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수 조병갑 기사

2007년 7월호

[확인취재]「언론과의 전쟁」전위대로 나선 趙己淑씨 祖父의 일제下 행적

趙己淑 前 홍보수석의 祖父인 岡熙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京城日報·每日申報에서 기자로 근무
親日 신문 東光新聞에서는 주필 겸 편집국장 지내

金南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京城日報와 每日申報는「제2의 조선총독부」』(鄭晉錫 외대 명예교수)

『캬, 조교수님 토론 한번 하고 싶죠』

  趙己淑(조기숙) 前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이 돌아왔다. 그녀는 정부 부처 기자실 폐쇄 등을 앞세워 다시 「언론과의 전쟁」을 선포한 盧武鉉(노무현) 대통령의 前衛隊(전위대)를 자임하고 나섰다.
 
  그동안 「언론개혁」을 앞장서 주장해 왔던 이른바 進步(진보)성향의 시민단체, 언론관련 단체들까지 한 목소리로 盧대통령의 조치를 비판했다. 하지만 趙己淑 前 수석은 방송 인터뷰, 인터넷 매체 기고 등을 통해 『언론 자유 외치는 언론은 생뚱하다』면서 盧대통령을 옹호했다.
 
  <왜 네티즌은 압도적으로 정부의 제안을 찬성하는지, 「월스트리트」지에서 이번 조치가 소비자에게 천편일률적인 정보가 아니라 언론사 간 자유 경쟁을 촉진할 것이라고 평가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셨는지요?
 
  위와 같은 정보를 접하지 못하셨다 하더라도 우리 언론사들이 언론의 자유를 외치는 것이 좀 엉뚱하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는지요? 군사독재의 보도지침을 따랐던 우리 언론사 중 몇 회사가 뼈저린 자기반성을 했나요?> (지난 6월1일 오마이뉴스)
 
  다시 「盧武鉉 지킴이」를 자처하고 나선 趙己淑 前 수석에 대해 盧武鉉 대통령은 상응하는 관심표명으로 화답했다.
 
  지난 6월2일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참여정부 평가포럼」 月例(월례) 강연회장에서 4시간에 걸쳐 한나라당 大選(대선)주자 후보들과 기자들에 대한 毒舌(독설)을 뿜어내던 盧武鉉 대통령은 이 자리에 참석한 趙己淑 前 수석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캬, 趙교수님 토론 한번 하고 싶죠? 나도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놈의 헌법이 못 하게 하니까, 단념해야죠』
 
  「조병갑의 증손녀」라는 月刊朝鮮(2006년 11월호) 보도 이후 趙 前 수석은 잠시 자숙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 기간은 짧았다. 그녀는 곧 한나라당의 유력한 大選주자인 朴槿惠(박근혜) 前 한나라당 대표에 대한 비판에 나섰다.
 
  지난 2월3일 평화방송 라디오 「열린세상, 장성민입니다」에 출연한 趙 前 수석은 『朴槿惠 前 한나라당 대표는 어머니(故 陸英修 여사)와 아버지(故 朴正熙 대통령)를 팔아서 정치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자산을 물려받지 않은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연좌제라고 보며, 그것은 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하지만 자산을 물려받았다면, 아버지의 과오에 대해서도 당연히 책임의식을 함께 져야 한다고 본다』고 했다. 또 『지금 全국민이 역사 바로세우기를 하고 있는데 朴槿惠 前 대표는 어떻게 세상의 중심이 자기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참 신기하다』고 했다.
 
趙岡熙가 다닌 京城日報와 每日申報는 총독부의 기관지로,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부임한 후 침략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1906년 창간했다. 이 때문에 두 신문은「제2의 조선총독부」로 불렸다.
 
  趙己淑의 변명
 
탐관오리 고부군수 趙秉甲은 瓚熙·岡熙 두 아들을 두었다. 趙秉甲의 손자代부터는 족보에 이름이 올라와 있지 않다. 趙己淑 前 청와대 홍보수석의 할아버지가 岡熙다.
  趙己淑 前 홍보수석은 月刊朝鮮 2006년 11월호를 통해 자신이 동학혁명을 유발한 탐관오리 趙秉甲의 증손녀라는 것이 알려진 후, 『신문도 장사지만 최소한의 상도의는 지켜야 한다』며 月刊朝鮮과 朝鮮日報를 비난했다. 그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이메일을 知人(지인)과 일부 정치부 기자들에게 보냈다. 다음은 그가 보낸 이메일의 주요 내용이다.
 
  <모 신문과 그 자매지가 지난해에도 저에 대해 터무니 날조를 하더니 올해도 또 특집을 했네요. 지난번 특집은 완전 작문이라 대응할 가치도 없었지만 여전히 작문이 곳곳에서 발견되긴 해도 이번 특집은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것이라 그냥 침묵하고 넘어갈 수만은 없을 것 같아 지인들께 몇 자 띄웁니다.
 
  저는 저의 조상에 대해 감출 것도 없고 감춘 적도 없습니다. 조상의 과거가 저의 공직수행과 관련이 있다면 당연히 공개적으로 밝혀야겠지요. 하지만 저는 조상의 이름을 팔아 명예나 권력을 누리지도 않았고 그 재산을 물려받아 호의호식하지도 않았습니다. 저의 아버지나 저는 모두 자력으로 공부했습니다.
 
  게다가 그 기사에서도 지적했듯이 이미 학계에서는 저희 증조부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오류일 수도 있다는 학자들의 논문이 발표된 바 있습니다. 어떤 역사적 사건은 한 개인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때 역사학도가 되어 억울한 가족사를 바로잡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그 희생양이 된다면 그리 나쁠 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의 恨이 풀릴 때까지 108배 계속할 것』
 
작년 12월9일 충남 공주유스호스텔에서 열린「동학농민혁명 112주년 기념 유족의 밤」행사에서 趙己淑 前 청와대 홍보수석이 유족들에게 사과하고 있다.
  趙己淑 前 수석의 이메일 내용이 알려지자, 朝·中·東(조·중·동) 등 주요 언론사뿐만 아니라 「진보」 언론사와 「진보」 인사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참여연대 회원 박상표(39)씨는 참여연대의 기관지 「참여사회」 11월호에 「탐관오리 趙秉甲의 증손녀, 역사를 얕잡아 보다」라는 글을 기고했다.
 
  그는 趙 前 수석의 해명 이메일 가운데 「趙秉甲 군수가 재판을 받고 귀양을 간 것이 아니라, 무죄선고를 받았다」는 부분을 문제 삼았다.
 
  『趙 前 수석의 변명은 역사를 왜곡한 것으로 우리 사회 기득권 세력으로 남아 있는 과거사 청산 대상자 후손의 논리와 너무 똑같다. 趙 前 수석의 변명은 역사를 얕잡아 봐도 한참 얕잡아 본 것이다』
 
  趙己淑 前 수석은 이후 한동안 언론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다가 지난해 12월9일 충남 공주유스호스텔에서 열린 「동학농민혁명 112주년 기념 유족의 밤」 행사에 돌연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동학농민혁명군 유족과 시민단체 회원 등 300여 명이 참여한 행사에서 『동학농민혁명군의 영혼을 위로하고 유족들의 아픔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최근 몇 달 동안 매일 아침 108배를 하고 있다』며 『여러분의 恨(한)이 풀릴 때까지 108배를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연합뉴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月刊朝鮮의 보도 이후, 정신이 없었고 정리가 잘 안 돼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해 일부 내용이 잘못 전달됐다』고 했다.
 
  이후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잠잠했던 趙 前 수석은 금년 2월 들어서부터 정치·언론·역사 바로 세우기 등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月刊朝鮮에는 趙秉甲의 두 아들에 대한 제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특히 趙 前 수석의 祖父이자, 趙秉甲의 둘째 아들 岡熙(강희)에 대한 내용이 많았다. 『趙己淑씨의 祖父인 岡熙는 평생 총독부 기관지에서 기자 생활을 했던 대표적인 親日 인사이다. 趙岡熙씨의 손녀 趙己淑씨가 親日派를 비판하고 역사와 언론 바로 세우기에 앞장섰다는 건 희대의 코미디다. 조선 末부터 친일파로 호의호식했던 이들의 후손이 조상 덕을 보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趙秉甲의 큰아들 瓚熙(찬희)씨는 일제 때 면장·군수 생활을 오래 했다. 지금 정권 사람들 기준대로라면 명백한 親日 인사다』라는 내용이었다.
 
  趙己淑 前 수석이 자신의 조부에 대해서 어떻게 말했는지 알고 싶어 인터넷 뉴스를 검색해 봤다. 趙 前 수석은 지난해 12월9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할아버지는 日帝 때 親日派였으나, 해방 후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 無爲徒食(무위도식)했다. 저는 조상으로부터 한 푼도 물려받은 자산이 없다. 그래서인지 負債(부채)의식이 없다』고 말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좌파 인터넷 매체에 실린 趙 前 수석 관련 기사에 趙 前 수석의 조부에 대한 얘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전국에서 전화를 걸어 온 제보자들 가운데 趙岡熙의 「全北日報(전북일보)」 후배 기자라고 밝힌 李모(75)씨를 만났다. 그는 『趙岡熙씨와 함께 기자 생활을 한 적은 없지만, 趙岡熙씨의 기자 생활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다』고 했다. 전북 정읍에 살고 있는 李씨를 만났다.
 
  李씨는 「대한신문연감」(1956년 발행판)에서 趙岡熙씨에 대한 기록을 찾아 200자 원고지 석 장에 적어 왔다. 그가 적어 온 趙岡熙의 약력이다.
 
  <趙岡熙(1889. 4. 8~1966). 서울 출생. 선린상업 졸업. 京城日報·每日申報(1938년 京城日報에서 분리하면서 「每日新報」로 개칭) 기자를 지냈음. 東亞日報 기자, 時代日報 정치부장·사회부장, 東光新聞 주필 겸 편집국장, 每日申報 참사·충남지사장, 全北日報 편집고문, 中央日報 논설위원을 거쳐 자유신문 편집부국장 역임>
 
  양주趙氏 족보에 따르면 趙秉甲의 큰아들 瓚熙는 1880년生, 둘째 아들 岡熙는 1889년生이었다. 李씨가 가져온, 趙岡熙라는 인물의 출생연도 역시 1889년生이었다. 「趙岡熙가 언론인」이라는 것은 다른 제보자들의 이야기·기록과 일치했다.
 
 
  『東光신문사는 유명한 親日언론사』
 
  ─선생님은 趙岡熙씨를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가 모시던 全北日報 前 편집국장께서 「탐관오리 趙秉甲의 아들이 趙岡熙인데 全北日報에 있었다」는 얘기를 여러 번 해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양반이 올해 연세가 아흔이 넘으셨는데, 「趙岡熙씨와 기자 생활을 함께 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趙岡熙라는 사람을 알고 있었는데 마침 月刊朝鮮에서 지난해 11월호에 趙秉甲 기사를 썼더군요. 거기에 趙岡熙 이름이 나와서 제가 신문연감을 찾아봤습니다』
 
  ─趙岡熙씨와 함께 일한 적이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워낙 나이 차이가 나서. 趙岡熙씨가 全北日報의 편집고문을 했는데, 광복 전이었어요. 그때 저는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죠』
 
  ─趙岡熙는 어떤 인물이라고 하던가요.
 
  『사람이 참 온화하고 착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만을 봐서는 탐관오리 趙秉甲의 아들이라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인물도 좋았답니다. 그런데 그 양반이 다니던 東光新聞은 우리 지역에서 유명한 親日 신문사였어요』
 
  ─京城日報나 每日申報, 時代日報는 성격이 어땠나요.
 
  『다른 신문사는 정확히 잘 모릅니다. 하지만 京城日報와 每日申報는 총독부에서 운영했던 신문이라고 하지요? 아마 그럴 겁니다』
 
  趙岡熙와 함께 일한 全北日報 前 편집국장을 만나서 生前(생전)의 趙岡熙에 대해서 듣고 싶었지만, 워낙 高齡(고령)이라 인터뷰가 불가능했다.
 
  李씨가 전해 준 메모를 토대로 趙岡熙의 행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서울 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대한신문연감」을 찾아봤다. 신문연감의 광복 前 언론인 명단에서 趙岡熙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東亞日報 기자 생활
 
趙岡熙의 약력을 적어 온 全北日報 후배기자 李씨의 제보.
  趙岡熙에 대한 설명은 李씨가 가져온 약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보자들의 말처럼 趙秉甲의 둘째 아들 趙岡熙는 日帝시대 「언론인 趙岡熙」와 동일인물인 것이 확실해 보였다. 국립도서관 자료 조회 사이트에서 趙岡熙가 다녔던 「京城日報·每日申報·東亞日報·時代日報·東光新聞·全北日報·中央日報」를 찾아봤다. 이 신문들의 기사 검색창에 「趙岡熙」라는 이름을 넣자 20여 건의 자료가 검색됐다.
 
  가장 먼저 나온 자료는 東亞日報 社史(사사)였다. 京城日報와 每日申報를 언제 다녔는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었다.
 
  東亞日報 社史에 따르면 趙岡熙는 1925년 2~3월까지 東亞日報 사회부 기자를 지냈다. 따라서 趙岡熙가 京城日報와 每日申報를 다녔다면, 그 시기는 선린상업을 졸업한 1917년이나 1918년(趙岡熙는 1889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18세나 19세에 졸업했다고 추정함)부터 1925년 1월까지 7~8년 정도라고 추정할 수 있다.
 
  東亞日報를 퇴사한 趙岡熙는 時代日報(1925년 4월 추정~1926년 7월9일), 東光新聞(1928년 9월14일 입사~ 퇴사 일자 不明)을 거쳐 1954년 4월3일 中央日報(현 중앙일보와는 다른 신문사임) 교정부장, 1954년 6월3일 논설위원을 지낸 것으로 나와 있다. 제보자 李모씨가 말했던 趙岡熙 약력에 나와 있는 每日申報 충남지사장, 全北日報 편집고문 등에 관한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趙岡熙가 다녔던 京城日報와 每日申報가 총독부 기관지였다는 제보자 李씨의 말이 떠올라, 京城日報와 每日申報에 대한 자료를 검색했다. 많은 자료 가운데, 한국외국어大 鄭晉錫(정진석·67) 명예교수의 저서 「언론조선총독부」가 이 신문들을 자세하게 분석해 놓았다. 「언론조선총독부」에 따르면, 京城日報와 每日申報는 총독부의 기관지였으며, 그 가운데 중심 역할을 맡은 것은 京城日報였다. 이 신문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통감으로 부임한 후 침략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1906년 9월1일 통감부 기관지로 창간했다.
 
  일본은 해외 식민지에서 기관신문을 발행했는데 조선 京城日報를 비롯해 대만의 「臺灣日日新報」, 만주의 「滿洲日日新聞」, 사할린의 「樺太日日新聞」이 있다.
 
 
  『언론인 趙岡熙가 趙秉甲 아들』
 
  책을 보고 난 후, 鄭晉錫 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鄭晉錫 교수는 「언론인 趙岡熙」에 대해서 상세히 알고 있었다.
 
  趙岡熙에 관한 자료를 가지고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鄭晉錫 교수의 연구실로 찾아갔다. 鄭교수는 제보자 李씨와 마찬가지로 여러 문헌에서 趙岡熙씨에 대한 자료를 뽑아 놓았다. 鄭교수는 두 시간에 걸쳐 일제 강점기의 親日신문 역사에 대해서 설명했다.
 
  ─月刊朝鮮에 들어온 제보와 여러 자료를 비교해 보니, 언론인 趙岡熙가 趙秉甲의 아들과 동일인물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제가 평생 동안 신문을 연구해 왔기 때문에, 언론인 趙岡熙씨는 알았지만 그가 趙秉甲의 아들인지, 趙己淑 前 홍보수석의 祖父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지난해 月刊朝鮮 11월호를 보고 난 후에 「동일인물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지요. 그를 안다는 제보자들의 말과 「대한신문연감」에 나오는 그의 약력이 일치하는 것을 볼 때, 동일인물이 확실하겠네요』
 
  ─지난해 11월호에 나오는 趙秉甲 기사를 보셨군요.
 
  『그럼요. 趙己淑 前 수석과 趙秉甲의 관계를 밝힌 그 기사 잘 봤어요. 月刊朝鮮에서 드라이하게 팩트만을 다루려고 애썼더군요. 趙秉甲이 아무리 惡人(악인)이라고 해도 그런 先祖를 뒀다는 이유만으로 매도해서는 안 됩니다. 흥분하지 말고 있는 사실만을 다루는 모습이 언론의 바람직한 모습이에요』
 
  ─趙己淑 前 홍보수석과 일부 左派(좌파) 언론·지식인들은 月刊朝鮮 기사에 대해서 비난을 하고 있습니다.
 
  『좌파들이 啓礎 方應謨(계초 방응모)나 여러 우익 인사들이 일제下에서 불가항력적으로 행한 일부 親日 행적을 문제 삼아 벌떼처럼 공격해 왔습니다. 당시 상황과 형편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죠. 月刊朝鮮이 언론으로서 당연히 보도해야 할 사안을 신중히 보도했다고 봅니다』
 
  ─趙岡熙는 학교를 졸업하고 京城日報와 每日申報 기자를 지냈더군요. 두 신문사는 어떤 신문사입니까.
 
  『두 신문은 日帝시대 총독부 기관지였습니다. 한국을 식민지로 삼은 후 총독부는 3개 언어로 기관지를 발행했습니다. 日語 「京城日報」, 한국어 「每日申報」, 영어 「서울 프레스」가 그것입니다.
 
  이 3개 기관지는 韓日합방 이전에는 각기 별개의 신문사로 창간되었으나 합방 후에는 통합과 분리 과정을 거치면서 일본의 한국침략을 선전·홍보하고 식민지 통치를 정당화하는 논조를 폈습니다. 趙岡熙씨는 대표적인 총독부 기관지 두 곳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 것이죠』
 
 
  『京城日報·每日申報는 「제2의 조선총독부」』
 
趙岡熙가 時代日報 정치부장 당시 썼던 기사. 한국인이 이름을 짓는 방법에 대해서 日語로 설명했다.
  ─일본이 총독부 기관지를 3개나 만들 정도로 신문에 功(공)을 들였나 봅니다.
 
  『일본은 한국침략과 통치의 수단으로 언론의 역할을 매우 중요시 여겼습니다. 통감부와 총독부는 한국에서 언론사를 직접 경영하거나 親日 언론을 육성해 여론을 조작하고 침략을 정당화했습니다. 반면 朝鮮日報와 東亞日報 같은 항일 언론은 탄압했습니다. 日帝 침략 초기부터 패망할 때까지 시대에 따라 전략적인 변화는 있었지만 基調(기조)는 같았어요』
 
  ─京城日報의 당시 위세가 대단했겠습니다.
 
  『그렇지요. 1920년대 이후에는 유럽 여러 나라의 대사 등 화려한 경력을 지닌 직업 외교관, 귀족원 의원, 縣(현)의 지사급 등 거물급이 임명될 정도로 京城日報의 정치적 비중이 컸으며, 총독부 「관보」에 버금가는 권위를 부여했어요. 京城日報는 총독과 정무총감 등 총독부 최고위 통치자에게 機密費(기밀비·특별판공비)를 전달하고 총독이 교체될 때는 기밀비가 인계되는 관행까지 있어 이 신문은 「제2의 조선총독부」라 할 수도 있을 정도였어요』
 
  日帝 치하 한국 언론계에서 京城日報가 차지하는 위상은 막강했다. 京城日報는 韓日합방 후 韓末 최대의 민족지였던 「大韓每日申報(대한매일신보)」를 통합하여 직접 경영했다.
 
  鄭교수는 『朝鮮日報·東亞日報·時代日報(후에 中外日報·中央日報)의 3개 신문을 민간지로 불렀던 것은 京城日報·每日申報라는 총독부의 기관지와 대비되는 용어였다』고 했다.
 
  ─每日申報와 京城日報는 같은 회사라고 보면 되겠네요.
 
  『네, 1938년 4월19일 每日申報가 京城日報로부터 독립된 법인으로 분리될 때까지는 京城日報와 每日申報는 하나의 신문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京城日報 사장을 비롯해 일본인 임원진이 每日申報 임원을 겸하고 있었습니다』
 
  ─東亞日報 社史에 보면, 趙岡熙는 東亞日報 기자를 짧게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요.
 
  『東亞日報 社史 425페이지를 보면 趙岡熙씨는 1925년 2월부터 3월까지 2개월 동안 東亞日報 기자를 한 것으로 나옵니다. 趙岡熙씨가 東亞日報에 왜 그렇게 잠깐 머물렀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東亞日報는 당시 경영이 잘돼서 기자들에 대한 대우가 무척 좋았습니다. 당시 3大 민간지였던 朝鮮日報·時代日報보다 기자들 보수가 훨씬 좋았어요.
 
  그런데 趙岡熙씨가 이후 다녔던 신문사들은 東亞日報보다 못하거나, 전형적인 親日 신문사거든요. 그 양반이 왜 東亞日報에서 2개월을 못 채우고 떠났는지 궁금합니다』
 
 
  「鐵筆俱樂部 사건」 주동
 
  趙岡熙는 東亞日報 퇴직 후인 1925년 5월 「언문신문사건」이라고 불리는 이른바 「鐵筆俱樂部(철필구락부) 사건」의 중심에서 활동하게 된다.
 
  鐵筆俱樂部는 1924년 11월19일 사회부 기자들이 결성한 단체이다. 이보다 앞서 汎언론인 단체로는 「無名會(무명회)」가 있었으나 당시 사회부 기자들은 「기자 중의 기자」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無名會 외에 그들만의 독자적인 단체를 결성하게 된 것이다. 총독부의 강압적인 통치로 정치가 실종됐던 당시로서는 정치부·경제부 기자보다 사건을 좇는 사회부 기자가 더 활기 있고 기자로서의 사명을 어느 정도 수행할 수 있었다.
 
  鐵筆俱樂部는 이듬해인 1925년 5월20일 임시 총회를 열고 회원들의 급료 인상을 각 신문사에 요구하기로 결의했다. 우리나라 언론 사상 최초로 기자단체가 급료인상 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1931년 5월에 발행된 잡지 「삼천리」에는 鐵筆俱樂部가 정한 급료 인상의 액수가 최저 80원이었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이는 당시의 신문사 상황에서는 터무니없이 높은 액수였다. 鄭晉錫 교수의 저서 「역사와 언론인」에 따르면, 1932년 東亞日報의 급료수준은 편집국 부장 월급이 80~85원 선이었다. 사장인 송진우가 250원, 영업국장 겸 「新東亞」 발행인 양원모 170원, 편집국장 이광수 150원, 국장대리 설의식 100원이었다. 당시 80원의 월급은 군수와 비슷했고, 총독부 관리와 비교해도 못하지 않았다.
 
 
  기자들, 趙岡熙 집에서 파업 대책 논의
 
  1925년에 「최저 80원」을 요구한 鐵筆俱樂部의 요구에 3大 민간지 경영자들은 난색을 표했다. 그 가운데 東亞日報 社主 仁村 金性洙(인촌 김성수)는 즉석에서 이 요구를 거절했다. 鐵筆俱樂部 측은 東亞日報의 태도가 무성의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東亞日報 사회부 기자 전원이 5월22일 즉시 파업에 돌입했다.
 
  회사는 5월24일 오전 10시까지 출근하지 않은 기자를 해임했는데, 김동환·임원근·유완희·안석주·심대섭 등 다섯 명이었다. 이에 따라 鐵筆俱樂部 회원들은 그날 밤 즉시 대책회의를 갖는데, 대책회의 장소가 종로의 趙岡熙씨 집이었다. 기자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찾아낸 1925년 5월25일 경성 종로경찰서장의 정보보고 문건에 이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日語와 한자로 쓰여 있는 해당 문건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25년 5월24일 밤 9시 趙岡熙의 집에 朝鮮日報 기자 이석 이하 鐵筆俱樂部 소속기자 15명이 모여서 언문신문사건 동맹파업에 관해서 논의했다. 이들은 파업을 위한 실행위원 7명을 뽑고, 향후 활동 방향과 대책에 대해서 논했다. 실행위원─朝鮮日報: 김단야·김달진·이석, 東亞日報: 임원근·유완희, 時代日報: 강호·조이환>
 
京城日報와 每日申報의 역대 일본인 사장들. 이들은 식민지 조선의 `언론 총독들이었다. 趙岡熙는 京城日報와 每日申報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하고, 每日申報 충남지사장을 지냈다.
 
  時代日報 발행 중단 한 달 前 퇴사
 
  ─趙岡熙가 東亞日報에서 1925년 3월에 퇴사했는데, 여전히 鐵筆俱樂部 회원으로 활동한 것은 이해가 안 갑니다.
 
  『趙岡熙가 정확히 언제 時代日報에 들어갔는지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東亞日報에서 퇴사한 후 바로 時代日報에 들어가 사회부장을 했습니다. 時代日報는 1924년 六堂 崔南善(육당 최남선)이 창간한 신문으로 趙岡熙씨가 東亞日報에서 時代日報로 들어간 1925년에는 사장이 碧初 洪命熹(벽초 홍명희)였어요. 鐵筆俱樂部 사건으로 東亞日報에서 퇴사한 詩人 김동환이 그해 趙岡熙씨가 부장으로 있던 사회부에 입사합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확인한 잡지 「개벽」 제63호(1925년 11월1일 발행)의 在京言論機關一覽(재경언론기관일람)에 따르면, 趙岡熙는 1925년에 時代日報 정치부장으로 일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때 時代日報 편집국장이 홍명희, 사회부장이 소설가 현진건, 문예부 기자에 김기진 등으로 돼 있다.
 
  같은 기사에 朝鮮日報는 ▲社長 李商在(이상재) ▲常務理事 申錫禹(신석우), 曺?鉉(조설현), 白寬洙(백관수), 安在鴻(안재홍), 崔益善(최익선) ▲主筆 安在鴻 ▲營業局長 崔益善 ▲編輯局長 金東成, 同顧問 閔秦瑗 등으로 나와 있다.
 
  東亞日報를 떠나 時代日報에 둥지를 틀었던 趙岡熙는 약 1년 4개월 만인 1926년 7월9일 時代日報에 다음과 같은 퇴사의 변을 남기고 퇴사한다.
 
  <眷愛(권애)를 偏蒙(편몽)하였슴을 退社(퇴사)에 際(제)하야 깁히 感謝(감사)드리오며 今後(금후)에도 倍前愛護(배전애호)하심을 바랍니다>
 
趙岡熙는 詩人 김동환(왼쪽), 사회주의자인 김단야(오른쪽)와 함께 한국 최초의 기자 파업 사건이었던 「철필구락부 사건」을 주동했다.
  ─東亞日報와 마찬가지로 時代日報에서도 금방 퇴사했군요.
 
  『경영 상태가 좋았던 東亞日報에서 금방 나온 것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時代日報는 당시 경영이 어려워서 기자들 월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 재직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趙岡熙씨가 그만둔 지 한 달 후 時代日報는 발행을 중단했습니다. 추측컨데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회사를 그만뒀을 겁니다. 하지만 당시 時代日報가 다른 신문사로 변경하면서, 당시 기자들은 그대로 時代日報에 있었는데. 趙岡熙씨는 특이하게 그만둔 것으로 나오지요』
 
  「언론조선총독부」의 時代日報 부분을 정리한 것이다.
 
  <「時代日報」는 1926년 8월 중순 이후에는 발행을 중단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이상협이 9월18일자로 총독부로부터 「中外日報」라는 제호의 발행 허가를 얻어 11월15일부터 새 신문을 창간했다. 그러나 「時代日報」 사원들은 거의 그대로 유임하여 金東煥(김동환·시인)은 「中外日報」에 근무하게 되었다>
 
  時代日報 기자들이 회사를 떠나지 않았던 것에 비해, 趙岡熙는 신문사 발행 중단 한 달 전에 時代日報를 떠났다. 반면 함께 東亞日報에서 나왔던 시인 金東煥은 時代日報의 후신인 中外日報에서 월급도 받지 못하고 다른 직원들과 함께 고생한 것에 대비되는 대목이다. 이후 趙岡熙는 광복 전까지 親日언론과 親日신문에서 승승장구한다.
 
 
  親日언론 동광신문사 편집국장 등 역임
 
「철필구락부 사건」에 대한 경성 종로경찰서장의 정보보고 문건.
  ─교수님이 준비하신 자료를 보면, 趙岡熙는 時代日報를 나와서 「조선사상통신사」라는 곳에 들어갑니다. 조선사상통신사는 어떤 회사입니까.
 
  『일본인이 경영하던 통신사였으며, 한국어로 발행되는 신문·잡지·저술 등의 내용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연구자료로 제공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습니다. 당연히 親日 언론사라고 할 수 있지요. 趙岡熙씨는 여기서도 잠깐 기자 생활을 하다가 1928년 9월14일 또 다른 親日 신문인 東光新聞社에 입사해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냅니다』
 
  전북 전주에서 발행된 東光新聞은 일본인이 경영하던 全北日報의 자매지 형식으로 1920년 11월18일에 창간되어 한국어로 발행된 일간지였다. 사장은 全北日報 사장인 일본인이 겸했고, 편집국장 또는 주필은 한국인이 맡았다. 東光新聞은 창간 후 母紙인 全北日報에 부속되어 명맥을 이어 오다가 1928년 9월20일 續刊(속간)된다. 趙岡熙가 9월14일 입사한 것은 續刊을 위한 경력기자 스카우트 형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每日申報 충남지사장 지내
 
  東光新聞에 편집국장 겸 주필로 입사한 趙岡熙는 이후 여러 신문사를 轉轉(전전)한다. 그는 기자 생활을 시작한 每日申報에 다시 입사해, 참사·충남지사장을 지내다가 東光新聞의 母회사인 全北日報에서 편집고문으로 일하다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인 1945년 10월 趙岡熙는 「자유신문」이라는 곳의 편집부국장을 역임했으며, 時代日報의 후신인 中央日報에서 1954년 교정부장·논설위원을 끝으로 언론계에서 은퇴했다. 趙岡熙가 신문사를 은퇴한 이후의 행적을 찾아봤지만, 그의 아버지 趙秉甲처럼 죽기 전 10여 년의 행적은 찾을 수 없었다.
 
  다만 한국잡지협회의 자료에서 趙岡熙가 은퇴한 이후, 자신의 기자 생활을 정리한 글을 잡지에 실었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잡지협회의 자료에 따르면 趙岡熙는 1954년 「實話(실화)」라는 잡지의 8월 납량특대호에 「新聞生活三十年記(신문생활삼십년기) 人生流轉半生(인생유전반생)의 交響曲(교향곡)」이라는 글을 실었다. 趙岡熙의 글을 실은 해당 잡지의 광고가 東亞日報, 京鄕新聞, 平和新聞 1954년 7월22일자, 7월25일자, 8월26일자에 실렸다는 기록만이 남아 있었다.
 
  趙岡熙의 글이 실린 잡지 「實話」의 1954년 8월版(판)은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에서 찾을 수 없었다.
 
 
  日帝의 비행기 헌납 운동에 협조
 
  기자는 趙岡熙가 또 다른 親日단체인 「大同社」의 비행기 헌납 운동에 참여해 비행기 헌납 모금 운동을 도왔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문서의 제목은 「치안상황(昭和 12년) 제26~43보」(1937년 10월8일)로 「특수단체동향」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앞서 봤던 경성 종로경찰서장의 정보보고 문건과 비슷한 일본경찰 내부 문건으로 추측된다.
 
  日語로 돼 있는 문건의 여섯 페이지 가운데 趙岡熙와 관련된 한 장 반 분량을 요약, 소개하기로 한다.
 
  <1. 大同社의 비행기 헌납운동
 
  충청남도 대전府 소재 大同社 총본부에서는 사변 발발 이래 비행기 한 대를 헌납하기 위해 「大同號」 헌납기성회를 조직했다. 동회 간부 충남 張志鄕(장지향) 등은 사업실현을 위해 (…) (치안상황 제20보) 9월30일 마감까지 각지로부터 신청액을 받았으나 의외로 가까스로 3810원을 넘긴 것으로 나타나는 등 각 지부의 반응은 지극히 냉담했다. 이러한 가운데 경남과 같은 지역에 대해 구체적 활동을 하기 위해 만일 본 계획이 용두사미로 끝난다면 동사의 大恥辱(대치욕)일 것이므로 경남 진주 간부 강상호는 크게 낭패감이 들어 수일 전부터 경남도 각지를 순회 독려하였다.
 
  張志鄕은 10월1일 헌금독려 통지서를 각지의 大同社 지부에 발송했고 每日申報 대전지국장 趙岡熙를 방문, 신문을 통해 (大同社의) 일반사원도 참여하도록(?) 하는 등 노력하고 있다.
 
  목하의 정황에 대해서는 예정한(목표로 한) 5만3300원의 모금은 대단히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趙秉甲의 큰아들은 日帝 때 면장 지내
 
1937년 中日전쟁 당시 親日단체 大同社는 충청도에서 비행기를 헌납하기 위해 모금운동을 했다. 문건에는「당시 매일신보 충남지사장 趙岡熙에게 모금독려를 위한 기사 게재를 요청했다」고 적혀 있다.
  趙秉甲의 큰아들인 趙瓚熙(조찬희)는 어떻게 살았을까. 제보자들은 그가 日帝시대 때 면장과 군수를 지냈다고 했다. 하지만 趙瓚熙가 면장과 군수를 했다는 증거 자료 가지고 있지 않았다.
 
  기자는 국사편찬위원회·독립기념관·민족문제연구소·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에서 趙瓚熙에 대한 행적을 찾아봤다.
 
  국사편찬위원회에 있는 기록에 의하면 趙瓚熙는 1920년 충청남도 청양군 비봉면장을 했던 것으로 나와 있다. 趙瓚熙의 출생연도가 1880년이므로 그의 나이 40세였다. 나이 「불혹」에 면장을 했으면, 당시 기준으로 봐도 출세가도를 달리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때 동생 趙岡熙는 京城日報나 每日申報 기자를 하고 있었다. 탐관오리 趙秉甲의 두 아들은, 1920년 각각 日帝의 공무원과 총독부 기관지 기자였던 것이다.
 
  제보자들이 「趙瓚熙가 면장과 군수를 했다」고 한 것은 여기서 나온 듯하다. 하지만 그 이전과 이후에 趙瓚熙가 어떤 관직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비봉면사무소의 홈페이지에 따르면 비봉면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충남도령 제3호) 서상·서하면 일원과 홍주군 얼방면 일부를 합병」해 이루어졌다. 趙瓚熙가 면장을 하던 1920년의 규모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2001년 12월 말 기준으로 인구 2870명(1059가구)의 그리 크지 않은 마을이다.
 
  혹시 비봉면사무소에 역대 면장들에 대한 기록이 있지 않을까 해서 연락해 봤지만, 『日帝시대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는 대답을 들었다.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에서 趙瓚熙가 1909년 5월22일자 「皇城新聞(황성신문)」에 자신의 부친 趙秉甲을 변호하는 광고를 실은 사실을 발견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청양군 거주하는 명의주라는 사람이 광고하기를 학교에 반대하고 무고하게 이것은 밝은 안목으로서 한번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趙선비秉甲씨가 이 일에 대해서 서울에 와서 주선했다고 하는 것은 趙秉甲은 저의 父親인데 병이 들어서 금년 2월 초에 병 치료차 서울에 상경했지만, 학교의 일은 父親이 서울에 와서 치료하기보다 앞으로 일어날 때의 것이니 어찌 미리 알고서 주선하겠느냐.
 
  이것은 본인의 교임을 미워하거나 싫어해서 아무 관계없는 老親(노친)을 감정적으로 대하거나, 모욕을 주는 것이니, 세상에 아버지 없는 사람이 없거늘 그 자식에게 유감이 있어서 그 아버지를 무고하는 것은 사람의 자식이 된 도리로서 어찌 차마 그렇게 하는가. 세상 사람들아 널리 알고 알아라.
 
  충청남도 청양군에 사는 趙瓚熙>
 
 
  趙瓚熙, 皇城新聞에 부친 趙秉甲 변호 광고 실어
 
  趙瓚熙가 광고에서 말한 사건은 어떤 것인지 전후 사정이 나와 있지 않아서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기사의 내용을 보면 趙瓚熙의 교직임명을 반대하는 이들이 부친 趙秉甲까지 끌어대 비판하자 趙瓚熙가 부친 趙秉甲을 변호하는 광고를 낸 것으로 보인다. 1899년 「승정원일기」를 끝으로 각종 자료에서 사라졌던 趙秉甲의 이름이 10년 만에 다시 기록에 나타난 것이다.
 
  이 광고대로라면 趙秉甲은 1909년에 臥病(와병) 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난해 10월부터 취재한 자료를 종합해 보면 趙秉甲은 1912년에 사망했고 아들 두 명에 딸 한 명을 뒀다. 그의 둘째 아들 趙岡熙는 1966년에 사망했고 1男1女를 뒀다. 趙岡熙의 외아들 重完(중완)씨는 趙己淑 前 홍보수석의 아버지다. 하지만 趙秉甲의 큰아들 趙瓚熙는 언제 사망했는지, 자녀가 몇 명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京城日報와 每日申報는「제2의 조선총독부」』(鄭晉錫 외대 명예교수)

 

천도게시판

http://www.chondogyo.kr/technote/read.cgi?board=chondoboard&x_number=1168790179&r_search=조병갑&nnew=1

 

이름: 백길현 (hyunjae1@hanmail.net)
2007(포덕148년)/1/15(월)
jo4.jpg (121KB, DN:24)
월간조선-조병갑기사 11월호  
요청에 의하여 자료 올립니다.
원문을 보시려거든 여기로....
http://monthl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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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취재] 趙己淑 前 청와대 홍보수석은 탐관오리 고부군수 趙秉甲의 증손녀



 
東學革命 후 대한제국 판사가 된 趙秉甲은 1898년 7월18일 동학교주 崔時亨 선생에게 사형선고
 

金南成 月刊朝鮮 기자 (sulsul@chosun.com)  

「탐관오리 趙秉甲 후손이 청와대 고위 인사」


청와대 홍보수석 시절의 조기숙씨.


지난 9월 말 한 모임에 참석했다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참석자 한 명이 東學農民革命(동학농민혁명)의 導火線(도화선)이 됐던 당시 古阜(고부) 군수 「趙秉甲(조병갑)」의 후손에 관해서 이야기를 한 것이다.
 
 『고부 군수 趙秉甲의 功德碑(공덕비)가 경남 金海 어디엔가 있다. 최근 그의 後孫들이 공덕비를 새로 만들어서 제사를 지냈다. 「공덕비를 찾아온 후손 가운데 盧武鉉 청와대의 고위 관계자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의 말이 선뜻 믿기지 않았다. 趙秉甲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탐관오리」의 전형으로 실린 사람이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후손들이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무시하고 그의 공덕비를 새로 세웠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또한 「역사 바로 세우기」를 앞세우는 盧武鉉 정권의 청와대에 趙秉甲의 後孫이 고위 관계자로 있다는 얘기도 의아했다.
 
 이런 의심이 들어, 자세히 캐물었지만, 얘기를 전한 참석자는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지 못했다.
 
1898년 동학교주 최시형은 趙秉甲에게 사형선고를 받았다.

 다음날 月刊朝鮮 편집회의에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다. 선배들은 『趙秉甲 후손들이 새로 공덕비를 세웠다면 그것만도 뉴스』라는 반응을 보였다. 趙秉甲의 후손들이 공덕비를 새로 세웠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우선 「國史大辭典(국사대사전)」(문학박사 이홍직 편저)에서 「趙秉甲」 항목을 찾아봤다.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와 있었다.
 
 <조선 高宗 때의 貪官汚吏(탐관오리). 1893년(고종 30년) 古阜 군수로서 萬石洑(만석보: 貯水池)를 수축할 때 동원시킨 군민에게 임금도 주지 않고 터무니 없이 水稅(수세)를 징수하여 총 700여 섬을 횡령 착복하였고, 또 군민에게 황무지를 개간시키고 강제로 稅米(세미)를 징수하여 사복을 채웠었다.
 
 이 밖에 泰仁(태인) 군수를 지낸 자기 아버지 趙奎淳(조규순)의 碑閣(비각)을 세우기 위하여 군민으로부터 금전을 착취하고 富民(부민)에게 억지로 죄명을 씌워 불법 착복하는 등 갖은 貪虐(탐학)을 恣行(자행)하였다.
 
 이에 격분한 농민들은 군수의 불법에 항의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므로 드디어 전주로 몰려가 전라감사 金文鉉(김문현)에게 애소하였으나 감사는 이를 수리하지 않았을뿐더러 도리어 그 대표자를 잡아 가뒀다.
 
 이리하여 1894년(고종 31년) 2월에 1000여 명의 군중이 만석보 남쪽에 집합하여 제방을 끊고 읍내로 들어가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빼앗고 불법 징수한 세곡을 원주인에게 돌려보내니 趙秉甲은 몰래 도망하였으나 후에 파면되고 귀양 갔다.
 
 趙秉甲의 이러한 虐政(학정)에 대한 반발로써 東學革命이 일어났다>
 
 
 金海 등 세 곳에 있는 功德碑
 
정읍에 있는 東學農民革命 기념비.

 趙秉甲에 관한 중·고등학교 교과서의 기술도 이와 비슷했다.
 
 관련 사서와 인터넷을 뒤졌지만, 「趙秉甲의 功德碑」나 「趙秉甲의 後孫」에 관한 이야기는 찾기 어려웠다.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한참 헤맨 끝에 「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의 曺光煥(조광환·전북 학산여중 교사) 이사장이 쓴 「趙秉甲을 위한 변명」이라는 글을 찾았다. 이 글에 趙秉甲의 功德碑에 관한 얘기가 나와 있었다.
 
 <게다가 태인 현감을 지낸 자기 아버지 善政碑(선정비)를 세운다고 강제로 거둔 돈이 1000여 냥이나 되었습니다. 여기서 한술 더 떠 그는 大同米(대동미)를 쌀로 받는 대신 돈으로 거두고, 그것으로 질 나쁜 쌀을 사다 바쳐 차액을 착복하였습니다. 이렇게 백성을 수탈하고, 나라 財政(재정)을 파먹었으니, 그는 관리가 아니라 강도였지요.
 
 마침 善政碑 얘기가 나왔으니 한 말씀 더 하지요. 경남 함양읍 상림 북측 역사인물공원 앞엔 「郡守趙侯秉甲淸德善政碑」(군수조후병갑청덕선정비)라는 이름의 趙秉甲 善政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곧바로 曺光煥 이사장과 전화통화를 했다. 그는 현재 전북 井邑(정읍)에서 교사생활을 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 古阜는 현재의 전북 정읍시 관할지역이다.
 
 ―선생님이 쓰신 글에서 古阜 군수 趙秉甲의 善政碑에 관한 얘기가 들어 있더군요. 저는 「趙秉甲의 功德碑가 경남 金海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功德碑가 경남 함양에 있는 거군요.
 
 『金海에도 있고, 함양에도 있습니다. 趙秉甲의 功德碑는 여러 군데 있어요. 趙秉甲은 古阜 군수로 가기 전에 金海, 함양에서도 벼슬을 했거든요. 제가 확인한 것은 金海시 생림면과 하동군에 있는 것까지 모두 세 개입니다』
 
 
 『趙秉甲 後孫을 알면 가르쳐 달라』
 
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曺光煥 이사장.

 ―혹시 「최근에 趙秉甲의 後孫들이 功德碑들 가운데 하나를 새로 단장하고 제사를 지냈다」는 얘기를 들어 보셨습니까.
 
 『아니, 누가 그래요. 정말 그 後孫들이 功德碑를 새로 단장했답니까? 함양에 있는 것은 새로 단장하지 못했을 겁니다. 거기는 역사인물공원이라서 관광객들이 많습니다. 그런 공개된 곳에서 後孫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았을 겁니다. 그보다 後孫들이 세상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는 게 사실입니까. 저는 처음 듣는 얘기인데요』
 
 ―동학농민단체에서 동학혁명의 도화선이 된 趙秉甲의 後孫에 대해서 모르십니까.
 
 『趙秉甲의 무덤이나, 後孫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알아봤는데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무덤이 어디인지, 後孫들이 어디서 사는지, 얼마나 되는지 알기 어렵더군요. 혹시 後孫들이나 무덤이 어디인지 아시게 되면 저희에게도 알려 주십시오』
 
 趙秉甲의 후손에 대해서는 얘기를 듣지 못했지만, 공덕비가 여러 군데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수확이 있었다. 함양의 공덕비는 새로 세워졌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하니 무작정 김해에 내려가서 공덕비를 찾아볼까 하다가, 김해市 상림면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면사무소의 여직원은 『趙秉甲인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면사무소 앞에 비석 다섯 개가 있다』며 『마을의 어른들에게 확인한 후 연락을 해주겠다』고 했다. 여직원의 친절이 고마웠다. 뜬금없는 소리로 들렸던 「趙秉甲의 功德碑」가 어렴풋하게 잡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생림면사무소 여직원의 전화를 기다리면서, 趙秉甲의 집안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本官(본관)을 안다면, 그 집안의 족보에서 趙秉甲 후손들을 알아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趙秉甲의 본관에 대해서는 「풍양 조씨」, 「함안 조씨」, 「양주 조씨」라는 세 가지 說(설)이 있었다. 인터넷에서 한국의 주요 姓氏(성씨) 族譜(족보)를 알려 주는 「韓國名家」라는 사이트를 발견했다.
 
 이 사이트의 명단에서 우선 「楊州 趙氏(양주 조씨)」를 클릭하자, 楊州 趙氏의 대표 인물 이름들 가운데 趙秉甲의 行列(항렬)로 보이는 동시대 인물 몇 명이 눈에 띄었다. 趙秉世, 趙秉徽, 趙秉式, 趙秉稷….
 
 趙秉甲은 보이지 않았다. 「풍양 조씨」, 「함안 조씨」를 차례로 검색했지만, 「고부 군수 趙秉甲」은 없었다.
 
 생림면사무소의 연락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趙秉甲 後孫이 功德碑에서 제사 지냈다』
 
김해시 생림면에 있는 趙秉甲의 공덕비 모습. 왼쪽은 정면, 오른쪽은 뒷면이다.

 지난 9월29일, 경남 김해시 생림면으로 출발했다. 생림면사무소의 여직원이 『면사무소 앞에 있는 비석 가운데 하나가 趙秉甲의 功德碑가 맞다』고 확인해 줬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을 주민 가운데 이 비석들의 內歷(내력)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KTX를 타고 부산에서 내려, 김해로 가는 105번 버스를 탔다.
 
 김해는 부산에서 1시간 남짓 걸렸다. 김해시에 내려서 金海文化院(김해문화원) 홍관표 원장을 찾았다. 김해문화원에서 향토사학자나 학예연구원을 소개받아, 趙秉甲의 功德碑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어서였다. 마침 홍원장은 功德碑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7년인가 8년 전이죠. 제가 부원장으로 있을 때 생림면에 있는 功德碑에서 김해문화원 주관으로 제사를 지낸 적이 있어요. 지금은 돌아가신 전임 원장님과 창원전문대 송종복 교수님이 적극적으로 나섰지요. 송종복 교수가 趙秉甲의 功德碑를 처음 발견했거든요. 그래서 그 後孫들이 참석해서 간단하게 제를 지낸 겁니다』
 
 「趙秉甲의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냈다」는 이야기는 아마 여기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
 
 ─역사사전과 교과서에 趙秉甲은 「탐관오리」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의 功德碑가 서 있습니까. 설사 功德碑가 있다고 해도 김해문화원이 주관해서 趙秉甲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당시 趙秉甲의 제사를 지내는 데 대해 반발은 없었습니까.
 
 『송종복 교수님을 찾아가면 그간의 사정을 잘 아실 수 있을 겁니다. 趙秉甲의 功德碑에 대해서는 송교수님이 전문가시니, 송교수님과 함께 功德碑를 보러 가시죠』
 
 
 趙秉甲「永世不忘碑」확인
 
생림면사무소 최형권 면장과 마을주민 박두정씨가 功德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때 趙秉甲의 後孫들이 정말 참석했습니까.
 
 『저도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데 한 분이 참석했어요. 그런데 이름도 안 가르쳐 주고 말씀도 없이 제사만 지내고 가시더만요. 당시 문화원장님과 송교수님께 인사하는 것을 듣고 알았어요. 그 분에 대해서도 송종복 교수님이 잘 아실 겁니다』
 
 송종복 교수를 만나기 위해 창원전문대 홍보실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송종복 교수를 만날 수 없었다. 癌투병으로 오래 고생하던 송교수의 부인이 전화를 건 그날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喪中(상중)인 분을 번거롭게 할 수는 없었다. 송교수의 전화번호를 얻은 후, 혼자 생림면사무소로 향했다. 김해시내에서 택시로 20여 분을 달리자, 2층짜리 건물의 생림면사무소가 보였다. 면사무소에는 崔亨元(최형원·55) 면장과 마을 주민 朴斗正(박두정·57)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朴斗正씨는 이 마을에 오래 살았고, 지난해까지 면사무소에서 총무계장으로 일했기 때문에 功德碑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功德碑 5개는 면사무소 정문 우측 담장 앞에 있었다. 功德碑는 170~ 190cm 높이로, 맨 왼쪽에 功德碑를 세운 내력을 적은 「宣恩臺(선은대)」가 있었다. 그 우측으로 당시 영의정이었던 沈舜澤(심순택), 관찰사 李鎬俊(이호준: 李完用의 養父)에 이어 趙秉甲의 功德碑가 세워져 있었다.
 
 功德碑들은 모두 세월의 풍화에 닳아 글씨가 정확히 보이지 않았으나, 趙秉甲의 功德碑는 글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趙秉甲의 功德碑 가운데 肉眼(육안)으로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府使趙侯秉甲 永世不忘碑…」
 
 ―이 功德碑가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습니까.
 
 『원래 일제시대에 만든 옛 면사무소 앞에 있었습니다. 관리를 안 하고 관심이 없으니까, 풀에 뒤덮여 있고 엉망이었어요. 그러다 지금 면사무소를 새로 만들면서 1982년에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110년 만에 밝혀진 功德碑 주인
 
 ―그런데 이 功德碑가 趙秉甲에 관한 것인지 어떻게 알았습니까.
 
 『우리가 뭘 아나요. 「趙秉甲」이라고 쓰여 있었지만, 누구인지 몰랐어요. 1999년인가 2000년인가 창원전문대 교수 한 분이 功德碑 임자를 찾아냈어요. 그래서 우리도 알게 됐지요』
 
 ―功德碑를 세울 정도로 趙秉甲이 이곳에서 선정을 베풀었나요.
 
 『선은대에 있는 내용을 마을 어르신 한 분이 풀어 놓은 것이 있어요. 거기에 보면, 趙秉甲이 어떤 일을 했는지 적혀 있어요』
 
 朴斗正씨가 가져온 자료에 功德碑를 세운 내력이 나와 있었다. 자료는 1986년 작고한 마을 주민 김상하(무형문화재 11호 김수로왕릉 전례절차 전수자)씨의 遺筆(유필)을 요약한 것이다.
 
 <朝鮮 高宗 21년(1884)에 金海市 생림면 지역에 극심한 가뭄으로 농작물이 皆無(개무) 상태로 民生(민생)이 塗炭(도탄) 지경이었다. 이때 지방 유지들이 피해지역의 地稅(지세) 면제 건의서를 金海 부사 趙秉甲에게 제출한 바 趙秉甲 부사는 이를 도관찰사에게 上申(상신)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李鎬俊은 이곳을 순시하고 그 사실을 朝廷(조정)에 奏請(주청)한 바, 영의정 沈舜澤의 주선으로 전면 면제 혜택을 받았다. 그 후 이곳 생림면민의 誠金(성금)으로 고종 25년(1888) 9월에 宣恩臺를 세웠고 동시에 趙秉甲 부사, 李鎬俊 관찰사, 沈舜澤 영의정의 功德碑를 세웠다>
 
 
 『조상 碑 지켜 줬는데 인사도 안 하더라』
 
 ―몇 년 전 功德碑 앞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하던데요. 어떤 이유로 제사를 지냈는지 기억나십니까.
 
 『그 창원전문대 교수가 功德碑 주인이 누구인지 알았고, 옛날에 우리 마을에서 善政을 베푼 사람이라고 하니까, 간단하게 제사를 지낸 겁니다. 당시 김해문화원장님도 의미가 있다고 하시고 해서, 저희 면사무소에서 간단히 음식을 차렸지요』
 
 ―당시 趙秉甲의 後孫들이 왔다던데요.
 
 『예, 맞아요. 한 분인가 오셨는데, 말씀도 없으시고 한쪽 구석에 있다가 절하고 가시더만요. 다른 사람들하고 말씀도 통 없으시던 게 기억납니다』
 
 ―「최근에 그 後孫들이 다시 와서 功德碑를 새로 단장하고 제사를 지냈다」는 얘기는 못 들어보셨습니까.
 
 『제가 작년까지 면사무소에 다녔는데, 功德碑를 새로 단장했다는 건 사실이 아닙니다. 아, 맞다. 작년 언젠가 功德碑 앞에 세 명인가가 서서 한참을 만지고 절하고 그랬는데, 생각나네. 後孫들이 오기는 왔는기라. 면장님도 기억나지요?
 
 하도 오랫동안 그 앞에 있어서 우리는 비석에 해코지하나 싶어 뛰어나가 보지 않았능교. 그랬더니 자신들이 「趙秉甲의 後孫들」이라고 하데예.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뭐라뭐라」 하더니 그냥 휑하고 가요』
 
 ―면사무소분들하고 인사도 없었나요.
 
 『인사는 무슨, 그래도 우리가 저들 조상 碑를 관리하고 제사도 지내 줬는데, 인사라도 하고 그러면 안 좋나.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냥 갔어요』
 
 ―어찌됐든 면사무소에서 자신들의 조상 비석을 보존해 준 거나 다름 없는데요.
 
 『그 조상이 안 좋은 일로 역사에 남아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꺼. 그렇다고 해서 누가 이제 해코지하는 사람이 있나, 뭐라 하나. 좋은 일도 있고 안 좋은 일도 있는 거지. 참 내, 그 사람들도』
 
 「承政院 日記(승정원 일기)」 高宗 31년 2월15일조에 보면 趙秉甲의 年表(연표)가 나와 있다.
 
 趙秉甲은 1887년 8월6일 당시 43세에 金海 부사로 와서 1889년 2월10일까지 약 1년 6개월 동안 부임했다. 이어 1889년 2월10일에 충북 영동 현령으로 발령받았지만, 2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자신과 조선 왕조에 운명의 장소가 된 古阜에 군수로 부임하게 된다.
 
 군수로 발령받은 지 3개월 후 母親의 別世로 군수직을 사퇴한다. 趙秉甲은 3년간의 母親喪(모친상)을 마치고 1892년 5월에 古阜 군수로 재임용된다. 그는 1893년 11월30일 익산 군수를 거쳐, 전국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던 1894년 1월9일 古阜 군수로 다시 기용됐다.
 
 부임한 지 한 달을 조금 넘긴 2월15일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시위대는 東學農民혁명을 일으켰으며, 趙秉甲은 이를 피해 고향집이 있던 공주 근처에서 은둔했다.
 
왼쪽에서 두 번째에 앉아 있는 사람이 대한제국 고종 황제. 그 왼쪽이 이토 히로부미. 오른쪽 네 번째가 조중웅. 맨 오른쪽이 이완용의 처남인 조민희.

 
 古阜 군수 세 번 만에 東學農民革命 일어나
 
 金海를 떠난 지 5년 만에 趙秉甲은 東學農民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역사에 길이 남게 됐다. 金海의 功德碑에 나온 「永世不忘(영원히 잊지 못한다)」는 글귀를 보면서, 「趙秉甲이 자신이 惡名으로 잊혀지지 않을 것을 알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趙秉甲이 정말로 김해에서 善政을 베풀었는지, 비석을 찾아와 제사를 지낸 趙秉甲의 後孫들은 누구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아직 喪中인 창원전문대 송종복 교수에게 연락을 취했다.
 
 송교수는 『내가 정신이 없어서 정확히 말해 주지는 못한다』면서도, 趙秉甲의 功德碑와 趙秉甲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줬다.
 
 ―功德碑를 어떻게 발견했습니까.
 
 『제가 사학과(부산大 사학과 65학번)를 졸업했습니다. 1999년 부산大 사학과에서 나오는 논문집인 「釜大史學」 제22집에 「金海 부사 교체, 치적에 관한 고찰」이라는 논문을 발표했어요.
 
 당시 수령직 교체 실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趙秉甲의 金海 재임時 행적에 관한 사료를 입수했어요. 그때 功德碑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지요. 여러 가지를 종합해 보니, 金海의 趙秉甲이 古阜 군수였던 趙秉甲이라는 짐작을 했어요. 그래서 정읍시문화원 최현식 원장에게 확인해 보니, 古阜 군수였던 趙秉甲이 맞더군요』
 
 ―정말 趙秉甲이 金海에서 功德碑를 세울 만큼 선정을 베풀었습니까.
 
 『가뭄이 들어서 세금을 내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여러 차례 朝廷에 減稅(감세)를 건의했습니다. 그래서 減稅가 됐고, 지역 농민들과 지주들이 한숨을 돌린 거죠』
 
 ―경남 함양에도 趙秉甲의 善政碑가 있더군요.
 
 『네, 맞습니다. 함양 상림에 「郡守趙侯秉甲淸德善政碑」(군수조후병갑청덕선정비)라는 이름의 趙秉甲 善政碑가 있습니다. 金海에 오기 전에 함양에서 군수를 했거든요. 함양에 있는 碑는 고종 24년(1887) 7월에 세웠습니다. 만약 趙秉甲이 정말 선정을 베풀지 않고 억지로 만든 것이라면, 전국에서 농민들이 亂(난)을 일으켰는데 그 碑들이 제대로 서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호남 수령들의 재물 욕심 특히 심해』
 
압송되어 가는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

 ―그런데 趙秉甲이 5년 후 탐관오리로 지목돼 동학혁명의 도화선이 되는 이유는 뭘까요. 「고종실록」 등에 그가 백성들을 수탈한 내용들이 상세히 나와 있지 않습니까.
 
 『조선후기 수령들의 평균 재임기간이 불과 1년 6개월입니다. 그러다 보니 수령들은 자신이 언제 물러날지 몰라서 전전긍긍합니다. 그러니 힘있는 사람들에게 뭐라도 줘야 하고, 신분이 불안하니까 재물에 욕심을 낸 거죠.
 
 趙秉甲이 부임했던 古阜의 경우는 당시 곡창지대라서 수령들의 재물 욕심이 특히 심했어요. 그런 와중에 趙秉甲이 가뜩이나 안 좋을 때 부임해서 난리가 난 겁니다. 제가 조사한 바로는 趙秉甲이 前任地(전임지)에서 古阜에 내려가기 전에, 古阜 관아가 습격당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와도 별수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趙秉甲은 자신이 東學農民혁명의 도화선이 된 것에 억울함을 호소했다.
 
 1894년 전라도 강진 고금도에 귀향을 떠난 지 4년 후인 1898년 8월19일자 「독립신문」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해명성 기사를 실었다.
 
 <民擾(민요)는 古阜 민요 수월 전에 고산 등 각 군에서 먼저 일어났고, 동요는 보은 등 각 군 지방에서 1893년 가을에 일어났고, 갑오동요는 전봉준이가 사월에 무장에다 방을 걸고 고창 등 각 군에서 작요한 것은 그때 감사 김문현씨의 등보가 있었으니 古阜 동요가 아닌 것은 가히 알겠으며 또 민요로 말할진대 백성이 관장의 탐혹을 못 이겨 일어났다 할진대 趙秉甲씨가 범죄 사실이 없는 것은 그때 명사관 조명호·안핵사 이용태·염찰사 엄세영·감사 김문현 제씨가 다섯 번 사실하였으되 소위 장전이라 이르던 1만6000냥 내에 2800냥은 당초에 허무하고 1만3200여 냥은 보폐가 분명한지라 만일 안핵사 이용태씨가 빨리 장계를 하였더라면 趙秉甲씨는 다만 민요로 논감만 당하였을 것을 이용태씨가 무단히 석 달을 끌다가 비로소 무장군 동요 일어난 후에 겨우 장계를 하여 그해 정월에 갈려간 趙秉甲씨로 하여금 오월에 와서야 파직되고 귀양간 일을 당하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저간의 시비는 세계 제 군자가 각기 짐작을 하시오>

이름: 백길현 (hyunjae1@hanmail.net)
2007(포덕148년)/1/15(월)
jo14.jpg (115KB, DN:31)
월간조선-조병갑기사 12월호-2  
趙秉甲에게 맞아 죽은 全琫準의 아버지
 
全琫準 공초록.

 趙秉甲의 수탈이 도를 지나치자, 농민들은 군수에게 訴狀(소장)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기로 했다.
 
 이때 앞장선 사람이 全琫準의 아버지 全彰赫(전창혁)과 金道三(김도삼), 鄭一西(정일서) 세 사람이었다. 全彰赫이 그중에 장두(우두머리)였다. 全彰赫과 주민들은 고부관아로 가서 만석보의 보세감면 등을 요청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익산접주로 참여했던 吳知泳(오지영)의 「東學史」(동학사, 1936)에는 당시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부 백성들은 이런 원통한 사정을 들어 군수 趙秉甲에게 연명 소장을 제출했다. 그러나 군수 趙秉甲은 이것을 난민으로 몰아 대표자 세 명을 때려 가두고 전라감영에 보고를 내어 대표자 세 사람을 감영으로 송치하여 버렸다.
 
 이때, 전라감사 金文鉉(김문현)은 이들 대표자 세 사람이 많은 백성들을 충동시켜 난을 일으킨 것이라 하여 엄형으로 대표자들을 징벌한 후 다시 영을 내려 고부 본옥으로 되돌려 보내 嚴刑納考(엄형납고)하라고 했다. 이로 인해 대표자 세 사람은 다시 고부로 돌아와 중장을 맞고 옥중에 갇히어 있던 바, 총 책임자 全彰赫은 마침내 옥중에서 매 맞아 죽고 말았다〉 (최현식, 「갑오동학농민혁명사」 中)
 
 
 「全琫準實記」가 전하는 全琫準의 恨
 
 정읍에서 태어나 동학에 참여한 사람들의 체험담을 채집해서 기록한 張奉善(장봉선)의 「全琫準實記」(전봉준실기, 1936년)에는 당시 상황이 조금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全琫準實記」는 「趙秉甲이 자신의 모친상 때 부조금 2000냥 모금 책임을 맡았던 全琫準의 부친 全承?(전승록)이 부의금을 모아 주지 않은 데 대한 분풀이로 全承?을 때려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承?」은 전봉준 아버지의 또 다른 이름이다.
 
 張奉善은 1902년 정읍에서 태어나 교편생활을 했다. 張奉善은 1936년 정읍군지를 편찬 발행할 때, 동학운동 참가자의 체험담과 40년 동안 전해 내려오는 촌로들의 증언을 엮어 「全琫準實記」를 썼다.
 
 <당시 고부군수 趙秉甲은 善治에는 用心치 않고 악행을 일삼으며 백성의 재물을 奪取(탈취)키에 눈이 붉었다. 그러다가 母喪을 당하여 辭職奔喪(사직분상: 喪을 위해 사직함)하였으므로, 追勢(추세)를 좋아하는 窮儒吏屬(궁유이속)들이 부의를 主唱(주창)하고, 金 이천 냥을 분배하여 향교 掌儀(장의) 金成天과 前 掌儀 전승록(봉준의 父)에게 收捧方(수봉방: 돈을 거두는 책임자)을 의뢰하였더니 成天이 차를 欠用(흠용)하고 曰 『秉甲은 본군 재직 중 추호의 善治가 없었으며, 기생의 죽음에 무슨 부의냐』 하는 대언을 토하였다.
 
 秉甲이 母喪으로 인하여 퇴관은 하였으나, 고부는 지역이 광활하고 백성이 富饒(부요)하여 財物搾取(재물착취)에 만족함을 당시 생각던 중 兼(겸)하여 이말을 듣고, 含毒(함독)의 餘에 재임을 운동하여 다시 부임하였다. 그러나 金成天은 旣死(기사)하였으므로, 전승록만 捉來(착래: 잡아옴)하여 곤장을 亂打出送(난타출송)함에 歸來 후 一月 내에 杖毒으로 死하였으니, 琫準의 철천의 한이야 어찌 다 말하랴. 그는 무슨 생각이 있든지 兵書를 보기 시작하였다>
 
 정읍의 동학농민운동 연구가인 崔玄植씨는 『村老들에 의하면 전창혁은 掌儀가 아니라 동회의 일을 보는 사람(지금의 里長과 같음)이었는데, 趙秉甲의 부의금을 거두어 주지 않았다 하여 관가에 끌려가 곤장을 맞았다』고 말했다.
 
 「東學史」와 「全琫準實記」에 나타난 全琫準 아버지의 사망 경위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동학혁명 당시 생존한 사람들이 증언한 토대로 한 史料 모두 「고부군수 趙秉甲이 자신의 失政과 탐학에 항의하는 全承?을 곤장형에 처해 죽게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두 기록을 합하면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김해부사 趙秉甲이 1889년 4월 고부군수로 발령 받자마자 어머니 喪을 당했다(후임 군수가 동년 8월에 부임). 趙秉甲의 부의금을 걷을 책임을 맡은 全彰赫과 金成天은 이를 거부했고, 이 이야기는 趙秉甲의 귀에 들어갔다.
 
 趙秉甲은 喪 중이라 어쩔 수 없이 참았지만, 이 두 명에 대해 앙심을 품었다. 喪을 마친 趙秉甲은 1892년 4월 고부군수에 다시 부임해 왔다. 마침 全彰赫이 농민들의 대표로 만석보 조세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러 오자 趙秉甲은 이를 곤장으로 다스렸고, 全彰赫은 그 후유증으로 죽었다>
 
 全琫準은 심문과정에서 아버지가 고부군수에게 맞아 죽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언급할 경우, 자칫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거사를 일으켰다는 오해를 받을까 우려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全琫準은 심문과정에서 『일신의 피해 때문이 아니라, 백성을 고통에서 구하고,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除暴救民, 輔國安民)』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申福龍(신복룡) 건국大 교수는 『全琫準 아버지가 趙秉甲의 탐학에 항의했고 그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했다.
 
 
 폭발한 민심
 
 申교수는 그의 저서 「전봉준 평전」(지식산업사)에서 이렇게 정리했다.
 
 『동학사, 전봉준실기, 천도교 창건사, 주한일본 공사관의 기록, 고부 일대에서 수집한 村老들의 증언, 해월 崔時亨(최시형)이 全琫準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비의 원수를 갚으려면…」 표현 등 여러 자료에서 全琫準의 아버지가 장살되었다는 것을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1월10일 고부관아를 습격하면서 시작됐다.
 
 全琫準은 훗날 심문 과정에서 『난을 일으키기 전 고부 관아와 전라감영에 수차례 소장(진정서)을 넣었으나 소용이 없었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40~60명씩 연명을 해서 訴(소)를 제기했으나, 번번이 監營(감영)에 갇히거나 쫓겨났다.
 
 全琫準은 탐관오리를 제거하려면 물리적인 행동에 들어가야 함을 깨달았다. 이에 全琫準은 동지를 모아 1893년 11월, 거사를 알리는 사발통문을 만들어 돌렸다. 총 20명이 서명을 한 이 사발통문 결의문의 첫째 항이 바로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趙秉甲을 효수한다」였다.
 
 한참 거사가 준비 중이던 1893년 11월30일, 趙秉甲이 갑자기 익산군수로 발령받았다. 全琫準은 거사 일자를 확정하지 못하고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 달 뒤, 익산군수로 갈 줄 알았던 趙秉甲은 무슨 일인지 다시 고부군수로 再발령을 받았고, 드디어 분노한 민심이 폭발했다.
 
 全琫準은 공초에서 『趙秉甲은 오자마자 학정을 했으며, 인민들이 1년간 참고 또 참고 견뎠지만, 더는 못 참아 부득이 난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趙秉甲의 든든한 배경
 
 趙秉甲은 어떻게 익산군수로 가지 않고, 다시 고부군수로 再발령을 받았을까? 趙秉甲의 든든한 배경을 잠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趙秉甲은 인사권을 쥐고 있던 오늘날의 내무부 장관 격인 이조판서 沈相薰(심상훈)과는 사돈지간이었고, 영의정을 지낸 趙斗淳(조두순)의 조카(庶姪)였으며, 좌의정 趙秉世(조병세: 을사조약 후 음독자결), 前 충청관찰사 趙秉式(조병식: 1889년 함경도 관찰사 재직時 對日防穀令 선포), 충청·전라관찰사 趙秉鎬(조병호)와는 같은 항렬이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한 배경을 가졌던 것이다. 趙秉甲은 이런 배경을 이용해 전라감사 金文鉉에게 고부군수 자리보전을 위한 로비에 들어갔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趙秉甲이 익산군수로 발령받자, 이조에서는 『군수 趙秉甲이 본조의 판서 沈相薰과 親사돈 간으로 서로 피해야 할 혐의가 있는데, 멍청하게 후보자 추천을 해서 낙점까지 받았으니 이를 시행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냐』고 임금에게 건의를 했다.
 
 전라감사 金文鉉은 1월9일 장계를 올려 「前 고부군수 趙秉甲이 오랫동안 逋欠(포흠: 밀린 세금)한 많은 수를 차례로 메워 장부를 정리해야 하는데, 조세를 받는 일이 한창 벌어지고 있어서 아직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습니다」하면서 趙秉甲을 유임시킬 것을 건의했다.
 
 趙秉甲이 조세 장부를 정리한다면서 아직 고부에 머물고 있을 때, 한 달 동안 무려 6명의 군수가 발령받았으나 이들은 전라감사 金文鉉과 趙秉甲의 배후인물들의 압력에 막혀 한 명도 고부 땅을 밟지 못했다.
 
 趙秉甲 후임으로 처음 발령을 받은 李垠容(이은용)은 안악군수로 再발령을 받았고, 李垠容 후임으로 申在墨(신재묵)·李奎白(이규백)·河肯一(하긍일)·朴喜聖(박희성)·康寅喆(강인철)이 연달아 임명되었으나 모두 신병을 이유로 군수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정을 볼 때 趙秉甲이 일전에 풍기군수와 영동현감에 제수받았을 때 신병을 이유로 부임을 거부하여 다른 곳에 발령받은 것과, 모친 喪을 당해 쉬었다가 다시 고부군수로 온 것도 그의 든든한 배경과 연관이 있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한 달 만에 다시 趙秉甲은 고부군수로 유임이 됐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마자 全琫準은 곧바로 행동에 들어가 고부관아를 습격했다(1차 고부민란).
 
 16세에 고부민란을 목격한 박문규는 회고록에서 「말목장날 통문이 왔다. 저녁 후 여러 동네에 징소리며 나팔소리, 고함소리가 천지를 뒤끓더니 수천 명 군중들이 내 동네 앞으로 몰려오며 고부군수 탐관오리 趙秉甲을 죽인다고 민요가 났다」고 당시 상황을 기록해 놓았다.
 
 趙秉甲은 난민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순창을 거쳐 전주로 도망갔다.
 
조선말기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지낸 趙斗淳이 趙秉甲의 큰아버지다.

 
 『趙秉甲은 수갑과 차꼬를 채우고 칼을 씌워 잡아오라』
 
 1894년 2월15일 趙秉甲의 후임 군수로 발령받은 朴源明(박원명)은 全琫準에게 간곡히 타이르며 「지금까지의 잘못된 것을 모두 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말을 들은 全琫準은 그해 3월13일 난민들을 해산시켰다(1차 고부민란 종식).
 
 조정은 군수를 교체하고, 동시에 민란의 원인을 조사하고, 난민을 진정시키기 위해 안핵사 李容泰를 고부 현지로 파견했다. 그런데 이 李容泰가 뒤늦게 나타나 말썽을 일으켰다.
 
 그는 민란을 일으킨 동학교도를 찾는다며 군사를 풀어 가옥을 불사르고, 살인과 강간, 약탈을 저지르는 등 고부를 공포 분위기로 만들었다. 李容泰의 행위에 격분한 全琫準은 3월21일 고부 백산에서 또다시 봉기를 하였다(2차 고부민란). 이후 동학농민혁명은 전국으로 번져 1년간 온 나라를 뒤흔들었고, 결국 조선왕조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당시 조정에서 파악한 동학농민혁명의 1차 원인은 수령의 탐학이었다.
 
 「승정원일기」와 함께 국가 공식기록인 「日省綠(일성록)」 1884년 2월30일자 기사에서 고종은 『진실로 탐묵이 없었다면 어찌 민란이 일어났겠는가, 백성들로 하여금 剝割(박할: 탐관오리가 백성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음)을 견딜 수 없어 오늘날의 모양에 이르도록 한 것에 생각이 미칠 때마다 더욱 원통하고 한탄스럽다. 탐묵은 엄하게 징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탄을 했다.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 1894년 4월18일자에는 고종의 다음과 같은 전교가 실려 있다.
 
 <근래에 백성들이 소란스럽게 떠들고 정착하지 못하는 것은 백성을 향하는 나의 지극한 마음을 체득하지 못한 수령들의 잔인하고 가혹하기 그지없는 정사로 인해 백성들이 살아갈 수 없게 된 데서 빚어진 것이다. 이 때문에 소란을 일으키는 폐단이 생기고 분수를 어기고 규율을 위반하는 일이 종종 일어나는 것이다. 그 행동을 보면 매우 놀랍지만 그 정상에 대해서는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이에 법과 기강을 보임으로써 폐단을 바로잡아 탐오한 관리들을 내쫓고 감독하는 조정의 조치가 있을 것이다>
 
 고종은 이같은 전교를 내림과 동시에 『趙秉甲은 수갑과 차꼬를 채우고 칼을 씌워 잡아 오라』고 특명을 내렸다.
 
 
 죄를 뉘우치지 않은 趙秉甲
 
 4월20일 趙秉甲은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1월에 민란이 났는데, 趙秉甲이 4월이 되어서야 잡혀 온 것은 전라감사 金文鉉과 이후 파견된 안핵사 李容泰가 제대로 보고를 하지 않거나, 일처리를 못 했기 때문이다.
 
 金文鉉은 趙秉甲을 감싸다 일을 키웠기 때문에 초반에 자기 손으로 고부민란을 어떻게든 진압해 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2월15일이 되어서야 趙秉甲을 파직시켜야 한다고 장계를 올렸다.
 
 그러자 의정부는 『이번 소요는 실로 원망이 쌓여 조화를 해치게 하는 정사에 기인한 것이니 필시 그 원인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해당 수령(趙秉甲)이 직무를 방치하여 일을 그르쳤음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가 처음에는 그를 표창하고 유임시킬 것을 청하다가, 이제 와서 파직하기를 청하니 어찌 이리도 앞뒤가 상반된단 말입니까』라며 임금에게 金文鉉을 처벌하라고 주청했다.
 
 이후 파견된 안핵사 李容泰는 4월이 넘도록 민란 조사 보고서는 올리지 않고, 도리어 고부 군민을 잡아 죽이면서 일을 키우고 있었다. 조정은 『무력을 사용하더라도 과한 형벌을 가해서 안 될 것이니 조정의 이 뜻을 전라감사나 안핵사에게 알려 시행하라』고 했으나, 李容泰는 정반대로 일처리를 한 것이다.
 
 잡혀 온 趙秉甲은 변명하면서 죄를 피하기에 급급했다.
 
 의금부는 1894년 4월23일 「趙秉甲이 입을 제대로 열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趙秉甲이 처음 소란은 세금 거두는 문제 때문에 일어났고, 두 번째 난은 자기가 물러난 뒤의 일이라 모르는 일이라 말합니다. 모호하게 공초하고 끝내 사실대로 진술하지 않으니 그 정상을 따져 보건대 지극히 놀랍습니다. 보통 심문으로 자백받을 수 없으니 刑推(형추: 형틀 등을 사용한 좀더 가혹한 심문)하여 실정을 캐내야 합니다>
 
 5월4일에 가서도 趙秉甲이 진상을 제대로 불지 않자, 의금부는 『한결같이 말을 꾸며 대면서 끝내 사실대로 바르게 말하지 않고, 불분명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으니 너무도 놀랍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고종은 『이 죄수는 비단 贓罪(장죄: 뇌물죄)를 범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학대한 일도 많아서 남도의 소란이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심상하게 처벌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시 한 차례 엄히 형신한 뒤에 원악도에 안치하는 형전을 속히 시행하여 당일로 압송하라』고 지시하였다.
 
 
 고금도로 유배
 
동학교주 최시형

 이리하여 趙秉甲은 전라도 강진군 고금도로 유배됐다.
 
 의금부에서 밝혀 낸 趙秉甲의 부정축재는 쌀 659석 10두 7승 2홉 6작이었다. 의금부는 『趙秉甲이 고부에서 바친 세수 1000석을 관리들 녹봉이란 명목으로 전운소에서 빼내 가져갔는데, 여기서 녹봉을 빼고 남는 세미 660석은 부정축재한 것이니, 지금 趙秉甲이 귀양 가 있더라도 충청도 趙秉甲 집에 사람을 보내 이를 즉시 받아내야 한다』고 보고했다.
 
 趙己淑씨의 『군수는 재판을 받고 귀양을 간 것이 아니라, 무죄선고를 받았다』는 주장은 순전히 거짓말로 드러난 것이다. 趙己淑씨는 또 『재판을 담당했던 판사가 군수의 인물됨에 반해 사돈을 맺었다』고 했는데, 趙秉甲은 판사제도가 생기기 전에 의금부에서 조사를 받고 처벌을 받았다.
 
 1894년 말에 全琫準을 비롯한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이 줄줄이 잡혔다. 이들은 이듬해인 1895년 4월경 대부분 처형되었다.
 
 1895년 3월12일 총리대신(김홍집)과 법무대신(서광범)은 「趙秉甲에 대한 처벌이 너무 가벼워 다시 한 번 조사를 해서 처벌할 필요가 있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이때 이들이 고종에게 보고하여 재가를 받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작년 호남 지방에서 발생한 비적의 소요는 고부에서 처음 발생했는데, 실로 당시 군수 趙秉甲의 탐학과 불법 때문이었습니다. 현재 비적의 수괴가 차례로 잡혀 한창 조사가 진행 중에 있습니다. 고금도에 안치된 죄인 趙秉甲을 관원을 보내 押上(압상: 압송하여 끌고 옴)하도록 하여 査?(사핵: 조사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趙秉甲은 이 보고가 올라온 지 약 4개월 만인 1895년 7월3일 석방된다. 趙秉甲과 함께 석방된 인사들은 전라도 지역에서 탐학을 저질러 민심을 악화시킨 안핵사 李容泰, 전라감사 金文鉉, 전운사 趙弼永을 포함, 다른 지방의 탐관오리, 부정부패에 연루된 민비(명성황후) 일족 등 모두 260명이나 되었다.
 
 
 趙秉甲의 석방과 부활
 
 趙秉甲이 이렇게 갑자기 석방된 것은 그 사이 국내 정치환경이 급변했기 때문이다. 1895년 10월 을미사변으로 불안을 느낀 고종 황제가 1896년 2월 돌연히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피하자(아관파천), 김홍집의 親日 내각은 졸지에 역적으로 몰려 붕괴되었다. 이후 이범진(법부대신), 이완용(외부대신) 친러·친미 정권이 들어서면서 과거 부정부패에 연관된 탐관오리들을 모두 석방해 버린 것이다. 비리인사에 대한 일종의 정치적 사면이었다.
 
 1897년 12월10일 趙秉甲은 법부 민사국장 임용 후 고등재판소 판사로 재직했다. 이때 그의 사돈인 沈相薰은 여전히 탁지부대신(現 재무부 장관)·의정부 贊政(찬정) 등으로 건재했고, 같은 楊洲 趙氏인 趙秉式은 법부대신서리로 있었다. 趙秉甲이 어떻게 관직에 再임용됐는지를 밝혀 주는 기록은 찾지 못했으나 그의 이같은 막강한 「배경」이 작용했을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대한제국의 판사로 부활한 趙秉甲은 1898년 7월 동학교주인 崔時亨(최시형)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다.●

이름: 이희관
2006(포덕147년)/10/18(수)
“조기숙 前수석 증조부는 조병갑”  
조기숙 전청와대 홍보수석의 증조부가 조선 말기 탐관오리이자 가렴주구의 대명사로 동학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고부 군수 조병갑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18일 발간된 월간조선 11월호는 “제보에 따라 조 전 수석의 부친 조○○씨의 호적등본을 입수해 파악한 결과 그의 부친인 조○○씨가 조병갑의 둘째 아들로 드러났다”며 “하지만 조씨 족보 에는 조병갑의 두 아들과 딸 한명의 이름만 적혀 있을 뿐 다른 후손들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고 밝혔다. 월간조선은 조기숙 전 홍보수석을 만나 이 문제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는 창원전문 대 송모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조 수석에게 ‘당신 증조할아버지가 역사책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나쁜 분만은 아니다’고 했더니 ‘아이고, 그래요. 증조부가 그랬군요’라며 정말 좋아했다”고 덧붙였다.

월간조선은 국어대사전(이홍직 편저)을 인용, 조병갑에 대해 “ 조선 고종 때의 탐관오리로 고부 군수로서 저수지를 축조할 때 군민을 강제로 동원하고 터무니없이 세금을 징수해 700여 섬을 횡령 착복하고, 주민들에게 억지로 죄명을 씌워 불법 착복했으며, 조병갑의 학정에 대한 반발로 동학혁명이 일어났으며 동학혁명으로 귀양을 다녀온 뒤에는 판사로 임명돼 2대 동학교주 최시형에게 사형을 선고했다”고 소개했다.

월간조선 보도와 관련, 조 전수석은 이날 오전 문화일보 기자와 의 통화에서 “한 사람의 가족사만의 문제가 아닌 한국 근·현대사를 총체적으로 바라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어린 시절 사학을 전공하고 인생을 투자해 증조부에 대한 연구를 할 마음도 있었지만 개인적인 억울함을 풀기 위해 인생을 바치는 것은 소비적이라고 판단해 그만뒀다”고 설명했다.

조 전수석은 이어 “오늘 아침 출근하면서 부친의 전화를 통해 보도 사실을 전해 들었다”며 “아직 월간조선 기사를 접하지 못한 만큼 일단 기사를 본 뒤 법정 대응을 포함한 일체의 대응에 대해 고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 전 수석은 또 “공직에 있을 때의 비난 보도에 대해서는 대응을 자제해 왔지만 이제는 적극적으로 대응할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학계와 동학관련 단체는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원도연 운영위원은 “학정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고부 군수 조병갑의 증손녀가 역사 바로세우기를 주창하고 진행하던 참여 정부의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냈다니 놀랍다”고 말했다.

전북대 박물관 홍성덕 박사는 “조병갑이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이를 토대로 후손들이 입신양명했는지 파악해야 하는것 아니냐 ”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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