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수 조병갑선정비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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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부자(父子) 송덕비~조병갑. 조규순. 함양상림.동학농민혁명.대원군척화비 동학농민혁명답사기

2014/04/2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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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림에 들어서니 입구에 대원군의 척화비가 보였다.

보존상태가 아주 양호했다.

척화비!

책에서만 듣던 바로 그 척화비구나...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년) 등 서양함대의 침략으로 강화도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는 역사를 배우지 않았던가...


읽어보니 대원군이 외국군대와 전투를 치르면서 쇄국의 결의를 굳히고 온국민에게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해 1871년 4월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세웠다고 한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주문(主文)큰 글자로 새기고,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 우리들의 만대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라고 작은 글자로 새겨져있다.

외우내환으로 기울어 가는 조선왕조를 구하기 위한 대원군의 고뇌가 느껴졌다.

 

 십여년전 상림숲에 공원을 만들면서 흩어져 있던 비석과 유적을  모은 것이라고 한다.

 


80대의 한 아저씨가 산책을 하고 있었다.

"상림을 정말 잘 가꾸어두었네요."하고 말을 거니

"군청에서 신경을 많이 씁니다.  숲이 좋아 주민들도 좋아합니다."

"이곳에 고부군수를 역임한  조병갑의 송덕비가 있다고 하던데 어디 있습니까?"

"둑길로 계속가면 보인다오."

"조병갑의 비석을 철거하라는 여론이 있던데요..."

"조병갑이가 전라도 고부에서 악정을 펴 동학난이 일어났다는데

 그사람 송덕비를 그냥 두면 안되겠지..."

"그런데 비석을 이곳에 옮긴지가 10년이 넘는데 왜 이제와서 철거하라고 그럽니까?"
"그것까지는 자세히 모르겠구먼. 젊은 사람들이 한자를 잘 몰라 그럴 수도 있겠지..."



​이곳이구나...

넓은 터안에 많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2백년이 지냤을 비인데 아직도 뚜렷이 보이는 비석도 있다.

관찰사(도지사) 정태현 영세불망비(영원토록 잊지 않겠다는 비)​가 보였다.



차근차근히 살펴보니 조병갑의 부친 조규순(趙奎淳)군수의 비가 보였다.



<조규순 군수는 임기동안 정사는 간편하고 공정하게 덕으로써 다스렸으며

 백성들은 풍요롭고 태평성대를 누림으로써​ 잊을 수 없어 조선 헌종 15년(1849년) 비를 세웠다>

그 아래애 '효자 병갑(孝子秉甲)'이라는 한자도 적혀있다.​



아버지(조규순)와 아들(조병갑)이 내리 이곳 함양군수를 했구나...​


조병갑...조병갑...

여기 있구나.​



 

 

 

 <조선말 조병갑 (함양)군수는 유민을 편케하고 봉급을 털어 관청을 고치고

  세금을 감해주며 마음이 곧고 정사에 엄했기에 그 사심없는 선정을 기리어

  고종 24년(1887년) 비를 세웠다.>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함양군수로 있을 때는 선한 군수였는데 전라도 고부에 가서는 갑자기 악덕군수가 되었단 말인가?

한사람의 성품은 갑자기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일부는 정말로 백성들이 칭송하여 세운 것도 있습니다만

 송덕비의 대부분이 백성들 고혈을 짜내여 세운 것입니다.

 송덕비를 세웠다는 말은 얼마나 악하게 백성들을 못살게 했는지 알수 있습니다.

 송덕비는 바로 악정(惡政)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학자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조병갑은 함양군수를 거쳐 김해부사를 지내고

1892년 자신과 조선왕조의 운명을 가를 전라도 고부군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역사는 폭발점으로 거침없이 달리고 있었다.  

 

 

깊은 상념에 빠져있는데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얘들아, 빨리와봐.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조병갑의 송덕비야."

"아빠, 조병갑이 누구야?
"거 몰라? 동학혁명을 촉발시킨 사람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 말이야."





한 아빠가 자녀들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120년전의 역사가 꿈틀거리며 살아나고 있었다.


15. 조병갑 대화~고부민란. 동학당의 난. 을미사변.함양상림.천주교박해. 최시형.이완용. 동학농민혁명답사기

2014/04/23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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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을 보며 조병갑 군수와 대화를 나누었다.


(함양 상림 역사인물공원에 있는 많은 송덕비들)


필자: 조병갑 군수님. 안녕하십니까?

   당신의 부모는 어떤 분이십니까?

조병갑: 나는 함양군수와 전라도 태인군수를 지낸 조규순(趙奎淳)의 아들로

   1844년 태어났습니다. 당시 영의정을 지낸 조두순의 조카이기도 합니다.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조병식(趙秉式)과는 사촌간입니다.


필자: , 탄탄한 정치적 인맥이 있었군요.

   기록을 보니 당신은 서자로 태어났더군요.

조병갑: 네 맞습니다. 당시엔 서자(庶子)와 적자(嫡子)의 차별이 심했습니다.

   나는 그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고 기어코 그 차별의 벽을 이겨냈습니다.

   아버지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지요.


(함양 상림에 남아있는 조병갑 부친 조규순의 비)



필자: 당신 부친 조규순의 송덕비를 보니 당신의 애절한 심정이 잘 드러나있더군요.

   당신은 관운이 크게 있었는데요.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직을 받진 않았지요?

조병갑: 허허. 당시에 과거시험이 있긴 있었습니다만 과거시험에 합격해도

   돈을 바치지 않으면 발령을 내지 않았습니다.


필자: 당신이 함양군수나 김해부사로 있을 때는 사람들이 거의 몰랐습니다.

   하지만 고부군수로서의 활동이 너무 유명하여 세상사람들 중

   당신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조병갑: 나는 너무 억울합니다. 나는 함양군수, 김해부사 등을 거쳐

   18924월 고부군수로 부임했습니다. 당시는 사회가 극도로 혼란했습니다.

   신흥종교 동학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었지요.

   

필자: 절망하고 고통에 가득 찬 백성들은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종교에 의지하게 됩니다.

  ​신흥종교가 퍼진다는 것은 기존의 종교가 제 역할을 못해주었겠지요.

   동학이 민중들을 끄는 매력이 있었던 모양이지요?

조병갑: 백년전인 1780년대부터 서학(西學)이 유행했습니다. 서학이란 서양에서 들어온

   학문과 종교를 말하는데 천주학, 천주교를 의미합니다. 천주교의 교리 중

   만민평등사상이 민중들에게 크게 먹혀들어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에 빠졌습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당시 국민의 5%정도였던 양반의, 양반에 의한, 양반을 위한

   엄격한 신분체에 기초한 지배체제였습니다. 만민평등사상은 조선의 지배체제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사상이지요. 천주교인들은 통치에 위협이 되는 세력으로

   간주되어 혹독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수백명이 끌려가 참수형을 당했지요.

   여러 차례 탄압으로 천주교인은 거의 씨가 말라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뿌린 만민평등사상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함양 상림의 산책길)


   1860년부터는 동학이란 종교가 폭발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이들도 만민평등사상으로 민중들을 끌어모았습니다.

   내가 고부에 부임하기 전부터 삼남지역(전라 경상 충청)은 동학당들이 득세하여

   큰 정치세력화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고부에 부임했어도 난은 터졌을

   것입니다. 가장 악조건일 때 내가 고부에 간 것 뿐입니다.



필자: 당신의 변명은 별로 설득력이 없군요. 한 인간의 성품과 재능은 아주 중요합니다.

   당신은 고부군수로 재직하면서 온갖 악정으로 농민들을 도탄 속으로 몰아넣었지요?

조병갑: 그 정도 수탈은 당시의 지방관리라면 누구라도 하는 행위였습니다.

   돈 주고 산 벼슬, 빨리 환수하여 서울이나 고향으로 가는 게 모든 지방관의 꿈이었습니다.


필자: 고부민란을 정부가 수습을 잘못하는 바람에 동학당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당신은 파직되었지요.

조병갑: 그후 나는 1년간 강진군 고금도에 유배를 갔습니다. 후에 나는 복권되어

   대한제국 고등재판부 판사로 임명되어 일을 했습니다.


필자: 당신은 1898(고종35) 동학당의 정신적 지주였던 최시형에게 사형언도를

   내렸지요? 동학과는 아주 큰 악연(惡緣)이 있었군요.

조병갑: 조선은 1894년 동학당의 난으로 결국 파산하게 됩니다.

   그후 10년을 더 버티지만 그것은 단지 식물인간 상태로 이어간 것에 불과했습니다.

   갑오년(1894) 다음해인 을미년(1895) 일본 무사들이 경복궁을 침범하여 국모인

   명성황후(민비)를 칼로 난자해 죽이지만, 조선정부에서는 아무런 손도 쓸 수 없을 정도로 

   국권이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완용이 조선을 일본에 팔아먹었다고

   하는데, 일본침략이 있기 전 동학당의 난 때 조선은 이미 내부적으로 무너져내렸고

   더 이상 나라로서 구실을 못했습니다.


 

울창하고 푸른 숲. 비가 그친 파아란 하늘. 시원한 강물. 오래된 정자위엔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최치원 선생과 많은 인재들의 자취가 간직된 이곳 상림은 정말로 함양의 자랑이다.



 

시민단체에서 조병갑비석을 철거하기 위해 서명운동을 하겠다는 말을 들었다.

자랑스런 역사도 있지만 치욕스런 역사도 있다. 슬픔과 고통의 역사도 있을 것이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다. 나쁜 역사에서도 많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조병갑의 비석을 철거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잘 보존하고 설명을 좀더 보강하여

많은 사람들이 조병갑의 비석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발견하고

자녀들에게 그때의 역사를 설명해줄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사실 조병갑의 이 비석 하나때문에 함양 상림을 방문하게 되었다.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이 비석을 보기위해 자녀들과 이곳 상림을 방문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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