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y09_up.gif 지리산문학 총론

 

gray09_up.gif 지리산 현대 문학

 

gray09_up.gif 지리산과 문학

 

 지리산가

         태백산맥(조정래)              지리산(이병주)               진달래산천(신동엽)  

        토지(박경리)                    역마(김동리)                  천둥소리(김주영)

        우적가(영재)                     만복사저포기(김시습)

 

 지리산가

 

구례 현인지녀유자색 거지리산 가빈진부도

백제왕문기미 욕내지 녀작시가 서사 부종

求禮 縣人之女有姿色 居智異山 家貧盡婦道

百濟王聞其美 欲內之 女作是歌 誓死不從

 

 요점 정리

 

 주제 : 여인의 정절

 

 내용 연구

 

 백제 때의 가요로 작자 ·연대 ·가사는 미상으로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그 유래만 전한다. 백제 때 구례현(求禮縣)의 한 여인이 지리산(智異山) 속에 살고 있었는데, 그 얼굴이 아름다웠으며 살림은 가난하나 부도(婦道)를 다하였다. 왕이 이 여인의 자색(姿色)이 뛰어남을 듣고 궁으로 데려가려고 하자 그녀는 죽음을 맹세하여 좇지 않고 자신의 심정을 이 노래로 지어 불렀다고 한다. 일설에는 개루왕(蓋婁王) 때에 도미(都彌)의 아내가 이 노래를 지었다고도 전한다.

 

 지리산이 포괄하고 있는 드넓은 삶의 영역과 지리산이 가지는 역사적 내용으로 인하여 이곳을 소재로 한 문학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영재우적(永才遇賊)이라 하여 지리산과 덕유산 중간의 육십령 통로에 기거하고 있던 도적떼들을 문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는 다소 허황된 듯하지만 중세 리얼리즘 문학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며 남원의 만복사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조선 중기 김종직, 김일손, 이륙의 지리산 기행문들은 모두 우리나라 기행 수필문학의 명작들로 평가된다.  여기서 김종직의 <유두류록>은 사실적 산문형식의 기술을 통해 지리산의 해동청 잡는 모습을 비롯 몇몇 풍물들을 적고 있으며, 김일손의 기행문은 섬세한 필치와 수사적 표현 양식이 단연 돋보인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전문학으로 꼽히는 <춘향전>과 <흥부전> 그리고 <변강쇠타령>등도 넓은 의미에서 지리산을 무대로 한 것들이다.  <춘향전>내용에서 주목되는 것은 변학도가 잔치를 벌일 때 유독 운봉현감만이 춘향에 대한 비난을 자제하고 있는 점이다.  지리산을 가까이 하고 있는 운봉현감의 이러한 처신은 아마도 지리산 속의 잠재적 변혁세력과 결코 무관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흥부전>의 무대가 운봉 여원치에서 함양 팔랑재까지라는 것은 책 속의 지명이 말해주고 있으며 남원군 동면 성산리는 흥부전의 원고장이라고 자부하고 있기도 하다.  <변강쇠타령>은 거의 동구,마천을 그 지역적 배경으로 한다.

 

 근대로 와서 지리산 문학을 살펴보면, 몰락 양반가의 손자 석이와 소작인의 딸 순이의 비극적 삶을 내용으로 한 황순원의 <잃어 버린 사람들>이 먼저 떠오른다.  박경리의 <토지>도 악양면 평사리가 작품의 배경이다.  김동리는 <역마>에서 화개장터를 배경으로 역마살이 낀 주인공의 떠돌이 생활을 그리며 일제의 자본침탈로 붕괴 되어가는 조선시대 장터의 모습을 애환 깊게 다루고 있다.

 

 6.25와 빨치산 투쟁이라는 비극적 역사가 휩쓸고 간 다음 지리산 문학은 곧 분단문학의 선상에서 논의된다.  그러나 분단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한 지리산 문학의 잉태과정은 이데올로기적 제약 때문에 진통을 겪는다.  신동엽 시인의 <진달래 산천>은 바로 이 판도라 상자의 뚜껑을 여는 것이었다.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모두 산으로 갔어요......"라며 최초로 산사람들의 얘기를 진혼곡 형식으로 읊고 있다.  뱀사골 마뜰 마을을 배경으로 한 오찬식의 <마뜰>, 문순태의 <피아골>과 <철쭉제>, 김주영의 <천둥소리>, 박경리의 <천둥소리>도 모두 지리산의 비극적 역사를 그 테마나 소재로 하고 있다.

 

 1970년대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은 본격적으로 지리산과 빨치산 투쟁을 형상화한다. 그러나 <지리산>은 실제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으면서도 픽션으로의 한계와 지식인적 관점에 머물고 말았다.  이에 비해 1980년대에 등장한 이태의 <남부군>은 작가가 체험한 생생한 빨치산 기록이라는 점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하나의 역사 기록물인 <남부군>은 바로 1980년대가 말해야할 지리산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고 평가된다.

 

1980년대 분단문학의 대표작으로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이 있다.  여순 반란사건 에서부터 휴전 성립시기까지 전남지방과 지리산을 무대로 입산자와 그 가족을 비롯한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형상화했다.  특히 이 책은 이제껏 지리산과 관련된 분단문학이 갖고 있던 역사허무주의를 어느 정도 극복하고 분단된 역사 속에서의 민중들의 희망과 좌절, 기쁨과 고통, 그리고 사랑과 분노를 감동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김명수 저 '지리산'- 돌베개

 http://www.seelotus.com/gojeon/gojeon/godae-siga/ji-li-san.htm

자료 출처 http://waveon.play.co.kr/doc/frame1.htm

 

 gray09_up.gif 지리산 현대 문학

 

 

태백산맥

혼 불

천둥소리

토 지

남부군

지리산

조정래

최명희

김주영

박경리

이 태

이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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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전문학으로 꼽히는 <춘향전>과 <흥부전> 그리고 <변강쇠타령>등도 넓은 의미에서 지리산을 무대로 한 작품들이다.

근대로 와서 지리산 문학을 살펴보면, 몰락 양반가의 손자 석이와 소작인의 딸 순이의 비극적 삶을 내용으로 한 황순원의 <잃어 버린 사람들>이 먼저 떠오른다.  박경리의 <토지>도 악양면 평사리가 작품의 배경이다. 김동리는 <역마>에서 화개장터를 배경으로 역마살이 낀 주인공의 떠돌이 생활을 그리며 일제의 자본침탈로 붕괴 되어가는 조선시대 장터의 모습을 애환 깊게 다루고 있다.

  6.25와 빨치산 투쟁이라는 비극적 역사가 휩쓸고 간 다음 지리산 문학은 곧 분단문학의 선상에서 논의된다.  그러나 분단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한 지리산 문학의 잉태과정은 이데올로기적 제약 때문에 진통을 겪는다.  신동엽 시인의 <진달래 산천>은 바로 이 판도라 상자의 뚜껑을 여는 것이었다.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모두 산으로 갔어요......"라며 최초로 산사람들의 얘기를 진혼곡 형식으로 읊고 있다.  뱀사골 마뜰 마을을 배경으로 한 오찬식의 <마뜰>, 문순태의 <피아골>과 <철쭉제>, 김주영의 <천둥소리>, 박경리의 <천둥소리>도 모두 지리산의 비극적 역사를 그 테마나 소재로 하고 있다.

  1970년대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은 본격적으로 지리산과 빨치산 투쟁을 형상화한다. 그러나 <지리산>은 실제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으면서도 픽션으로의 한계와 지식인적 관점에 머물고 말았다.  이에 비해 1980년대에 등장한 이태의 <남부군>은 작가가 체험한 생생한 빨치산 기록이라는 점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하나의 역사 기록물인 <남부군>은 바로 1980년대가 말해야 할 지리산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고 평가된다.

  1980년대 분단문학의 대표작으로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이 있다.  여순 반란사건 에서부터 휴전 성립시기까지 전남지방과 지리산을 무대로 입산자와 그 가족을 비롯한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형상화했다.  특히 이 책은 이제껏 지리산과 관련된 분단문학이 갖고 있던 역사허무주의를 어느 정도 극복하고 분단된 역사 속에서의 민중들의 희망과 좌절, 기쁨과 고통, 그리고 사랑과 분노를 감동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김명수 저 '지리산'- 돌베개

 

 gray09_up.gif [태백산맥]의 탄생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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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조정래는 어떠한 삶을 살아나왔기에 태백산맥이라는 소설을 쓰게 되었을까?

아직은 조정래가 살아있기 때문에 많은 자료는 나와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라 할 수 있는 조정래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면 태백산맥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태백산맥은  그의 출생지 및 그 밖의 성장과정을  상당히 많이 반영한 소설이다. 그는 전라남도 승주군 쌍암면 선암사에서 태어났는데 이 선암사란 절은 태백산맥에도 나오는 한 배경이 되는 곳이다. 그의 아버지는 대처승이란  독특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었다. 즉, 그의 성장에 커다란 영향을 알게 모르게 미친 그의 아버지는 특이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소설은  사회적인 면을 상당히 많이 반영하려는 경향이 엿보인다. 그 이유는 그의 성장과정에서  이른바 근대사에 있어서의 커다랗다고 하는 사건들을 그는 거의 빼놓지 않고 보았기 때문이다. 볼 기회가 없으면 찾아가서라도 그는 그러한 사건들을 보았다. 예를 들면 태백산맥의 주요한 역사적 배경이 되는  '여순반란사건'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여기서 작가 자신이 한  이야기를 인용해 본다.

  태백산맥은 400만부 이상이 팔려나간 최대 베스트셀러이다. 10년넘게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우리나라의문학 사에 있어서 하나의 큰 의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gray09_up.gif 태백산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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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의 역사적 배경은 일제시대에서 6.25 전후까지이다. 우리 나라의 근대사에 있어서 가장 격변적으로 사회가 변천한 때이기도한  이 때는 굉장한 혼란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시대의 경제적인 면을 보면 일제 시대의 경제부터 보아야 하는데 일제시대의 경제는 말 그대로 식민지 수탈경제였다. 토지조사사업, 산미증식계획, 농민회유정책, 식량의 강제공출등 병참기지로서의 경제적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 일본은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일제시대 전후의 우리나라 경제의 근간은 농촌경제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민족 경제의자생력은 뿌리째 뽑히게 되었다. 민족 경제의 자생력이 없기 때문에 해방후 미국의 원조를 중심으로한 원조경제체제가 나타나게 되었고, 그 후 외자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외자경제체제가 나타나게 되었다.

   즉, 국민 대다수인 농민들은 지주제 때부터 박정희 정권 이전까지 거의 풍요라는 것을 모르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해방후 이러한 빈곤은 거의  극에 달해 있었는데, 일제 시대에 이루어진 자작농의 소작농화, 소작농의 화전민화, 화전민의 걸인화등을 통해서 이미 절대 빈곤의 근간은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절대빈곤의 틈을 비집고  공산주의의 이념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소작쟁의라는 작은 것부터  조직화된 집단의 투쟁까지 다양한 양상을 나타냈던  농민운동은 해방 후에 공산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해방후에 결성되었던  농민의 이익보호를 위한 단체의 대표적인 것들은  거의 대부분이 사회주의적 경향을 보였다는 것을 근거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인 상황을 바탕으로한 악덕지주와 농민간의 대립관계를 리얼하게 나타냄으로써 그 당시 좌우 대립의 본질적인 동기가 어디에 있는가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정치적인 면에서 고찰해볼때 태백산맥의 주된 배경이 되는 이승만정권 시대는 정통성의 부족이라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친일적 지주세력과  결탁하여 성립된 이승만정권은, 좌익세력과의 대결을 이유로  친일세력을 비호함으로써 좌익세력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이 당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대표적 무장 투쟁으로 태백산맥에서 주된 역사적 배경으로 나타나는  '4.3 항쟁'과 '여순 군반란'등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면 가장 직접적으로 작품의 배경이 되고 있는 '여순사건'의개요를 살펴보자. 제 14연대는  육군 본부의준비 명령에 의하여  1개 대대를 제주도 토벌작전에 출동시킬 준비를 갖추고 있던 중  48년 10월 19일 오전8시를 기하여 여수항을 출항하라는 전보명령을 받고 해군의 대륙용 주정의 선적 작업을 야간까지 계속하였다. 오후 8시 경  연대 인사계 지창수(남로당에 포섭된 자로서 연대 조직책)는 약 40명의 당세포원들로 하여금 병기고와 탄약고를 점령케 하는 동시에 비상나팔을 불어  출동 부대인 제 1대대를 즉각적으로   집합케 하였고, 잠시 후에 2개 대대의 잔류 연대 병력들도  연병장에 집결케 하였다. 집합된 연대 사병에게 지창수는 경찰 타도, 제주도 출동 거부, 그리고 남북 통일을 위하여 인민군으로 행동하자고 선동하자 대부분의 사병들은 이에 환호로써 호응하였다.

  약 3,000명 정도의 동조자 를 얻은 반란 부대는 지창수의 지휘하에 차량에 분승하고 여수시내로 돌입하면서  지서와 경찰서를 습격하고 경찰관을 무차별 살해  하였다. 여수시내에서는  약 600여명의 좌익 단체와 학생들이 즉각 반란 부대와 합세하여 그들의 선두로 각 관공서등 중요 기관을 습격하였다.  20일 오전 9시 경 여수를 완전히 장악한 그들은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인민공화국기를 게양하였으며  많은 소위 '반동 분자들'을 색출하여 집단 총살하였다. 행동적이고 전투적인 남녀 중고등학생들이 동원되어 선전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상황속에서 여순사건이 발생하였고  이것이 태백산맥의 중요한 역사적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이다. 4.3 제주 민중항쟁... 태백산맥은 대하소설이다. 그런데 대하소설에 있어서는 객관적 진실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백 산맥에는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들이 잘못 기술되어 있다. 먼저 4·3 제주 민중 항쟁을 보면, 작가 조정래님은은  염상진의 대화 중간중간에 '제주에서의 투쟁' '동지들의 죽음' 과 같이 4·3 제주 민중 항쟁을 좌익이나 공산 세력의 투쟁인 양 기술해 놓고 있다. 그러나 4·3 항쟁은  그런 좌익의 투쟁이 아닌 생존을 위한 민중들의 투쟁이었다. 이런 사실을 감안했는지 작가도 4·3제주 민중항쟁을 중요히 크게 다루지 않고 간단히 쓰고 넘어가는 기색이 역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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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좌익적 입장에서 작가 조정래가 4·3 제주항쟁을 기술했다면 우익은 4·3항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우익의 정통을 계속 이어온  우리 나라 정부의 입장을들어보면, 1990년에 개정된 고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공산주의자들은  남한 내의 정치적 불안정, 경제적 취약점등을 이용하여 교란 작전을 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그들은 제주도 4·3사건, 여수·순천 사건을 일으켰다. 제주도 4·3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5.10 총선거를 교란시키기 위해 일으킨 무장 폭동이었다. 그들은 한라산을 근거로 관공서 습격, 살인, 방화, 약탈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그러나 군·경의 진압 작전과  주민들의 협조로 평온과 질서를 되찾았다.  이러한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교란 작전은 그 후에도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4·3 제주 민중 항쟁은 좌익이나 우익의 활동이 아닌 인간 본연의 생존을 위한 싸움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3 제주 민중 항쟁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는데  이러한 유혈 사건들은 이 시대에 많이 일어났었다. 이런 많은 유혈 사건들은 처음에는 이데올로기로 인한 사건들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고 이러한 유혈 사건들이 잦아지면서 점점 복수의양상을 띤 사건들로 변모해 갔다.

  그들간의 갈등을 통해서  그 당시의 사회상이 리얼하게 드러나고 있다. 태백산맥의 인물에 대한 연구는 이상준군이 수고하였다. <태백산맥>의 공간적 배경은 전라도의 해안 벌교 바닥이다.벌교는 일정때 세워진 곳으로 조선의 쌀을 공출해서 일본으로 운송하기위해 건설되었다. 지리적으로 태백산맥에서 지리산을 거쳐 뻗어온 산자락이 버티고 있는 곳이다.이런 공간적 배경 때문에 해방이 된 후에도 일본 식민지체제의 모순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곳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이곳 민중들의 삶은 어떻게 보면 비굴해 보이고,달리 보면 지극히 현명해 보인다. 이런 민중들 때문에  너무 다양하다고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 삶이 펼쳐진다. 작가 조정래의 기억속에 특별한 곳이어서가 아니어도 이곳은 해방전후의 여러 인물을 살피기에는 매우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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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치산은 태백산맥에 나오는 극좌파들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빨치산들은 여순사건에서 패배한 무리들이  지리산, 백운산 등의 인근 산악 지대로 도주하여  전투의 방식을 유격전 형태로 전환한 것이다. 이러한 빨치산에 대한 연구는 태백산맥에 나오는 극좌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태백산맥>에 나오는 빨치산들은  그렇게 잔인하고 잔혹한 인간들로 비치치 않은것 같다. 하지만 우리세대나 그 이후 세대들은 반공이데올로기에 묶여 빨치산 하면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이 아닌 어떤 괴물 비슷한 걸로 어렸을 때부터 교육받고 자라왔다.  실제로 여러자료들에 의하면 빨치산이란게 잔인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왜 그렇게 잔혹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살펴보면 그에 대한 수긍이가리라 본다.'빨치산'이란 어원은 러시아에서 유래한 것으로  패거리 유격병 게릴라 대원이라는 뜻이 있다.

  [제가 속한 부대에서는  고의적으로 살인, 방화를 저지른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빨치산 활동 때 '인민성 제고'라는 교육을 받기도 했습니다.  '인민성 제고'의 초점은 쌀을 뺏지 말라는 것이었으나 우리는 누가 쌀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먹고살자니 지시 받은 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습니다만  세상에 얼어 죽게 생긴 마당에 영하 20도가 넘는 날님은에 뜨뜻한 방을 보고도 안들어가고 배기겠습니까?

  이렇듯 빨치산의 교육은 인민을 해치고 괴롭히지 말라는게 주된 내용이었으나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자기네들도 똑같은 인간으로서  사람이 극한 상황까지 가면 욕망밖에 남지 않는다는걸 아래의 한 예를 통해 알 수 있다.  팔로군 출신이 체포되어 끌려올 때  앞에 가던 군인이 건빵을 하나  눈 위에 떨어뜨리고 가더래요.  닷새를 굶어서 그랬는지 건빵이 호 떡만하게 보이더랍니다. 그래서 그걸 주워먹어야 겠는데  잘못하다가는 쏠까 봐서 "눈 좀 먹어도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먹어라" 하길래 얼른 주워 먹었답니다.]  (남부군의 저자인 이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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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산맥이 문제시되었던 이유는 두가지 문제 때문이다. 즉, 역사적인 왜곡이 있었다는 점과 좌익을 미화하고 있다라는 점의 두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 문제들의 원인을 나름대로 생각해보면  첫 번째 문제의 원인은  태백산맥은 좌우익 대립의 역사적인 원인들을 근간으로 전개되고 있고, 그러한 전개과정에서 극적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실명을 쓰는 등의 방법을 쓴 것이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두번째 문제의 원인은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이론보다도 그들이 직접 겪었던 끔찍했던 과거인 좌익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원초적으로 거부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즉, 국군과 북한군이 교대로 점령하는 과정을  여러번 겪은 6. 25의 전개 과정에서 서로 보복을 해대는 끔찍함을 겪은 세대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돈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좌익이라는 이름이 붙은 모든 것이다.                                                                                                     [참고문헌] 우리시대 우리작가 외.

 

  한 평론가는 그를 지난 70년대 이후 우리 문단에서 문학을 통해 분단극복의 의지와 분단 문학의 실천적인 형태를 제시한 작가로 칭한다. 그는 해방을 고작 2년 남겨 두고 일제의 종교 황국화 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시범적인 대처승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 났다.   당시 선암사 부주지였던 아버지 밑에서 그는 지난 48년 여순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고요한 유년을 보낸다. 그가 어린 눈으로 목도하게 되는 역사의 첫 물결은 여순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체험은  훗날 작가에게 치유되지 않는 마음의 상처를 남김과 동시에 그의 소설문학을 이루게 되는 값진 문학적 자산으로  자리매김 된다. 50년대 식구들을 따라  忠南 논산의 집에서 6·25를 맞은 때가  그의 나이 여덟살이었다. 전쟁 중 곳곳에 피난을 다니며 여느 사람들과 다름없이 갖은 고초를 겪은 그는 이유 없는 동족 상잔의 비참함과 처참함을 진한 인상으로  뇌리에 새긴다. 이렇게 우리 민족사의 거대한 물결들을 건너온 趙님은은 58년 광주서중을 졸업하고 집이 서울로 이사하면서 보성고등학교로 진학한다.

  그의 문학의 싹을 틔운 곳은  62년 東國大 국문과에 입학하면서이다. 여기에서 홍신선, 강희근 등의 문우들과 만나면서  뜻을 키워 나가는 그는 대학시절 시를 즐겨 썼다. 69년 군에서 제대한 후 조금 움츠리던 그는  70년 동구여상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하며  현대문학 6월호에 단편 누명을 발표한다. 작가 조정래의 소설적 특색이  조금씩 싹을 보이기 시작하는  작품은 지난 72년에 발표한  초기 중편 [청산댁].  여기에서 그는  빈농출신의 한 여성이 겪는 고난에 찬 삶과 그 역사의 거친 질곡으로부터 형성되는 성격을 묘사해 냈다.   또한 이 작품은 일제 식민지·징용·2차대전·해방·한국전쟁·분단·베트남전 등  우리 최근세사의 생생한 장면들속의 우리네 삶을 관통해냈다.   순종적인 농촌 아낙네 청산댁은 훗날 태백산맥의 강인한 빨치산 전사로 변모하는 외서댁의 등장을 예고하는 지도 모른다. 이렇듯 70년대 이래의그의 소설은  당대의 어느 작가들보다 한발 앞서서 사회적 모순과 분단 모순에 대한  깊은 작가적 관심을 드러내는것으로 꾸준한 문학적 주제가 됐다. 지난 74년 발표한 황토, 빙하기, 동맥에 이어 81년의 유형의 땅 그리고 82년의 불놀이 등이 이에 해당된다.  

  73년 교직을 떠난 그는 월간문학 편집일을 맡으면서 소설 집필에 본격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했다. 청산댁의 문학적 성과는  6·25전쟁의 상처와 참상을 보다 은밀히 드러낸 유형의 땅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그의 문학이  역사적 성격이 가미되어  조직적 구상에 근거해소설적으로 형상화된 작품은 장편 불놀이이다.  작가의 말처럼 6·25를 소재로 했으되 전쟁사가 아닌  민족사의 큰 맥락에서 소설적 형상화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에서 보여 준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민족의 분단현실에 대한 작가의 천착은 이윽고 태백산맥이라는 거대한 대하를 이루게 하는 여러 지류의 역할을했다. 이러한 저변에는 작가 특유의 장엄한 구상력 그리고 이것을 우리 민족사의 흐름과 결합시키는 그의 투철한 역사의식이 자리잡고 있어서 가능했던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작가가 태백산맥을 세상에 최초로 내놓은 것은  지난 83년 현대 문학9월호에 연재를 시작하면서이다.   4년 8개월의 시간이 흘러 이 작품은 일부의 논란을 뒤로 한 채  한국현대사의 기록을 재조명하는 역사대하소설이라는 수식어로 우리들 앞에 다가와 있다. 작가는 해방과 분단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풍랑이 민중들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48년 10월의 이른바 여순사건을 화두로 6·25때까지를 살펴보면서  우리 민족이 왜 분단으로 치닫을 수 밖에 없었는가를 진지하게 탐색했다.  그래서 그의 고향은 어쩌면 출생지인 昇州라기 보다는 우리 민족이 치열하게 걸어오고 헤쳐온 역사의 길이요 국토의 등줄기를 오르내리는 태백산맥으로 상징된  이 땅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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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ray09_up.gif 작가 조정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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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y09_up.gif 혼 불

'혼불'에 쏟은 최명희님의 불꽃 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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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웬일인지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님은을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도 간절한 일이야. 날렵한 끌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파나가는 것이다” 최명희(崔明姬)님은의 대하예술소설 ‘혼불’(한길사 발행)은 작가의 이 말처럼 그렇게 생애를 기울여 ‘사무치게 갈아 새긴’ 작품이었다. ‘대하예술소설’이란 극찬을 들은 ‘혼불’의 작가 최명희님은 98년 12월11일 오후5시 서울대병원에서 향년 51세로 세상을 떠났다.  

최명희님은은 학창시절부터 이른바 '날리는 문사'였다. 10대 때 이미 각종 백일장에서 장원을 휩쓸고, 고3 때 쓴 수필 [우체부]는 고등작문 교과서(박목월·전규태 공저, 정음사 편)에 예문으로 실리기도 했다. 그러나 전북대 국문과 3학년 시절 '절필'하고 만다. 숙명여대가 주최한 전국대학생 문예콩쿨에 소설이 당선되었는데 당시 심사 위원이었던 안수길님은이 '구성이 너무 완벽해서 흠'이라고 평했다. 그 이후 10년 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스무 살까지는 천분으로 쓸 수 있다. 그러나 스무살이 넘으면 재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구체적인 현실이 필요했다” 고 작가는 말했다. 그 절망적인 절필의 시절, 그는 매일 밤 대학노트에다 울며 일기를 썼다. 일기는 10페이지가 넘어가기가 일쑤였 다. “나는 '하늘의 사랑'을 믿는다. 그것은 안 믿으면 없는 것이지만 믿으면 내것이다. 운명이나 사랑도 마찬 가지다”라는 작가는 그 10년의 공백기, 즉 '땅속 님은앗의 시절'을 고마워한다. 한국문학이 상업주의와 최초로 악수를 나누던 70년대에 문단에 나왔다면 상업화의 물결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 보성여고 교사로 재직하던 최님은은 80년4월 혼불의 첫 장을 썼다. “쓰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라며 자신이 선택한 작업에 괴로워하면서도 그는 ‘저희끼리 간절하게 타오르고 있는 한 시대와 한 가문과 거기 사람들의 쓰라린 혼불들, 그 불길이 소진하여 사윌 때까지 충실하게 쓰는 심부름꾼’의 역할을 자임했다. 그의 창작은 곧 거칠고 험한 시대를 살아야 했던 우리의 조상, 한국인들의 아직도 떠돌고 있는 혼들에 대한 해원(解寃)이었던 것이다. 최님은은 해방 이후 50년대까지를 배경으로 혼불 6부의 집필을 계속하려 했지만 끝내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5부를 집필중이던 96년8월 발병한뒤 97년1월부터 병세가 악화했다. 독신으로 산 그는 가족과 몇몇 지인 외에는 이 사실을 전혀 알리지 않은채 외롭게 투병해왔다. ‘동구 밖 길가의 나무장승처럼 서서’ 한국인의 보이지 않는 넋을 달래려 했던 최명희님은, 그의 바람대로 한국문학사에 남을 혼불과 함께 ‘모국어의 바다’로 흘러갈 것이다.

    

[노봉마을]입구 풍경

노봉마을 부근의 들녘

혼불마을 입구 장승

 최명희님 문학비

 

  “일필휘지(一筆揮之)를 믿지 않는다. 언어는 정신의 지문(指紋)이다” 최명희님의 삶과 문학은 그가 남긴 이 말에 담겨 있다. 그는 뼈를 깎고 살을 바르는 듯한 혼신의 자세로 혼불을 썼다. 80년 등단 이후 초기에 단편소설 몇 편을 쓴 것 외에는 17년동안 혼불집필에만 전념했다. 마치 가느다란 명주실을 한 올 한 올 짜서 거대한 벽화를 그려나가듯 한 시대 한국인의 역사와 삶과 정신을 문학으로 복원해냈다.

 

  혼불은 일제시대인 1930년대 이후 해방까지 전북 남원땅의 매안 이씨 가문에서 무너지는 종가를 일으키려는 종부(宗婦) 3대(청암부인, 율촌댁, 효원)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원고지 약 1만5000여장 분량(5부 10권)의 대하소설로 뛰어난 문학성과 함께 당시 서민의 관혼상제 등을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묘사해[풍속사의 보고]로 평가받고 있다. 내용은 무너져가는 종가를 지키는 며느리 3대와 잡초같은 삶을 이어가는 보통사람들의 얘기로 이어진다. 일제라는 시대적 배경과 독립운동과 같은 숨가쁜 역사도 담고 있지만 정작 그 내용은 고난의 시대를 이겨나가는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집중적으로 그리고 있다.일제의 수탈과 근대사의 격동 속에서 양반사회의 기품을 지키려는 주인공들의 노력, 한편으로 평민·천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서럽게 살면서도 민족혼의 회복을 위해 몸부림쳤던 민중의 피와 눈물이 배어 있다. 혼불은 사건, 인물 중심의 소설이 아니다. 서사시의 장중함과 판소리의 흥이 있는 이야기다. 작가가 철저한 자료 수집과 고증, 중국현지답사 등을 바탕으로 요즘 감각으로는 따라 읽기도 힘들 만큼 꼼꼼한 문체로, 보석처럼 숨겨진 우리말을 찾아내고 조탁해 전래의 세시풍속 관혼상제 음식 노래와 관제(官制)등 생활사와 풍속사를 기록한 이 소설은 그대로 생생한 한국학·민속학 자료이다.

      

  15년 10개월의 각고의 시간80년 봄 4월부터 쓰기 시작한 {혼불}은 지금까지 제1부(82년, 동아일보사), 제1·2부(91년, 한길사)로 먼저 출간 된 바 있다. 이번에 묶여지는 3·4부는 91년에 나온 1·2부에 이어지는 것으로 1부에서 4부(전8권)에 이르기까지 모두 15년 10개월이 걸렸다. 특히 3·4부는 88년 9월부터 95년 10월까지 월간 {신동아}에 7년 2개월 동안 총85 회가 연재되었다. {혼불}은 한국 월간지 사상 가장 오랫동안 연재된 소설이란 새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시간과 기록이 작품성을 담보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작품이 씌어지는 시간은 산술적으로 계산하기 어려 운 성질의 것이다. 작품 주위의 온갖 '소문'과 일화들(파라 텍스트)은 그 작품이 인정받고 난 뒤에라야 활동하 는, 신작로를 달려나는 자동차 뒤에 일어나는 먼지일 뿐이다. 작품은 오로지 작품이다. 작품은 작품일 때만 순결한 대중성과 고전으로서의 보편성을 얻는 것이다. 문학은 문학의 이름으로 평가받고 문학으로서 독자들과 살아 있어야 한다는 믿음을 최명희님은은 어 느 작가 못지 않게 갖고 있다. 그의 생애가 이 믿음을 떠받치고 있는데, 그의 삶은 ‘문학적’이 아니다. 그의 생은 문학 그것이었다.

 

  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쓰러지는 빛]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그는 그해 봄 뜻밖의 교통사고를 당해 병상에 눕고 말았다. 그 병상에서 씌어진 첫 장편이 바로 {혼불} 제1부였다. 그때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혼 불에 쏟아온 그의 열정은 거의 종교적이었다(작가의 절친한 친구들은 그가 살던 아파트에 庵자를 붙여 ‘성보 암’이라고들 불렀다). {혼불}은 흡월(吸月)의 소설이었던 것이다. 작가는 우선 근원, 즉 작가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그리움을 흡월하였다. “우주 공간에 구체적인 존재로서 생물학 적인 '나'를 있게 한 어머니와 아버지를 비롯, 그 어머니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그 형제들과 그 보다 더 윗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세보(世譜)의 사다리는 항상 나에게 설레는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고 작가는 말했다. 저러한 상상력은 추상이나 관념이 아니었으니 그 조상들이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생각 하며, 어떤 옷을 어떻게 또 왜 입었고, 어떤 집에서 무엇을 먹었는지, 위와 아래 그리고 좌와 우와는 어떤 관계 와 입장이었는지를 궁금해한 것이었다. 이 궁금증이 {혼불}이라는 극사실주의 세밀화를 가능케 한 추진력이었다 .

  

  만년필과 최명희님은와의 '문학사'는 각별하다. 만년필 꿈을 꾸고 10년 동 안의 고독에서 벗어났으며, 이번에 완성한 {혼불} 제3·4부, 아 니 그 이전에 나온 1·2부는 물론이고 그의 모든 글을 만년필이 아니었다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최명희님은 는 '독실한 만년필주의자'이다. 독실한 만년필주의와 승화된 영물의 전율시간이 지날수록 만년필이 돌올해지는 까닭은 두말할 나위없이 컴퓨터의 위력 탓이다. 최명희님이 한 신문의 칼럼에 적은 만년필 예찬론의 한 대목에서 그의 만년필은 확장된 손가락(지문 이 선명하게 남는)이며, 먼길을 떠나는 말(馬)이고, 인광을 밝히며 접신하는 도구(神物)이다. 그 글을 조금만 더 읽자.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황홀하게 사로잡는 것은 만년필의 촉끝이다. 글님은을 쓰면서도 흘리어 순간순간 그 파랗 게 번뜩이는 인광에 한숨을 죽이게 하는 촉끝은, 한밤중에도 눈 뜨고 새파란 불을 밝힌다(…)나는 때때로 내가 본 이 세상의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이 이 만년필 눈이 아닌가, 찬탄을 금치 못한다.”이 영물은 마 침내 우주와 혼교(魂交)하는데, 우주의 혼인 새벽 푸른빛을 만년필은 우선 등으로 받아들인다. 만년필에 내려앉 은 푸른빛이 “만년필 등에서 날렵한 촉끝으로 쏟아지며 또 다른 불꽃을 일으킬 때, 나는 우주와 만년필의 교감 에 전율하였다.” 이 순간, 만년필은 변신하며 확장하는 것이어서 결국에는 작가 자신일 것이었다. 그렇게 {혼 불}은 한 자 한 자 씌어졌으니 {혼불}은 암각화였다.

 

   그리움을 찾아가는 힘 '혼불'작가는 {혼불}의 무대인 전북 남원의 노봉 마을을 자주 찾았다.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하지만, 그래서 근원적인 질문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마을의 입구에서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입향할 적에 처음으로 마주 쳤을 노봉의 하늘과 운명적인 만남을 이룬다. 작가는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돌이켰다.“어느 해 여름 석양의 고향 정거장에서 백일홍 꽃밭에 앉아, 하염없이 불타는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울었다. 무심코 기차에서 내린 나의 눈에 고향 마을의 어깨 뒤편 서산(노봉) 너머로, 장엄하게 지는 해와 황홀하게 물드 는 주홍의 구름이 들어왔다. 찬란하면서도 순결한 비의를 머금은 낙조는 그때까지 내가 본 일이 없는 신비로운 날개를 온 하늘에 펼쳐 나를 맞이했다. '어서오라'고. 나는 그 함성과도 같은 구름 속에서 입향조 할아버지의 눈빛을 섬광처럼 만났다. 나는 전율하였다.” 이 또한 흡월이었다.

 

 

찬란하도록 아름다운 소설, 혼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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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만들기에 대한 최명희의 '혼불' 같은 투신의 결정이 곧 {혼불}이다. 만 17년 동안 이 작품에 매달린 신들림과 각고의 세월이 그렇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이런 표현에 엄밀한 사실성을 부여한다. 그래서 그가 묘사한 우리 삶의 진짜배기 원형질이 슬프고 아름답게 차근차근 다가온다. 이 소설의 특기할 만한 미덕은 바로 이 점에 있는 듯하다. 탄생과 결혼과 죽음의 의식(리추얼)이나 그 사이에 낀 여러 풍속사의 극채색에 가까운 묘사는 놀랍다. 그 속에 포괄된 의미들이 한국인의 생활을 규정하는 것인지, 우리네 정신의 본향이 그걸 요구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하면서, 어떻든 먼 회상여행을 거쳐 오늘의 나를 탐색하게 만드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아, 이런 소설도 있구나 싶고 이건 미싱으로 박은 이야기가 아니라 수바늘로 한 땀 한 땀 뜬 '이바구'라는 걸 새삼 느낀다.....최일남(소설가).

 

  이 찬란하도록 아름다운 소설 {혼불}은 여성적인 넋의 고혹스러움과 섬세한 문체의 마력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러면서도 대하 서사시적인 규모를 지닌 일대 거작이며 엄청나게 폭이 넓은 사회소설이다. 이야기 중심, 사건 중심이 아닌 소설 장르의 새로운 영토를 개척한 이 작품으로, 최명희의 소설사적 지위는 이미 확고한 것으로 굳어졌다. 그는 우리가 대대로 전승해온 풍속의 세계를 최대한 정밀하고 자상하게 또한 아름답게 복원시키는 작업을 통하여, 마치 우리 민족의 참된 정체를 지키려는 수호여신과 같은 풍모를 띠게 된다. {혼불}은 앞으로 소설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우리 민족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중요한 문헌의 하나로 남게 될 것이다......이동하(문학평론가)

 

  최명희는 원고지 한 칸 한 칸에 글님은을 써넣는 것이 아니라 새겨넣고 있다. 그의 글님은은 철필이나 만년필로 쓰는 것이 아니다. 아주 정교하게 만든 정신의 끌로 피를 묻혀 가면서 새기는 처절한 기호이다. {혼불}은 나를 숨막히게 한다. {혼불}은 지금 우리 문학에 횡행하는 온갖 소음과 기만을 무섭게 경고한다. 최명희, 그는 분명 신들린 작가이다......고은(시인).

 

  최명희는 문체에 관심하는 희유한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정겨운 서정성과 예스러운 정취를 지향하는 문장으로 된 {혼불}은 우리 말의 보고로서 주술적인 힘과 기운마저 가지고 있다. 우리 겨레의 풀뿌리 숨결과 삶의 결을 드러내는 풍속사이기도 한 이 소설은 소리 내어 읽으면 판소리의 가락이 된다. 독특한 울림이 호소력을 발휘하는 노작이다......유종호(이화여대 교수)

 

  일제 식민지의 외래문화를 거부하는 토착적인 서민생활 풍속사가 {혼불}에 이르러 비로소 정확하고 아름답게 형상화된다. 역사의 격심한 갈등과 대변혁 속에서도 의연히 민족혼의 알맹이를 마모시키지 않고 영글 수 있게 만든 것은 옹골찬 여인들의 한 많은 삶이 다져낸 넋의 아름다움 때문이리라. 청암부인을 비롯한 숱한 우리 민족의 어머니와 아내, 여인상을 최명희는 애절함과 그리움으로 우리 시대에 부상시켜 준다.......임헌영(문학평론가)

 

 

gray09_up.gif 혼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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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불]의 작가 崔明姬(최명희)님은 혼불처럼 목숨이 다할 때까지 한 작품에만 매달리다가 끝내 혼불처럼 꺼져갔다. 자그마치 17년동안 오직 「혼불」에만 온 정성을 기울여 왔던 작가는 5부 10권으로 된 전집이 발간되기 전 이미 자신이 암에 걸린 것을 알았지만 아무에게도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병원에 입원을 했다.「또 다른 깊이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유를 들었다.결국 올 10월 암수술을 받았지만 세상을 떠났다.오직 혼불을 살리는 작업에만 줄곧 「투혼」해 왔으니 기진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 작가는 생전에 『인삼을 캐고 나면 地靈(지령)이 빠져서 그 땅엔 아무 것도 심을 수 없다』고 비유했다. 더욱이 사람이야 온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무엇보다도 감동한 것은 그 문장이 우리말 고유의 리듬과 울림을 고스란히 살리고 있다는 데 있다.소리 내어 읽으면 그대로 판소리가 되었다. 실제로 작가는 원고지 한칸을 메울 때마다 누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 소리 내어 읽어 나갔다고 한다. 눈으로 읽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운율을 타고 가슴에 척 안겨드는 것이 아닌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소설의 배경인 남원땅은 羽調(우조)가 많고 산천초목도 떠는 듯한 호령조의 동편제의 산실이었으까 꿋꿋했던 조상들의 정신을 담기에는 제격이었다.또 하나는 당시의 세시풍속 관혼상제 음식 노래 등을 담아 남원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정월 대보름날의 달맞이나 상가의 풍속,상여 나가는 모습은 민속조사보고서처럼 치밀했다.사찰의 사천왕상을 취재한 원고지만도 9백쪽에 달했으니까 혼불은 한낱 소설만은 아니었다.『남녀가 만나 옷고름 한번 제대로 푸는 일이 없다』고 할 만큼 말초적 재미라곤 전혀 없는 이 소설이 지금까지 80여만부가 팔려나간 것은 90년대 한국문학이 거둔 가장 큰 성과였다.소설들이 기교만을 앞세운 언어를 찾아서 혼란을 부추길 때 작가는 그 앞에서 「모국어정신」으로 버틴 것도 잊을 수가 없다.『시인은 끝끝내 언어를 통해서만 자신을 완결하는 사람』(「백석전집」 이동순)이라고 했지만 작가에게서 언어란 민족의 순수 그것이었다.그 고유어를 찾아서 중국 옌볜과 선양을 두달 넘게 두루 찾아다녔다. 순수한 우리말을 찾아서 작품으로 되살린 것이다.지난해 9월 문화계와 정­재계인사 1백50명이 모여 「혼불을사랑하는 모임」을 가진 적이 있다. 작가의 고독한 창작작업을정신적으로 지원하고 작품읽기를 널리 펼치자는 취지였다. 위대한 작가와 예술활동은 그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그 사회와 동시대인들의 관심과 격려를 통해 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날 혼불이란 우리 몸안에 있는 불덩어리라고 했다.사람이 제수명을 다하고 죽을 때 미리 그 몸에서 빠져나간다는 혼불은 목숨의 불,정신의 불이었다. 그러니까 존재의 핵이 되는 불꽃이다. 혼불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재생시켰고 풍속사를 정리해줬다. 무대는 1930년대부터 43년까지였다. 그 이후의 현대사를 이어가기 위해서 작가는 「완간」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소설은 한 시대를 증언하는 역사책이다. 양반들의 허위를 고발한 박지원의 「호질」이나 신분제도에서 벗어나지 못한 허균의 「홍길동전」은 곧 그 시대의 역사였다. 홍명희의 「임꺽정」은 왕조실록에도 등장하는 내용이어서 더욱 그렇다. 잃어버린 역사와 말을 복원하는 데는 한 시대를 닮은 소설이 제격이다. 「혼불」은 훌륭한 역사자료이다. 현지에서 조사한 우리말사전이다.그 속에 담긴 민속을 모아 풍속사를 만들 수 있고 천민들이 사용하던 말을 찾아 문학사전을 만들 수도 있다. 또 외국어로 번역해서 「혼불」이 세계 속에서 타오르게 하는 사업도 잊지 말기 바란다.작가 최명희의 뜻이 계속 이어져서 민족혼을 찾아야 할 때다.

 

 

[노봉마을]의 문학비

복원된 종가집

 종가집의 모습

 종가집 정원

 

  작가 최명희와'혼불을 사랑하는 사람들' 결성식이 진행되었다. 모임에는 어느 문학가의 수상식 자리에서는 볼 수 없는 다소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작가 최명희는 이른바 문단활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오직 작품으로 스스로를 말하는 편이었다. 그의 작품과 문학적 성과를 일찍부터 평가하기 시작한 평론가들도 문단조직과는 별로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그 극한까지 보여주었고,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 이토록 절실한 작가가 없었던 점을 새삼 상기하지 않더라도 작가는 흔한 문단계의 사람은 아닌, 그것이 일부러 의도된 것이 아닌, 그의 생활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를 이끌었던 점을 참고하더라도 이것은 어떤 순수 열광 마니아들을 만들어내기 좋은 토양이 되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혼불}을 사랑하고 거기에 빠져드는 사람은 감성과 이성의 인자들이 흡사한 이른바 동류의식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이도, 계층도, 성별도 상관하지 않는 진폭의 세계이다.   

  그리하여 이 단재상 시상식 자리를 계기로 자연스럽게 '작가 최명희와 혼불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의 결성이 이루어진 것이다. 사실, 책이 출간되면서부터 이런 움직임이 있었지만 작가가 이것을 알게 되고서는 "죄송하고 쑥스럽다"며 한사코 반대했었다. 그러나 주변사람들로부터 더 이상 {혼불}은 작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 동시대인들의 문화적 자산이라는 설득에 그도 "그저 고마울 뿐"이라며 "저는 정말 천군만마가 아니어도 좋은 단지 한 사람만이라도 내가 하는 일을 저버리지 않고 오래오래 지켜봐주기를 바랬는데, 이렇게 귀한 분들이 『혼불』을 사랑한다고, 그것도 큰 소리로 말씀해주셔서 더 열심히 살고, 더 열심히 써야겠다는 생각뿐"이라고 하였다.

 

 

gray09_up.gif 혼불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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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혼불'을 유작으로 남기고 1998년 겨울 세상을 뜬 소설가 최명희.

  조선시대 양반집 종가 여인들의 인생역정을 그린소설 '혼불' 의 주무대인 전북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과 매안마을 일대가 '혼불 문화마을' 로 새롭게 단장됐다. 이곳은 혼불을 쓴 소설가 고 최명희(崔明姬)님은의 고향이자 소설 속에 나오는 청암부인의 생가가 있던 곳이다. 노봉마을 입구에는 崔님은의 문학세계를 기리는 문학비와 '꽃심을 지닌 땅' '아소님하' 를 새긴 한쌍의 장승이 나란히 세워졌다. 남원시는 사매면 매안리∼면소재지∼서도역 삼거리∼노봉마을에 이르는 길을 ‘혼불의 거리’로 정하고 이정표를 세웠다. 마을 안에는 양반집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종갓집을 그대로 복원,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이 소설 속의 체취를 한껏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또 매안마을 입구에는 '혼불마을' 이라는 자연석을 세우고 사매면 소재지에는 崔님은의 문학혼이 길이 이어지기를 기원하는 '기념비' 도 건립됐다. 이와 함께 노봉마을서 매안마을까지는 '혼불의 거리' 로 이름을 붙이고, 앞으로 노봉마을 입구에 쉼터로 이용할 수 있는 쌈지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gray09_up.gif 핏줄에 휘감기는 옛사람의 넋(김수연-2000년『혼불』독후감 공모 최우수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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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 계절로 접어드는 새벽 공기가 알싸하다. 잠든 아이의 발치에서 나는 『혼불』의 마지막장을 덮었다. 태어나 처음 아이를 키우며 내 시간은 오로지 아이에게만 묶여진 것처럼 느껴졌다. 책을 읽는다는 건, 게다가장편소설을 읽는다는 건, 내겐 어울리지 않는 사치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 『혼불』을 잡기까지 망설임을 거듭했고, 잡고 나서도 과연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밤잠을 쪼개며 1권부터 차근차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혼례장면을 한 줄 한 줄 읽어가며 알 수 없는 설렘에 책으로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일상에서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 그럴 필요조차 염두(念頭)에 두지 않았던 가치들이 감전된 듯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쩌면 내가 이 책을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다 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름답다'는 말로는 표현하기 벅찬 문장이었다. 효원의 화관에 내려앉은 나비 날개의 떨림마냥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조금도 서두르지 말아라. 겁을 내서도 안 되지……. 혼행하는 강모에게 이기채는 이렇게 당부했다. 이 말은 『혼불』을 읽는 내게 내려지는 분부이기도 했다. 이 세계에 발 들여놓음이 쉬운 이 아니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겁을 내고 주춤거려서도 안 된다는 엄명 같은 것. 끝까지 나는 이 말을 기억하고자 애썼다. 서두르지 말고, 겁내지도 말아라……. 그리고 결국 5부의 끝까지 한 계절을 꼬박 쪼개어 다다를 수 있었다. '산다는 것'의 의미가 화악 와닿지 않던 시간이었다. 종손에게 시집와서 한복을 입은 채 산에 올라가 조상의 산소에 예를 올리던 신혼의 날……. 촌각을 다투며 변화해 가는 세상에 나 혼자만 거꾸로 놓여져 있는 것만 같았다. 남편과 나는 온라인 채팅을 통해서 만났던데다 둘 다 지극히 평범한 젊은이들의 삶을 누리고 있던 터라, 나는 결혼 전까지 남편의 뒤에 그렇게 커다란 책임감이 지워져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한편으로는 속은 것도 같았다. 한편으로는 되돌리고도 싶었다. 나는 구습의 굴레로부터 자유롭고 싶었고, 어른을 대하는 모든 동작은 하나같이 힘에 겨워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집안의 모든 행사는 여자를 혹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는 당치않은 생각마저 들었다. 한 해 한 해 지나가며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조금 생각이 달라지기는 했으나, 내게 있어서 여전히 풍습은 어느 정도 불필요한 구습이었고, 그것에 아름다움이 깃든 혼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한 때 나는 『혼불』을 만났다. 정확히는 시어머니로부터 『혼불』을 물려받았다. 어머니께서는 전화를 걸어 '『혼불』 한번 읽어볼래?' 하셨다. 나는 『혼불』이 어떤 책인지 알지 못했지만, 어머니께서 읽고 건네주실 정도라면 정말 좋은 책일 듯싶었다. '10권인데, 갓난이 키우면서 읽겠냐?' 하셨다. '읽어볼래요.' 했다. '천천히 한번 읽어보니라' 하셨다. 그렇게 만난 『혼불』의 세계는 미지의 것인 동시에 미지의 것으로 남아서는 안 되는 우리 민족의 역사였다. 시대 배경으로는 구한말과 일제 강점시대를 아우르지만, 고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를 관통하는 우리 민족의 역사를 주체적으로 한 획 한 획 짚고 넘어간 기록이었다. 읽다 보면 어느새 한민족으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러워지고, 머릿속이 시원해지곤 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까지 어느 교과과정에서도 이처럼 분명하게 내 조상의 발자취를 가슴 복판에 찍어주지는 못했다. 지금까지 번거로운 구습으로만, 힘든 노역으로만 보여지던 관혼상제의 전통이 여명을 받고 깨어나듯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절기를 지내고, 제를 올리는 그 모든 절차와 법도에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생각하며, 현세와 내세를 모두 거두는 깊은 철학이 숨겨져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조상들의 축제 한쪽에 서서 그 향기를 마시고, 체온을 느꼈다. 같이 달을 맞으러 가고, 연을 날렸으며, 혼백을 거두고, 상여를 뒤따랐다. 그것은 신비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애틋한 체험이었다. 내 것이면서도 잊고 살았던 삶의 한 조각을 찾아가는 것마냥 가슴 벅차오르기도 했다.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경이로움이었다.

 

    작가는 책의 어느 구석에서도 직접적으로 이 말을 토해낸 적이 없지만, 나는 빽빽하게 종이를 채운 글자의 병풍 너머 작가의 혼이 전하는 이 한 줄의 문장을 발견했던 것이다. 어느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에 미칠 수가 있을까. 하나의 소설로 인해 인생이 뒤바뀐다는 얘기는 한낱 지어낸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머니께서 굳이 이 먼 곳까지 책을 실어 나르신 데에는 뜻이 있으셨던 게다. 어머님 속뜻을 10분의 1이나 깨달았을지 모르지만, 그간 『혼불』에 취하고 젖어서 살았던 한 계절이 인생의 스펙트럼에서 유달리 빛나는 한 지점이 되리라는 것은 굳이 말로 이르지 않아도 벌써 짚어내고 계시리라. 종손의 아내라는 똑같은 운명을 지닌 어머니와 나 사이에 세대차라는 이름으로 쌓여 있던 높은 담장이 한 치 내려졌음을 어머니께서는 이미 예견하셨으리라. 고마우며 속 깊으신 분. 몇 마디의 훈계보다 에두르신 이 말씀이 더욱 가슴 깊이 꽂히어든다. 막 잠에서 깨어난 딸은 말간 눈망울로 빤히 나를 쳐다본다. 너는 아직 알지 못하겠지만, 네 핏줄 안에도 '혼불'이 타오르고 있을 테지. 한민족의 삶을 관통하는 시퍼런 혼불. 그것은 네가 어느 망망대해의 고도(孤島)에 떨어지게 되더라도 너를 너이게 하는 것. '민족혼'이라는 것이다. 엄마가 지금 깨달은 삶 속에 숨겨진 비밀을 너도 언젠가는 깨닫게 되겠지. 네가 어미만큼 자라기 전에 네게도 이 책을 물려주마. 엄마의 입으로는 차마 다 전하지 못할 먼먼 옛날의 이야기, 그리고 또 앞으로 다가올 세상을 볼 수 있는 이야기가 담긴 이 책을 말이다.

 

  

종가집 뒤안 풍경

[혼불]의 종가집 정원풍경

마을 산자락에 위치한 저수지

[혼불]이 서려있는 저수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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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y09_up.gif 토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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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사리라고 하는 전형적인 한국 농촌을 무대로 하여, 파란 많던 이조 말부터 시작되는 이 소설은 민족 전체의 문제를 다룬 서사시적인 과제와 아울러 개인의 내면적 갈등 및 인간 관계를 다루고 있는 방대한 스 케일의 총체 소설이다.

  지주이며 양반인 최 참판댁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친지, 소작인, 노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살인, 간음, 전염병, 흉년 등의 다채로운 사건의 배 경에 동학란, 한일 합방, 의병 등의 문제를 깔아 놓았다. 전통 사회의 붕괴에서 오는 가치관의 갈등을 다룬 이 소설은 제부는 최 참판댁 일가를 중심한 일대기가 파노라마처럼 전개됨으로써 우리 민족이 겪은 애환을 역력히 조감할 수 있는 서사시이며, 제2부는 최치수의 딸 서희로 이어지고 있다. 95년에 마지막 16권까지의 탈고를 끝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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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ray09_up.gif「토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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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현대문학사에 큰 봉우리를 차지하는 박경리님은의 대하소설 「토지」. 구한말에서 일제말기에 이르는 역사적 시간대와 한반도및 만주일대를 아우르는 장대한 스케일은 우리 문학사에서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집필기간 26년에 전16권. 방대한 규모에 걸맞게 「토지」에는 수많은 등장인물과 사건, 장소, 시간들이 복잡하고 치밀하게 얽혀있다. 「토지」는 또 우리말의 보물창고다.

  경상도 남부지방의 사투리를 비롯한 각종 방언, 속담, 풍속어 등을 풍부히 담고 있는 「토지」는 일찍부터 국문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토지」읽기의 길잡이가 될 「토지사전」(솔출판사)이 나와 화제다. 94년 소설 완간 기념으로 기획된후 3년간의 작업끝에 나온 이 사전은 「토지」에 대한 모든 것을 망라한 단행본 사전. 국내에서 단일 문학작품에 대한 사전이 나오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문학평론가 김경원 정홍수님은, 젊은 국문학자 김형태 이승윤 하태욱 박윤희님은, 시인 안찬수님은 등이 공동작업 끝에 펴낸 이 사전은 분량이 750여쪽에 달해 소설의 무게를 사전에서도 느낄 수 있다. 사전은 ▲어휘 ▲속담 ▲풍속 및 제도 ▲인물 ▲사건 ▲연대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제어는 모두 3,000여개. 이중 2,515개에 달하는 풍부한 어휘는 한권의 국어사전을 방불케 한다. 토박이말, 방언, 한자말 등은 물론 일본말까지 「토지」 속의 어휘들이 망라돼 있다. 뜻풀이는 물론 구체적인 용례를 함께 싣고 있어 「용례사전」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며 「송낙」은 「여승이 쓰는 모자」라는 뜻과 함께 「토지」5권 262쪽의 「어느덧 여자는 송낙을 쓰고 있다. 소복에 송낙이라니」라는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속담편에는 「등빠진 적삼에 보리죽」 「바지랑대로 하늘재기」 등 속담과 상말, 수수께끼와 관용어구 430여개가 수록되어 있다. 인물편에는 역사적 인물과 김길상 최서희 등 주요 등장인물 100여명의 일대기를 정리하고 사건편에서는 간도협약, 관동대지진 등 국내외의 역사적 사건 등을 상세히 설명했다. 책임편집을 맡은 문학평론가 임우기님은은 『「토지」의 문학적·언어학적 성과를 폭넓게 공유하기 위해 사전 작업에 착수했다』며 「토지」를 읽는 독자뿐 아니라 국문학·언어학 연구자들에게 유용한 길잡이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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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y09_up.gif 소설 지리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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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은 이병주의 다른 장편 <관부 연락선>, <행복어 사전> 등과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장편 대하 소설이다. 이병주의 소설 세계는 사건을 에워싼 상황 전개가 광범위하고, 파란만장한 삶의 다채로운 분위기들이 펼쳐지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등단 작품인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한 그의 대부분의 소설들은 파란만장한 흥미있는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으면서 사상적이며 지성적인 품격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 역시 우리의 생생한 역사를 배경으로 민족의 뼈아픈 시련을 유려한 필치로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이 <지리산>은 가장 격동기였던 일제 말기에서부터 민족 해방, 6 25 동란을 거쳐 휴전 협정이 이루어지기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아 그 격동의 현장을 다루었기 때문에 역사적 사건의 평가나 관점에 다양한모습을 제시해 주고 있다.

  <지리산>은, 우리 세대가 풀어야 할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민족사적 과업에 대한 실마리를 제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의 그물에 잡히지 않는 숱한 인간사, 승자가 되지 못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빨치산들, 그리고 역사의 행간(行間)에 묻혀 버린 숱한 비극의 주인공들이 엮어 내는 민족의 대하 드라마이며 민족의 뼈저린 아픔을 형상화한 민족 대서사시라는 소설사적 의의를 지닌다.

 

gray09_up.gif 지리산

 

[주요내용]

  이규의 집안은 본래 천석지기였으나 몰락하여 정미소 경영으로 간신히 맥을 유지해 간다. 창님은 개명의조치가 내려진 1940년에 '규'는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京都)의 삼고(三高)에 입학하게 된다. 여기서 일본인 세스꼬와 연애를 하게 되고 마늘 사건으로 학교에서 쫓겨난 박두경이란 학생을 만난다. 민족 의식을 지닌 박두경과의 대화를 통해서 '규'는 민족혼을 생각하게 되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한편, 그 해 7월 '규'의 중학교 친구인 태영이 유학을 왔다. 태영은 천재 소리를 들을 만큼 수재였으나 결국 학업을 포기하고 독립 운동의 길을 걷기로 한다. 그래서 태영은 우유 배달부로 취직을 한다. 그는 훗날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친 전검 시험에 1등으로 합격하여 세인들의 주목을 받기도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활을 지켜 나가면서 편지를 통해 알게 된 김숙자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러다가 태영은 같은 배달부인 무나까와의 영향으로 공산주의에 물들게 된다. 무나까와는 일본 공산당 창설의 시초가 되었던 동경 제국대의 '신인회' 멤버 중의 한 사람으로 전향을 거부, 우유배달부로 신분을 위장하여 숨어 살고 있는 자였다. 곧 이어 미 일 전쟁이 발발하자 반도(半島) 청년들에게도 징병제가 실시된다. 태영은 이를 피해 지리산으로 들어갈 결심을 하게 된다. 하준영이란 선배를 만난 태영은 김숙자를 남겨둔 채 조선으로 돌아와 하준규, 노동식 등과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그는 그 곳에서 보광당이라는 집단을 결성하고 식량 비축, 무술 훈련 등을 조직적으로 행한다. 이즈음 지리산 내에는 하준규의 학교 선배인 차범수가 이끄는 또 하나의 집단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이규의 숙부와 조선 공산당 창단 멤버인 이현상을만난다.

  해방이 되자 반천골, 거림골, 보광당 도령들이 모두 패관산으로 모여 개간을 하면서 힘을 합쳤다. 그리고 이현상은 공산당 창설을 위해 즉시 서울로 올라가고 하준규는 H군 인민 위원회 치안 부장이 된다. 박태영은 그를 돕지만 이규는 고향으로 내려가 하영근의 딸 윤희와 결혼한다. 이규는 윤희, 하준규, 박태영, 노동식과 함께 1945년 10월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최남선 등과 만나 사학과 민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편 박태영, 하준규, 노동식 등은 공산당에 입당한다. 이규는 1946년 1월 여의도 공항에서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다. 박태영은 김숙자, 권창혁 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산당 당원 생활을 계속한다. 그러나 점차 박헌영을 위시한 당 지도부에 대해 불신을 품게 되고, 그로 인하여 근신 생활 후, 당원 자격도 박탈당한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부산을 들러 노조를 조직해 책임자로 있는 노동식을 만나 그릇된 상황 판단으로 당이 자꾸 폭동을 일으키라는 지령을 내리는 데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박태영은 함양군 당 책임자에서 조직책으로 강등당한 하준규를 만나게 되는데, 그 역시 자신의 목표와 당의 목표는 같지만 그 내부에는 상당한 모순이 있다는 호소를 했다. 다시 서울로 올라온 박태영은 민전 사무국에서 일하라는 지령을 받는다. 그러나 민전은 미 소 공동 위원회가 무기 휴회에 들어가자 개점 휴업 상태가 되고 만다. 그 후, 태영은 이현상을 찾아가 일을 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지만 박헌영은 이미 당원 자격이 박탈되어 버린 박태영에게 당분간 후방에서 공부나 하라는 말을 한다. 미 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자 정세는 공산당에게 더욱 불리해졌다. 그런데도 당 지도부에서는 아전인수 격의 상황 판단으로 대대적인 폭동을 계획하고 노동식, 하준규에게 폭동 지령이 내려진다.

  

  그 후, 하준규는 지리산 지구 인민 유격대 사령관으로 활동하다가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 정부가 수립되자 해주에서 열리는 조선 인민 대표회의 대의원으로 월북하게 된다. 이즈음 박태영은 김경주라는 고향 사람을 만나 비관론에 물들게 된다. 그는 그 해 10월 20일, 국군 14연대에 의해 일어난 여수·순천 반란 사건 발생 이후 무익한 살상과 그에 따른 가혹한 숙군 작업을 보고 공산당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된다. 49년 2월, 갑자기 찾아온 순이로부터 태영은 하준규가 월북하고 노동식은 경찰과의 전투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경찰에서는 지리산 빨치산의 물자 보급 책임자로 알려진 전태일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는 소식도 듣는다. 50년 2월, 다시 나타난 순이는 하준규가 인민군 소장이 되어 강원도에서 국군과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 해 4월, 태영은 노동식의 동창생인 문남석 형사에게 붙잡힌다. 그는 서울에서 무법 지대인 지리산으로 끌려가기 일보 직전에 고향 후배인 배명근 경위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지만, 재판을 받기 위해 서대문 구치소로 옮겨진다.

 

  그러던 중 6 25가 터지고 구치소에 있던 수감자들은 인민군에 의해 풀려나게 된다. 집으로 돌아온 태영은 김숙자와 뜨거운 해후를 하게 되고, 하준규의 군대가 아니면 전쟁에 끼어들지 않을 것을 결심한다. 하영근의 집 문제로 시 인민 위원장을 찾아갔던 태영은 김삼룡을 밀고한 안영달이 경기도 인민 위원장으로 있는 것을 보고 냉담한 태도 를 보인 것이 화근이 되어 태영은 정치 보위부에 끌려간다. 미군의 인천 상륙 작전 성공으로 전세는 갑자기 반전되었다. 태영은 숙자에게 꼭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이태와 함께 후퇴한다. 순창에 도착한 그들은 50년 9월 29일 결성된 조선 노동당 전라북도당 유격대 사령부 산하의 빨치산이 된다. 통신병이 되어 각기 떨어지게 된 이태와 박태영은 2만 명이 넘는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서 회문산을 기적적으로 빠져 나온다. 51년 6월 전북 부대에서 박태영, 이태 등은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의 승리 사단으로 전속된다. 덕산 전투 이후 남부군은 하동읍, 구례읍, 화개 장터, 곡성, 운봉 등 지리산 주변을 거의 돌다시피 하는데, 이태가 복귀했을 때는 16명이 넘던 소대원이 10명밖에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남부군은 반년 동안 인원의 절반 가량이 줄어들어 250명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10월 중순 경 부대가 재편되면서 이태는 부대 본부 요원이 되어 '승리의 길'이라는 신문과 전기를 쓰게 되고 박태영은 여전히 평전투원으로 남게 된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휴전 회담이 진행되고, 12월이 되자 한국 정부는 대대적인 공비 소탕 작전을 벌인다. 남부군은 악양 전투 실패 이후, 지리산 이 골짝 저 골짝으로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된다. 52년 1월 중순에 시작된 2차 공비 소탕 작전 때, 주능선을 넘다가 병력이 60명 가량으로줄어들고 또 행군 도중 공격을 당해 결정적 타격을 입는다. 남조선 최강의 유격대로, 남한 6도 빨치산 부대를 총지휘하던 남부군 사령부는 마침내 30명밖에 남지 않은 부대원을 거느리고 전멸 직전까지 이르게된다. 그들은 간신히 2차 공세를 벗어나지만 초라한 상태로 흩어진 병력을 모으면서 그 해 봄을 맞는다. 태영은 보급 투쟁 중, 이규의 사촌 동생으로부터 토벌대 대대장으로 있는 주영중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자신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면서도 그대로 산으로 올라가 버린다. 그 해 3월이 되자 다시 토벌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남부군은 30-40명의 소대 넷으로 재편성되어 개별 행동을 하게 된다. 3차 토벌작전이 끝날 무렵 남부군은 다시 40명 안팎의 소집단으로 움츠러들게 되고 그 와중에서 낙오된 이태는 결국 국방군에게 투항한다. 박태영은 입당하여 당원으로서 남부군 참모가 되라는 이현상의 권유를 받지만 이를 거부한다. 그러나 태영이 제안한 도피 전법으로 남부군은 한 명의 전사자도 없이 무사히 6월의 공세를 넘길 수 있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박헌영 계열은 종파 분자로 지명돼 숙청당하게 되고 이현상은 사령관으로서의 권위를 잃게 된다. 결국 빨치산에 대한 언급은 일체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조인된다. 평당원으로 강등된 이현상 일당은 경남 도당으로 이동하던 도중, 미리 잠복해 있던 경찰에게 이현상을 비롯한 중요 간부가 몰살된다. 이로 인해 박태영은 남은 대원들의 지휘자가 된다. 이영희가이끄는 경남 부대는 그 해 11월에 전멸한다. 이로 인해 빨치산의 조직적 항거는 종지부를 찍는다. 그럭저럭 53년을 넘긴 박태영 일행은 그 해 2월 순이를 만난다. 그는 순이로부터 하준규가 체포되어 사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54년 6월 전대원을 자수시키고 정복희, 순이 등과 함께 산에 남는다. 이 대하 소설의 대단원은 작가의 에필로그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이규는 56년 1월 프랑스에서 귀국한다. 그는 형무소에 있는 순이로부터 박태영, 정복희가 55년 8월 31일 지리산 청학동에서 경찰에 포위된 채 투항을 거부하다가 사살되고 자신만 체포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순이 역시 전향을 거부함으로써 사형된다. 숙자는 태영의 아들을 낳는다..

 

김용직 - 이병주의 '지리산' 해설 - 중에서

 

 

 gray09_up.gif 작가 이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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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y09_up.gif 남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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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그 아름다운 능선과 계곡에 피가 얼룩졌던 시절의 얘기는 이제 까마득한 전설이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청춘들이 그 산중을 방황하면서 죽어갔다. 이제 이름조차 기억하는 이 없는 그 주검들은 풍우 속에흙이 되었으나 그들이 불태웠던 허망의 정열에는 한가닥 장송곡도 없었다. 사랑도 미움도 환희도 분노도 마침내 모든 것이 투명으로 돌아간 역사의 강물 위를 인간은 또 흘러간다." '남부군'의 작가 이태(李泰)는 자신의 회상기를 이렇게 마무리한다. 세월은 흘러, 1949년 이래 5년간 1만717회의 교전에서 피아 2만명의 생령이 처절하게 죽어간 그 능선과 계곡들은 지금도 말없이 그곳에 머물러 있다.

  노고단 반야봉 삼각고지 덕평봉 세석평전 삼신봉 천왕봉 왕동재로 이어지는 지리산의 주산맥 골짜기에는곳곳에 빨치산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인민재판과 즉결처형이 이뤄졌던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하정계곡, 남로당 경남도당과 빨치산의 야전병원, 암반굴 아지트, 방앗간 등이 자리했던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 토벌대와 빨치산간의 마지막 격전지였으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사살됐던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등이 그 예다.

40여년 전의 역사는 지리산에서 조차 잊혀가고 있다. 산골짜기에는 물론, 산 아래 마을에도 여기저기 빨치산의 자취가 널려 있건만 마을사람 가운데도 그 내력을 아는 이들이 드물었다.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의 한 솔밭 아래에는 40여기의 무덤이 줄지어 있다. 빨치산들이 양민들에게 구덩이를 파게 한 뒤 집단 학살해 한데 파묻은 곳으로 전해지는데, 훗날 가족들이 시신을 거둬갈 때까지 연고자가나서지 않아 방치된 시신들을 마을사람들이 같은 크기의 봉분을 만들어 수습해 준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그러나 무덤 바로 아래쪽에 터를 잡고 사는 주민들조차 무덤에 얽힌 사정을 전혀 알지 못했다.

 

gray09_up.gif 남부군의 작가 이태

 

  1950년 종군기자 이태는 빨치산에 가담하게 되고,그가 생각하던 빨치산과 자신의 소극적인 행동에서 갈등한다. 청룡작전이 무너지고 토벌대에 쫓기면서 부상당한 이태는 자신을 간호하던 박민자와 사랑에 빠지나 본대 복귀명령으로 슬픈 이별을 한다. 그런데 이태는 시인 김영을 만나 동족간의 전쟁의 허무함을 토로한다. 계속되는 전투로 시간이 흘러 휴전소식이 들리는 가운데 대원들의 분위기는 어수 선해지고 남부군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궁지에 몰린다. 마침내 최후의 발악과 같은 전투가 벌어지고 낙오된 이태는 눈속을 헤매다 토벌군의 포로가 된다. 그의 기나긴 빨치산 투쟁도 막을 내린다

빨치산 부대에서 전사(戰史)편찬 임무를 맡았던 '남부군'의 작가 이태님은은 수년전 타계하면서 빨치산 주요인물 200여명의 활동기록을 딸에게 물려줘 귀중한 자료로 알려져 있다.

 

남부군 - 이태
   
 


 
본명 이우태. 1922년 11월 25일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다. 저널리스트가 되려했던 그는 '조선신문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국학대학 국문과를 2년만에 졸업하고 1948년에 '조선신문학원'을 졸업했다. 그해 서울신문 기자시험에서 수석으로 합격한 뒤 8개월간 일하다가 '합동통신'으로 자리를 옮겨 일하던 중 6.25를 맞는다. '인민군'의 서울 진입 후 평양의 조선중앙통신사 기자로 흡수되고, 전주로 내려가 통신업무를 맡게 된다.

1950년 9월 20일, 군산 앞 바다 오식도에 연합군이 상륙하면서 전주지사 기자들은 전북도당 간부들을 따라 전북 순창군 구림면 무명골짜기에 들어가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유격사령부' 대원이 되었으며, 회문산 '독수리 부대'를 거쳐 이현상의 '남부군'에 편입되어 17개월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중 1952년 부대에서 낙오된 후, 지리산 기슭 덕산에서 체포된 후, 수감생활, 고된 삶을 살다가 정해영 의원을 만나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이 때의 인연으로 6대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했다.

1975년부터 <남부군>의 집필에 들어갔으나 규제와 내용상의 이유로 출판하지 못하고 있다가 1988년 <남부군>이 간행되어 대대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97년 3월 6일 급환으로 별세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남부군> <한글공문편람> <여순병란> <천왕봉> 수필집 <기다림> 유고집 <시인은 어디로 갔는가> 등이 있다.
     
     

1988년 초판 발행되어 수많은 화제와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남부군」의 재편집증보판. 6.25전란 중 남한 빨치산을 대표하던 '남부군'을 주제로 한 체험적 수기이다. 남부군은 남한 최초의 조직적 좌익 게릴라부대였고 유일한 순수유격부대였으며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총수 이현상의 직속 부대였다. 남부군의 일원이었고 신문기자라는 전직 때문에 전사(戰史)편찬을 담당했던 저자는 이 부대가 궤멸하는 과정을 직접 보고 겪으면서 꼼꼼하게 기록했다.

저자가 이 수기를 기록하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대장동무는 꼭 살아서 돌아가 주세요. 그리고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어간 우리들의 삶을 기록해 주세요." 한 청년의 목소리는 언제나 생생하게 귓전에 남아 저자를 재촉했다고 한다. 또 겨울산에 피를 뿌리고 숨져가던 한 소녀가 마지막에 무엇을 말하려 했던가 남겨야 했다고 이야기한다.

책은 이처럼 북한정권에게마저 버림받은 채 남한의 산중에서 소멸되어 간 비극적 영혼들의 메아리 없는 절규를 담아냈다. 또 극한상황에 처한 인간의 벌거벗은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빨치산과 군경을 합쳐 2만의 생명이 희생된, 그 처절함이 세계 유격전사상 유례가 드문 엄청난 사건이 저자에 의해 비로소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다. 이 밖에도 저자는 냉혹한 자가숙청 등 빨치산 사회 내부의 모습을 목격한 그대로 들려준다.

 
 

적나라한 빨치산 실록

"나는 5년여에 걸친 소백.지리지구 빨치산 토벌전에서 피아 2만의 생명이 희생된, 그 처절함이 세계 유격전 사상 유례를 보기 드문 사건에 실록 하나쯤은 남겨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1922년생인 저자 고(故) 이태(본명 이우태)는 6.25 직전 서울신문.합동통신의 기자로 일하다 인민군의 서울 진입 후 조선중앙통신사에 흡수된다. 전주에 파견 근무 중 조선인민유격대 독립 제4지대, 즉 이현상부대라고도 불리던 남부군단의 대원이 됐고, 전사(戰史) 편찬 일을 맡는다. 이때 목격한 17개월 다큐멘터리가 이 책이다. 신간(2003년)은 88년 출간됐던 초판에 저자의 개인연보를 곁들인 재편집 증보판이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상상력으로 역사를 구성한 것이라면 '남부군'은 분식(粉飾)없는 적나라한 사실의 기록이다. 사실이 전달하는 구체성은 섯불리 흉내낼 수 없는 것이다. 저자는 97년 세상을 떠났다.  (글/신준봉)

 
* 출간 1988년

http://ofof.net/doc/d03_03.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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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y09_up.gif 천둥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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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은 8 15 해방에서 6 25 동란에 이르기까지 약 5년 동안에 우리 민족이 겪었던 수난사를, 역사의 뒷전에 있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부각시키려 했다.

  민족사의 비극을 정면으로 다루기보다 그 비극의 현장과 거리를 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삶에 얽힌우여곡절의 이야기와 그들의 평범한 삶이 역사의 비극과 얼마나 깊이 관련되어 있는가를 보여 주고있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과 그들의 성격, 그들의 삶의 태도가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상보다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역사적 사건이나 혼란스러운 사회적 변동에 대한 사실주의적 서술은 이 소설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작가적 관심의 초점은 인물에 있으며, 그 인물들을 통해서 민족사의 비극을 간접적으로 조명하려는 것이 작가의 의도이다. 그 인물들은 영웅이나 호걸이 아니라, 신길녀와 같은 이름 없는 촌부이거나 그녀가만나는 주위의 평범한 민중들이다.

  신길녀는 본래 월전리 최님은 가문의 청상과부였다. 어느 날 밤, 머슴 차병조에게 겁탈을 당하고 불륜의 님은앗을 잉태하게 된다. 그 일이 있은 직후 자취를 감추고 떠난 차병조는 해방 이듬해 초겨울에 다시 나타나 두 번째로 길녀를 겁탈한 후 여관집에 팔아넘긴다.

  길녀는 장춘옥이라는 여관 겸업의 술집에서 부엌일을 도와주면서 지내다가 탈출을 한다. 그러나 그녀의 탈출을 도와주던 지상모라는 트럭 운전수는 교묘한 방법으로 그녀를 강간한 후 산골의 어느 작은 여인숙에머물게 한다. 길녀는 지상모에게 마음을 의탁하면서 여인숙의 주모처럼 지내던 중, 전에 머슴살이 하던 황점개가 찾아온다.

  그녀는 황점개가 좌익 운동을 하다가 피신해 다니는 입장임을 알게 된다. 이듬해 봄, 지상모의 아이를 낳은 길녀는 점개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점모에 대한 연민의 정 때문에 그를 도와 탈출시킨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지상모는 곤욕을 치른다. 그후 길녀는 지상모의 집을 찾아가서 지상모의 아내인 창래 어멈과 함께 생선 장수를 하며 지내다가 6 25를 맞아 어쩔 수 없이 친정으로 돌아온다.

  친정에 돌아온 길녀는 피난을 가지 못한 차병조가 친정집에 숨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차병조를 은닉한 일로 길녀의 부친 신현직님은은 인민 위원회에 끌려가 고초를 겪게 되지만 황점개의 도움으로 풀려난다. 그 기간 중에 길녀는 친정집을 떠나 지상모를 다시 만나게 되지만 박대를 당하고 돌아온다. 점개는 이 이야기를 듣고 지상모의 비인간적 태도에 분개하여 그를 찾아가 살해한다.

  후퇴하는 괴뢰군에 합류하지 못한 점개는 빨치산이 되고, 길녀는 황점개의 순정과 이상에 감동하여 그에게 몸을 허락한다. 그 해 겨울, 빨치산 토벌 작전이 시작되었을 때, 점개는 빨치산 동료인 박석호의 총에 맞아 죽는다. 어둠 속에서 이 광경을 목격한 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개를 '여보'라고 부른다. 이 소리는 그녀가 서산 댁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탯줄을 끊은 이후에 처음으로 사내를 향해 해보는 말이었다.

 

 

한 평론가가 김주영을 보고 소설 노동자라고 할만큼 한 달에 500여 매의 원고를 쓰고 일주일에 닷새를 일하고 나머지 이틀은 보따리를 싸서 여행을 즐기며 그 여행 속에서 사람사는 냄새를 맡고 그 속에 깊은 한을드러내어 소설 속에서 풀어주는 소설가이다. 이 시대를 대변하는 소설가 김주영은 두메산골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자랐던 자신의 어릴적 성장배경이 큰 힘이 되어 삶을 반추하면서 되돌아볼 수 있는 '홍어'로 1998년11월에는 대산문학상을 받았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객주'(전3권), '화척'(전5권), '천둥소리',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활빈도'(전5권), '아들의 겨울', '외설 춘양전', '홍어' 외 다수.

 

 http://www.kaemagowon.com.ne.kr/munhak/moonhak.htm에서 전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