武 3年, 己亥(1899년, 德宗 光緖 22年, 日本 明治 29年) 10月 22日(日)  

度支部大臣 趙秉稷의 上奏에 따라 各郡 公納의 愆滯가 尤甚한 龍仁郡守 李敏昌·咸陽郡守 閔廷植을 모두 免官하여 法部로 하여금 照律 懲辦케 하고 扶餘前郡守 李世卿·康津前郡守 申性休·禮安前郡守 李憲榮을 一體 照律 懲辦하고 各郡의 上納을 董飭하지 못한 忠淸北道觀察使 金錫圭·忠淸南道前觀察使 鄭周永·京畿道前觀察使 金永悳·全羅南道觀察使 閔泳喆·慶尙北道觀察使 金稷鉉·慶尙南道前觀察使 曹始永을 모두 爲先 1個月 減俸에 處하고 逋吏의 數가 夥多한 者는 遺漏없이 査報하게 하여 依律 定罪하고 所謂 出給差人의 中間 牟利하고 經年 不納하는 者도 또한 詳報하라 하여 用律할 뜻을 各 該道觀察使에게 分付하게 하다.

[출전]
日省錄 光武 3年 9月 18日
承政院日記 光武 3年 9月 18日
高宗實錄 光武 3年 10月 22日
官報 光武 3年 10月 26日
독립신문 光武 3年 10月 28日

연월일 光武 10年, 丙午(1906년, 德宗 光緖 22年, 日本 明治 29年) 8月 30日(木)  

議政府參政 朴齊純과 度支部大臣 閔泳綺의 奏請에 따라 郡稅實績이 良好한 前·現任郡守를 褒賞하다.

즉 安峽前郡守 李載徹, 鎭海郡守 鄭海八, 長鬐郡守 任昌宰, 新寧郡守 申勝休, 醴泉郡守 金炳驥, 玄風郡守 白南埈 등에 陞一等하고, 興海郡守 尹奎善, 鎭川郡守 李鐸應, 漆谷郡守 崔鉉達, 江東郡守 吳濚鐸, 咸陽郡守 朴晶奎, 德源前郡守 李鍾完, 郡守 朴重瓚 등에게 賞金을 내리다.

[출전]
日省錄 光武 10年 7月 11日
承政院日記 光武 10年 7月 11日
高宗實錄 光武 10年 8月 30日


희양문헌집

[간략정보]
  • 한자
  • 분야
  • 유형
  • 시대
  • 성격
  • 편저자
  • 제작시기
  • 권수/책수
  • 간행/발행/발급자(처)
  • 소장처
  • 집필자
[정의]
고려시대부터 한말(韓末)까지 전라남도 광양(光陽)에 관계된 자료 중에서 시와 문을 모은 향토문헌집.
[개설]
희양은 광양의 옛이름이다. 원집과 별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집은 광양 출신 인물의 시문을 모은 것이고, 별집은 광양에 관계된 타지 인물의 시문을 수록한 것이다. 문체별·시대별로 편집하였다.
[편찬/발간 경위]
박종모(朴鍾模)·조양제(趙陽濟) 등이 편집하고 박종범(朴鍾凡)이 출자하여 1938년 광양향교에서 간행하였다. 권두에 군수 손종권(孫宗權)정재화(鄭在和)의 서문, 권말에 박인규(朴仁圭)김현주(金鉉周)의 발문이 있다.
[서지적 사항]
4권 4책. 신연활자본. 국립중앙도서관과 단국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내용]
권1에 시 546수, 서(書) 16편, 소(疏) 1편, 권2에 기(記) 69편, 서(序) 49편, 설(說) 13편, 발(跋) 8편, 논(論) 5편, 부(賦) 1편, 찬(贊) 2편, 명(銘) 3편, 권3에 비문 74편, 행장 24편, 사적 7편, 제문 23편, 권4에 잡저로 상량문 12편, 자경편(自警篇)·자성편(自省篇) 각 1편, 의(義) 10편, 계서류(戒書類) 3편, 공가문(公家文) 35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소 1편은 결편이다.
시에는 고려 김황원(金黃元)의 유시(遺詩) 「요사지설내연구호(遼使至設內宴口號)」·「등평양연광정(登平壤練光亭)」 등이 실려 있다. “긴 성 한쪽엔 강물이 넘실넘실/ 넓은 들판 동쪽엔 산들이 가뭇가뭇.(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이라 짓고는 다음 시구가 나오지 않아 통곡하며 연광정을 내려왔다는 고사로 유명한 작품이다. 그밖에 호남삼걸(湖南三傑)의 한 사람인 최산두(崔山斗)의 8세작인 「영우(詠牛)」「사마연(司馬宴)」·「제물염정(題勿染亭)」, 이준(李浚)「산성제야(山城除夜)」·「제귀거래정(題歸去來亭)」 등 광양 주변의 산성·누각·정자 등을 읊은 작품이 실려 있다.
서(書)에는 최산두「여안순지(與安順之)」, 황현(黃玹)「여이난곡서(與李蘭谷書)」 등이 있고, 비문에는 황원(黃瑗)「송태공묘지(宋太公墓誌)」 등이 있다. 행장과 사적은 여러 가지 업적으로 칭도된 인물에 대한 기록으로, 권4 끝에 있는 열녀의 숨겨진 이야기와 함께 향토 인물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기에는 이건방(李建芳)「영모재기(永慕齋記)」, 송환기(宋煥箕)「반구정기(伴鷗亭記)」, 황현의 「거연정기(居然亭記)」 등이 실려 있어 광양 지방의 누각이나 정자·재실 등의 연혁을 알 수 있다. 논·설·부·찬 등도 한말의 한문학과 지방사 연구에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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