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신라사 고려사

 

三國史記 卷第二十七 卷第二十七 百濟本紀 第五  >   무왕(武王)  >   二十五年冬十月 신라의 속함성 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624년 10월 (음))

신라의 속함성 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 624년 10월(음) )

겨울 10월에 신라의 속함 103 , 앵잠 104 , 기잠 105 , 봉잠, 기현, 용책 106 등 6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107

註 103
오늘날의 경남 咸陽郡 함양읍에 비정된다. 《삼국사기》 권34 잡지 지리1 康州 天嶺郡條에 “天嶺郡 本速含郡 景德王改名 今咸陽郡”이라 한 기사 참조.
註 104
《삼국사기》 권37 잡지 지리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되어 있다. 현재의 경남 咸陽郡 水東面 上栢里 일대(속칭 앵구밭)에 비정된다.
註 105
《삼국사기》 권37 잡지 지리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되어 있다. 이를 현재의 경남 陜川郡 大幷面으로 비정한 견해가 있다.
註 106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평왕 46년(624)조에는 穴柵城으로 나온다. 《삼국사기》 권37 잡지 지리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되어 있다. 이를 신라 康州 闕城郡(경남 山淸郡 丹城面)의 옛 지명인 闕支郡과 같은 곳으로 보는 견해(전영래, 「백제 남방경역의 변천」, 《천관우선생환력기념사학논총》, 1985, 154쪽)도 있다.
註 107
무왕 은 신라가 아막성 을 중심으로 방비를 굳건히 하였기 때문에 운봉고원을 넘어 옛 가야지역으로 나아가는 것이 난관에 봉착하자, 장수에서 육십령을 넘어 함양으로 진출한 후 그 주변 지역을 장악한 것으로 추정된다. 6성 중에서 속함, 기잠, 혈책이 먼저 함락되었다고 하였으므로 백제군은 장수에서 육십령을 넘어 함양→합천 삼가→산청군 단성 지역을 장악하고, 이어서 남강의 본류를 타고 산청에서 진주로 통하는 교통로 상에 위치한 봉잠 등 3성을 확보했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 집권국가형성과정 연구」, 2006 , 395쪽). 속함성은 함양, 기잠성은 합천군 삼가면, 혈책은 산청군 단성면 일대로 보고 있다( 전영래, 「백제 남방경역의 변천」, 《천관우선생환력기념사학논총》, 1985 , 154쪽).

 

三國史記 卷第十 卷第十 新羅本紀 第十  >   헌덕왕(憲德王)  >   十四年春三月十八日 김헌창 난의 진압 과정과 진압 후의 논공행상(822년 3월 18일(음))

김헌창 난의 진압 과정과 진압 후의 논공행상 ( 822년 03월18일(음) )

18일에 완산주(完山州) 장사(長史) 204 최웅(崔雄)과 주조(州助) 205 아찬 정련(正連)의 아들 영충(令忠) 등이 왕경으로 도망와 반란을 보고하니, 왕이 곧바로 최웅에게 급찬의 위와 속함군(速含郡) 206 태수를, 영충에게 급찬의 위를 주고 차원(差員) 207 장수 8명에게 왕도의 8방(方)을 지키게 한 후에 군사를 출병시켰다. 일길찬 장웅(張雄)을 선발로 잡찬 위공(衛恭) 208 파진찬 제릉(悌凌)이 그 뒤를 잇고, 이찬 균정(均貞), 잡찬 웅원(雄元), 대아찬 우징(祐徵) 등은 삼군을 통솔하고 정벌을 떠났다. 각간 충공(忠恭), 잡찬 윤응(允膺)이 문화관문(蚊火關門) 209 을 지키고 명기(明基)와 안락(安樂) 두 화랑이 각각 종군을 청하여, 명기와 그를 따르는 무리는 황산(黃山)으로 향하고 안락시미지진(施彌知鎭) 210 으로 향했다. 이때에 헌창은 장수를 보내 주요 도로를 차지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장웅도동현(道冬峴) 211 에서 적병을 만나 격퇴하였고, 위공제릉장웅의 군대에 합세해 삼년산성(三年山城)을 공격해 승리하였다. 병사들이 속리산(俗離山)으로 나아가 적병을 공격해 섬멸하였고, 균정 등은 적과 성산(星山) 212 에서 싸워 멸하였다. 여러 군사들이 함께 웅진(熊津)에 도착해 적과 큰 전투를 벌였는데, 목을 벤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헌창은 간신히 몸을 피하여 성에 들어가 견고히 수비하니, 여러 군사들이 포위 공격을 한 지 10일 만에 성이 함락되려 하였다. 헌창이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자 종자(從者)가 목을 잘라 머리와 몸을 각각 묻었다. 성이 함락되자 옛 무덤에 있는 그의 몸을 찾아내 다시 베고 종족(宗族)과 도당(徒黨) 무려 239명을 죽이고 백성들은 놓아주었다. 그 후 공(功)을 논하여 작위와 상을 줌에 차등을 두었다. 아찬 녹진(祿眞) 213 에게 대아찬의 위를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고, 삽량주(歃良州) 굴자군(屈自郡) 214 은 적과 가까웠으나 난에 가담하지 않아 7년 동안 조세를 면제하였다.

 

> 윤가관
尹可觀, 海平府院君之曾孫, 有武略, 善騎射. 恭愍晩年, 令韓安·洪倫等强辱諸妃嬪. 可觀亦昵侍左右, 王令通益妃, 可觀以死固拒. 王大怒棒之, 廢爲庶人, 尋釋之.
辛禑時拜密直副使, 出爲慶尙道副元帥. 倭寇比屋·義城等縣, 賊衆我寡, 屢戰不利. 可觀與戰于安東·禮安等處, 敗績, 矢集右臂. 仍爲本道都巡問使, 鎭合浦, 倭賊百餘寇咸陽郡, 可觀與晉州牧使朴子安擊之, 斬十八級, 奪本國被虜二十餘人, 幷獲器仗. 初倭賊皆由丑山島入寇, 可觀聞于朝, 爲置船卒, 自後倭患稍息. 銷兵器弊弃者爲農器, 開屯田, 以贍軍食. 性淸儉, 秋毫不取, 不近聲妓. 及還, 鞍勒破缺, 以麻繩補之. 後以判密直事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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