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갑 선정비 철거시비

뉴스 > 사회 > 지방뉴스 > 부산/경남

[부산/경남]“탐관오리 조병갑 선정비 철거를”

동아일보

입력 2014-04-07 03:00:00 수정 2014-04-07 03:00:00

함양군 시민들 상림공원서 서명운동… 郡 “비석처리문제 면밀히 검토하겠다”

‘선비의 고장’ 경남 함양군이 조선시대 군정 책임자의 공덕비 철거 문제를 놓고 떠들썩하다. 함양지역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로 구성된 공동대책위원회는 최근 함양읍 상림공원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상림공원 내 역사인물공원에 모아둔 역대 관찰사와 군수 선정비(善政碑) 32개 가운데 탐관오리로 유명한 조병갑(趙秉甲·1844∼1911)의 선정비를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병갑은 동학농민운동의 도화선이 된 고부 농민봉기의 단초를 제공한 사람이다.

조병갑의 선정비는 1887년 7월 건립됐다. 선정비에는 ‘조선 말 조 군수는 주민을 편안하게 하고 봉급을 털어 관청을 고치고 세금을 감면해 주며 마음이 곧고 정사에 엄했기에 선정을 기리기 위해 고종 24년 비를 세운다’는 내용이 한자로 적혀 있다.

대책위는 “부임 시기 등으로 미뤄 조병갑이 스스로 세운 선정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며 “상림숲의 역사는 물론이고 구겨진 함양군민의 자존심을 바로 세우기 위해 선정비 철거운동을 벌이기로 했다”고 밝혔다. 조병갑은 1886년부터 1년여 동안 함양군수를 지낸 뒤 김해부사를 거쳐 전북 고부군수로 부임했으며 고부군수 시절 폭정으로 군민들의 분노를 샀다.

대책위는 “동학동민운동 120주년이 되는 올해 이 선정비를 반드시 철거하겠다”며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철거가 아니라면 적어도 선정비 옆에 조병갑의 ‘악행(惡行)’을 적은 비석이라도 세워야 한다는 태도다. 함양군은 “좋은 것이든, 그 반대이든 모두 역사이므로 (비석 처리 문제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조병갑 선정비는 오래전부터 철거 논란이 잦았으며 2007년에는 누군가가 비석을 넘어뜨리고 비문 일부를 훼손한 적이 있다.

강정훈 기자 manman@donga.com

..............................................................................................

- 郡 "잘못된 역사도 역사" 맞서

동학혁명 120주년을 맞아 경남 함양군 상림숲 내의 조병갑(1844~1911) 공덕비 철거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27일 '함양의 선비 정신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군민들(함선군)'에 따르면 상림숲에는 최치원, 정여창, 박지원 등 '함양을 빛낸 선인' 11명의 흉상과 역대 관찰사와 군수들의 공덕비 등이 30여 개 있다.

군은 지난 2000년 '새천년 사업'의 일환으로 상림숲에 역사인물공원을 조성하면서 관내 곳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을 한곳에 모아 정비했다. 이 때 조병갑의 공덕비도 함께 옮겨져 왔다. 조선시대 말기에 전북 고부군수를 지낸 조병갑은 갖가지 악정을 저질러 1894년 동학혁명을 촉발시킨 장본인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 비석에는 '조선말 조병갑 군수는 유민을 편케 하고, 봉급을 털어 관청을 고치고, 세금을 감해주며 마음이 곧고 정사에 엄했기에 그 사심 없는 선정을 기리어 고종 24년(1887) 비를 세웠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군민들은 조병갑이 함양군수로 재임하던 당시 아랫사람들을 동원해 이런 공덕비를 세우도록 강요한 것으로 분석했다.

함선군 측은 "신라시대 대학자인 최치원 선생이 만든 상림숲에 조병갑의 비석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함양의 수치"라며 "동학혁명 120주년이 되는 올해 이를 철거하는 것이 진정한 선비 정신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다음 달 초에 서명운동에 들어가는 등 조병갑 공덕비 철거를 공론화할 계획이다.

이에 대해 군 관계자는 "잘못된 역사도 역사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철거 계획이 없다"며 "만약 철거를 하려면 여론 수렴 등 관련 절차를 거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27일 경남 함양군 상림숲에서 시민단체 관계자가 조선말기 탐관오리인 조병갑의 공덕비를 가리키고 있다. 연합뉴스

........................................................................................................................................................................................................................................

경남일보  홈 > 사회 > 사회종합
“조병갑 선정비 교육적으로 활용하자”공동대책위 “철거대신 존치” 군민서명서 제출

최경인  |  choi3736@gnnews.co.kr                          승인 2014.10.29  00:00:00

         

 

 
‘탐관오리 조병갑 선정비 철거를 위한 함양지역 공동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는 27일 함양군청 민원실을 방문, 조병갑 선정비를 교육적으로 활용하자며 군민 600여명의 서명이 담긴 건의서를 제출했다.

지난 4월 지역시민사회단체들을 중심으로 출범한 대책위는 그동안 조병갑 선정비 철거를 위한 지역 내 여론 조성과 함께 서명운동을 진행해 왔었다. 그러나 대책위는 이날 철거 대신 존치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대책위는 “현재 상황에서는 선정비를 철거하는 것보다는 교육적 차원을 위해 남겨두는 편이 나은 것 같다. 상림을 찾는 이들에게 조병갑에 대해 알리고 교육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동학농민혁명의 원인 제공자이자 탐관오리의 대명사로 알려진 ‘조병갑’의 선정비는 그대로 두고 인근에 상세한 설명을 통해 교육적 의미로서 발전시켜 나가자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군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정대훈 문화관광과장은 “조병갑 선정비 철거에 대해 찬성과 반대가 확연한 만큼 양 쪽이 만나 서로 의견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라며 “조만간 이 같은 자리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어 “ 이 또한 역사인 만큼 주민 의견 수렴을 통해 대처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동학농민혁명의 원인 제공자로 꼽히는 조병갑의 선정비에 대해 지역에서는 수차례 철거 논란이 있어 왔으나, 여론 등에 밀려 철거를 하지 못하고 있다.


조병갑 선정비 건의서
함양상림공원 내 조병갑 선정비 철거관련 건의서를 함양지역 공동대책위 관계자들이 함양군 관계자에게 전달하고있다.
사진왼쪽부터 함양시민연대 임병택 운영위원장,함양군청 문화재담당 이상현 계장, 서필상 사무국장.

 

이름: 백길현 (hyunjae1@hanmail.net)
2007(포덕148년)/1/22(월)
조병갑을_기리는내용.jpg (44KB, DN:1)
[조병갑 공덕비] 철거요청 공문발송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조병갑 공덕비를 해머로 100여차례 내리쳤으나 흠집만 조금 나고 깨지지 않아
정식으로 관계 시. 군에 철거 요청 공문을 보냈습니다.

함양군에서 제작한 안내석에는 " 조선말 조병갑 군수는 유민을 편케하고 봉급을 털어 관청을 고치고 세금을 감해주며 마음이 곧고 정사에 엄했기에 그 사심없는 선정을 기리어 고종 24년(1887년) 비를 세웠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답사 과정중에 이러한 공덕비들이 전국에 산재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백길현 심고.

------------------------------------------------------------------------------------
수신: 김해시장, 정읍시장, 함양군수, 하동군수

발신: 백길현(680924-*******, 016-777-4348)


     수원시 권선구 고색동 45-7

제목: [함양군 {역사인물공원}내 조병갑 공덕비 철거 건]

우연히, 월간조선 06년 11,12월호를 보다가 조선말 탐관오리의 대명사 조병갑의 공덕비가 함양군 [역사인물공원]내에 있다는 기사를 접했습니다.


동학혁명의 주원인 제공자이며 탐관오리(탐욕스럽고 더러운 관리)의 대명사 조병갑의 공덕비가 중요 역사인물을 기리는 [역사인물공원]내에 버젖이 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역사에 대한 무지의 소치라 할 것입니다.

 

더욱이, 공원내에는 고운 최치원 선생을 비롯, 권석도 의병장, 연암 박지원 선생 등의 흉상과 동상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탐관 조병갑의 선정비를 같이 조성했다는 것은 뒤죽박죽의 역사를 조장하는 것입니다.

 

후학들이 이것을 보고 혼란을 겪지 않을까요? 공원내 공덕비들의 조성시기를 보면 총 34개의 碑중 고종 때 세운 것이 8개, 순조 4개, 철종 2개, 헌종 3개, 광무 1개로 18개가 나라가 망해가는 시기에 세워진 것입니다.

 

善政을 많이 했다면 왜 나라가 망해가며, 동학혁명이 났겠습니까?  조병갑은 선정을 베풀어서 주민들이 공덕비를 세워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자신의 공덕비를 세운 것입니다. 자신의 봉급을 털어서 관청을 고친 것이 어찌 공덕이 될 수 있으며 가뭄이 들어 세금을 감면해 준 것은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더욱이 이런 것들이 고마워 그 크고 무거운 선정비를 세워주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이런 공덕비들은 전국에 산재해 있으며 당시 관리들 사이에 유행하던 것입니다.  본인이 인근 지역을 직접 답사한 바, 문경새재 입구(KBS드라마촬영장)에 19개, 충북 제천 문화재 단지내 10여개, 충주 외곽 다리에(건국대근처) 4개, 최시형 선생이 처형된 대구 경상감영 공원내 29개, 전북 신태인 피양정내 20여개가 있습니다.

 

 이들 善政碑(공덕비,영세불망비) 역시 국정이 혼란하거나 나라가 망해가는 헌종-철종-고종-순조 시기에 집중적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고을마다 공덕비요 선정비라면 어찌 나라가 망해가고 있었을까요?


관리가 자신의 공덕비를 직접 세운 이유는 그 어려운 과거를 통해서 벼슬자리에 올랐고 그 사실을 자신과 후손들에게 영원히 잊지않고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과거제도 외에는 출세의 수단이 없었던 조선시대에 과거에 합격해 관리가 돼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희열이었겠습니까? 지금도 지역 군수라면 알아주는 자리 아닙니까?

 

그러한 碑중에서 엽기적인 것은 돌비석으로는 불안했던지 철(鐵)주물로 碑를 만든 것입니다. 이들 비에는 [永世不亡碑]라고 쓴 것들이 있는데, 정말 그들 개인적으로는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善政碑(공덕비,영세불망비)는 허위의 역사이며 가식의 역사이며 학정의 증거물로 자리매김되어야 합니다.

 

공덕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정말 조병갑이 선정을 베풀었다고 생각하는 지역 주민들과 학자들이 있습니다. 공덕비群를 조성한 함양군은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후세의 곡해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공덕비 철거는 어떤 식으로든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역사 바로 세우기]가 아닐까요?

 

스스로 바로 서지 못한다면 어찌 이 땅의 주인이라 하겠습니까? 노예가 바로 그 입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공직자 비리가 꼬리를 물고 있는 상황에서 그 철거 義意는 크다고 하겠습니다.
조병갑의 공덕비는 전국에 3군데나 있읍니다.


경남 김해시 생림면사무소앞, 하동군, 함양군으로 조병갑은 부임하는 곳마다  자신의 공덕비를 세웠읍니다.
자신의 아버지 조규순의 [永世不亡碑]도 전북 신태인 피양정내에 있읍니다.

첨부한 자료를 검토해 보시고 김해시,정읍시,함양군,하동군 차원에서 [조병갑 공덕비]의 철거를 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흔히, 역사를 강물에 비유합니다. 강 상류가 맑지 못하면 하류가 더러워지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지금 상류로 올라가서 역사를 바로 잡지 못한다면 오염된 물은 우리들 후손들에게로 또 다시 흐를 것입니다.
스스로 바로 서지 못한다면 어찌 이 땅의 주인이라 하겠습니까?  

2007년 01월 22일

2007/02/08 10:33 답글

신고

이름: 백길현 (hyunjae1@hanmail.net)
2007(포덕148년)/1/30(화)

Re..감사합니다.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어제 함양경찰서가서 조사받고 잘 올라왔습니다.
별 일 없으니 너무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무슨 일 있으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백길현 심고.

............................................................................................................

이름: 백길현 (hyunjae1@hanmail.net)
홈페이지: http://114m.com
2007(포덕147년)/1/3(수)
조병갑 공덕비 철거 같이 하실 분 모집(두분)  
우연히 월간조선 11,12월호 를 보니
동학혁명의 주 원인자인 고부군수 조병갑의 공덕비가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공덕비는 총 3개인데
경남 김해시 생림면 면사무소앞에 1개
함양군 역사인물공원내 1개
하동군(?) 1개 가 있다고 합니다.

김해시 공덕비 경우,
그 지역 문화원장등이 공덕비에서 제사까지 지내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선정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선정을 베풀었다고 생각한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조선을 참고해 보시고
뜻있는 분들은 공덕비 철거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직접적인 철거 작업에 동참하실 두분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수원교구
백길현 심고
016-777-4348

............................................................................................................

이름: 백길현 (hyunjae1@hanmail.net)
2007(포덕148년)/1/26(금)
정읍시 조병갑 아버지[영세불망비] 철거 같이 하실 분  
신태인 조병갑 아버지 [영세불망비] 를 여러 조각으로 부수려고 합니다.
부서진 그 조각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두겠습니다.
이 역사도 함께 기록되게 할 것입니다.
동참하실 분 찾습니다.

백길현 심고.
016-777-4348

............................................................................................................

http://silver.jeongeup.go.kr/01kr/01community/free/01/index.jsp?boardId=106844&act=VIEW&searchType=ALL&searchWord=&branch_session=&pageNum=1050&pageSize=10

제목 동학혁명문화재 행사보다 永世不亡碑를 먼저 철거할것
작성자 김등녕 등록일 2007/02/02
첨부
1894년 당시 고부군수 趙秉甲의 학정에 반기를 둘고 민중의 선봉에서서 투쟁했던 全琫準장군을 기리 기위해 해마다 정읍시민들이 참여 기념행사를 전국 행사로 해왔는데 최근 수원시 백길현씨가 정읍에서 조병갑 아버지 趙奎淳의 영세불망비를 문화재 호남의 제1정에 시민들의 세금으로 보호관리 한다고 지적 정읍시민은 수치와 言語道斷 이다

해마다 시민의 세금으로 역대 군수 시장들은 5월 동학혁명 행사를 치루면서 당시 농민들이 학정에 시달려 분연히 일어섰던 전봉준 장군의 공적을 다시 한번 되새기자며 그 참된 의의와 불굴의 투지를 받들어 우리 후세들에게 그 정신을 승화하고 발전시켜나가자고 해마다 외치기만 해오고 있었으며 한편 조병갑 아버지 영세불망비는 보존관리하고있다
그런데 최근 외지인이 발견 인터넷과 정읍시에 철거를 요망 서신에 의해 본인도 혹시하며 확인결과 문화재 보물289호 호남의 제1정으로 일컬어 오는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 101-2-6 披香亭에 20여개의 현감 군수등 善政碑 위치중 上위치인 좌측에 안치해놓고 지금까지 많은 예산을 들여 관리해 오다 말썽이 일자 궁색하게 천막천으로 가려놓고있는데 피향정 주변 등 보수비가 수억원이 투입되여 관리해오고 있는곳에 貪官汚吏 조병갑의 아버지 조규순 의 영세불망비 철거 논의는 고사하고 궁여책으로 가려놓는 것이 더더욱 꼴불견이다

............................................................................................................

이름: 이규남 (tae_keuk@hanmail.net)
2007(포덕148년)/2/10(토)
조병갑 공덕비 김해서도 말썽  
조병갑 공덕비 김해서도 말썽
30대 철거주장 민원


 
 경남 김해시 생림면사무소 안에 있는 조병갑 공덕비(오른쪽에서 두 번째). 이 비는 지난 1888년 생림면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세웠다. 노수윤 기자



경남 함양에 이어 김해에도 조병갑 공덕비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철거 주장이 제기됐다.

경남 김해시는 생림면사무소 내 조병갑 공덕비 철거를 주장하는 민원이 제기됐다고 9일 밝혔다.

생림면사무소의 공덕비는 지난 1888년(고종 25년) 세워진 것으로 조병갑과 당시 관찰사 병조참판 영의정을 기리는 비석 그리고 이를 세운 내력을 적은 선은대를 포함해 모두 5개이다. 선은대에는 지난 1884년부터 1886년까지 김해지역에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돌아 피해를 입은 주민들이 1887년 조세 감면을 호소하자 당시 김해부사였던 조병갑이 관찰사를 통해 병조참판, 영의정에게 상신해 조세가 면제됐다고 적혀 있다.

시 인터넷 홈페이지에 민원을 제기한 이모(38) 씨는 "조병갑 공덕비는 철거돼야 하고 학정의 생생한 기록만 남겨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해시 관계자는 "조병갑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가 정확하게 내려진 것이 아니고 잘못된 역사를 반성하는 계기도 될 수 있다"며 철거에 유보적인 입장을 밝혔다.

한편 국사대사전(이홍직 편저)에는 조병갑이 조선 고종 때의 탐관오리로 고부군수 시절 저수지 축조시 군민을 강제로 동원하고, 터무니없이 세금을 징수해 700여 섬을 횡령 착복하는 등 학정을 일삼았고 이에 대한 반발로 동학혁명이 일어났다고 기록돼 있다.

노수윤 기자

국제신문 2007년 2월 10일짜사회면 4쪽높이 14cm넓이 20cm에 보도된 내용 펌


김해시 답변-조병갑비 철거요청 |  
2007.01.25 22:29
퍼스나콘/아이디 영역
무궁화(bohc****)
http://cafe.naver.com/rmsdka/2910

 

김해시 답변-조병갑비 철거요청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조병갑 공덕비 철거 요청에 대한 답변이 김해시에서 1차로 왔기에 알려 드립니다.

백길현 마음에 고함.
---------------------------------------------------------
안녕하십니까?


『시장에게 바란다』 인터넷 홈페이지 운영자입니다
우리시 홈페이지를 이용하여 보내주신 의견은 잘 받아보았습니다

귀하께서 동학혁명의 주 원인제공자이며 탐관오리의 대명사인 조병갑의 공덕비가 면사무소 내 세워져 있음은 김해시민의 자존심과 국민의 주체성을 해치는 일이므로 공덕비를 철거해 달라는 사항에 대해 답변드리겠습니다

공덕비 철거는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사안으로 공덕비 존치 여부 등을 결정하기까지는 다소 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어 우선 향후 처리계획에 대해서만 운영자 답변으로 대신 하고자 합니다

우리시는 관련실과와 관련기관의 의견을 조회하고 현재 조병갑 공덕비 있다는 경남 하동군과 함양군의 의견도 정식 공문으로 조회하여 검토하겠으며

또한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고 관련자료 등도 검토하여 조병갑 공덕비 철거여부를 결정토록 할 계획입니다

따라서 귀하께는 철거여부가 결정되면 별도로 통지토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전화로 조회한 결과 함양군에서는 현재 조병갑 비가 훼손되어 수사 중으로 의회에서 철거요구 발언이 나오고는 있으나 철거계획은 아직 없으며 하동군에서는 조병갑 공덕비 자체가 없다고 함을 알려드립니다

끝으로 귀하의 가정에 항상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길 기원드리며 앞으로도 우리시정 발전에 많은 관심과 성원을 당부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삼전도비 -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삼전도비(三田渡碑) 일명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47번지(당시 경기도 삼전도)에 있는 청나라의 전승비이며 송덕비(頌德碑)이다. 병자호란 때 승리한 청나라 태종이 자신의 공덕을 알리기 위해 조선에 요구하여 1639년(인조 17년)에 세워졌다.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도 부른다.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조선 국왕 인조는 만주족에 패해 머리를 땅바닥에 9번을 찧는 굴욕적인 항복 의식을 치러야 했으며, 삼전도비는 그것을 증언하는 역사적 산물이자 기념비다. 이후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머리와 받침돌 조각이 정교해 조선 후기의 뛰어난 비 중 하나로 손꼽힌다. 치욕비(삼전도의 욕비(辱碑))라고도 불리며, 비를 만들 당시의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였다. 내용은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出兵)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 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回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청나라 조정의 명으로 조선에서 건립하였다.

비의 전체 높이는 5.7m, 비신의 높이는 3.95m, 폭은 1.4m이고 무게는 32t이다. 비문은 1637년 11월 25일 인조 15년 이경석이 지었고[2], 글씨는 오준(吳竣)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呂爾徵)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다.

원래는 한강변 삼밭나루터의 항복을 했던 곳에 세워졌다가,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여 조공 관계가 단절되자 강물에 수장시켰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인 1913년에 일제가 다시 세워놓았고, 1945년 광복 직후에 주민들이 땅 속에 묻어버렸다. 1963년에 홍수로 다시 모습이 드러났고, 여러 차례 이전을 거듭하다가 1983년에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지시로 송파구 석촌동 289-3번지에 옮겼다. 이후 고증을 거쳐 2010년 4월 25일에 비석이 서 있던 원래 위치인 석촌호수 수중에서 30여m 떨어진 송파구 잠실동 47번지의 석촌호수 서호 언덕으로 옮겼다.

2007년 2월에는 30대 남성이 삼전도비에 붉은 페인트를 사용해 '철거 370'이라고 적어 훼손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정치인들이 나라를 잘못 이끌면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게 된다는 점을 경고하기 위해서" 삼전도비를 훼손했다고 밝혔다. 또한 '370'은 인조가 청 태종에게 무릎꿇은 지 370년이 지났다는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조선은 14세기 말의 건국 이래, 명나라를 사대하던 책봉국으로 있었지만 17세기에 들어오면서 만주에서 여진족들이 건국한 후금이 부흥하고, 1627년에 조선을 침공(정묘호란)했지만 조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결국 청나라와 조선은 조공 관계를 맺고 화친했다.(정묘약조)

이후 삼전도비는 소중화사상을 가진 조선사대부들에게 치욕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조선은 14세기 말의 건국 이래, 명나라를 사대하던 책봉국으로 있었지만 17세기에 들어오면서 만주에서 여진족들이 건국한 후금이 부흥하고, 1627년에 조선을 침공(정묘호란)했지만 조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결국 청나라와 조선은 조공 관계를 맺고 화친했다.(정묘약조)

이후 삼전도비는 소중화사상을 가진 조선사대부들에게 치욕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2007년 삼전도비 훼손 사건

2007년 2월 3일 오후 9시 40분경 백모(39)씨는 삼전도비 공원을 찾아 붉은색 스프레이로 비 몸체에 ‘철’ ‘거’ ‘병자’ ‘370’(인조가 항복한 지 370년이 지났다는 의미) 등의 글자를 써 놓았다.[7] 7일 서울 송파구 석촌동 삼전도비 앞뒷면에 붉은 스프레이로 낙서가 돼 있는 것을 구청 공무원이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8]

송파구청의 의뢰를 받아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370'이란 숫자가 인조청나라태종에게 항복한 뒤 370년이 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고 전국의 유사 사건을 검색한 끝에 두 사건에서 같은 차량이 사용된 사실을 확인, 추적 끝에 백씨를 검거했다.[1]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생활정보 사이트를 운영하던 백씨는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아 “치욕의 상징인 삼전도비를 철거하거나 위정자들이 보고 배울 수 있도록 청와대로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7] 몇시간이 흐른 뒤에 주변 CCTV 확인 끝에 범인 백모씨를 검거하여 체포했다.

조사결과 생활정보 제공 사이트 운영자인 백씨는 지난 1월16일 경남 함양읍의 역사인물공원에서 역대 함양군수와 관찰사의 공덕비, 동학혁명 시기의 고부군수 조병갑의 선정비 등 비석 40여개를 망치 등으로 훼손한 것으로 드러났다.[1] 백씨는 "지난해 말 월간지에 동학혁명의 원인제공자인 조병갑의 공덕비가 세워졌다는 기사를 읽고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것이란 생각에 함양에서 공덕비를 훼손한 뒤 치욕스런 삼전도비도 훼손키로 마음먹고 범행했다"며 취지를 밝혔다.[1] 그는 또 "추가로 삼전도비에 '청와대로' 등을 표기하는 등의 재범을 계획했으나 수사가 시작된 것을 알고 포기했으며 경기도 파주의 인조 묘지 앞에 설립된 사당을 훼손할 계획도 있었다.[1]"고 밝히기도 했다.

이에 문화재청이 3개월간의 복구작업을 전개한 결과 7월 15일 삼전도비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7]

복구 과정

문화재연구소가 그 복구를 위해 고안한 방식은 '습포법'이었다.[1] 이에 의해 삼전도비는 '팩'까지 했다. 습포제(세피올라이트 점토)와 유기용제를 혼합한 페인트 제거용 팩을 바른 것이다.[1]

당초에는 레이저 제거법이나 페인트 제거법, 그리고 반도체 세정에 주로 사용하는 아이스블라스터를 이용하는 방법 등도 생각했으나 각기 단점이 발견돼 결국은 습포제와 유기용제를 혼합한 팩으로 페인트를 녹여 없애는 방법을 채택한 것이다. 연구소에 의하면 페인트 제거용 팩에 포함된 유기용제는 페인트를 녹이는 작용을 한다. 나아가 습포제는 유기용제가 급속히 마르는 작용을 막고 유기용제에 녹아나온 페인트를 흡수하는 역할을 한다.[1]

습포제가 페인트를 흡수하면 얼굴에 팩을 바른 것처럼 하얗게 굳는다. 이를 저압스팀세척기를 이용해 세척하는 작업을 여러 번 반복해 마침내 삼전도비에 본래 얼굴[1]을 복원하였다.

복구가 끝난 후 삼전도비를 원래 위치로 옮기기로 결정해 2010년 위치를 이전하였다.[9] 또한 인조의 삼전도 항복 장면을 묘사한 동판은 1983년 제작되어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철거 되었다.


MBC Home > 프로그램 > 뉴스데스크

덕수궁 조각상 훼손 엄벌

기사입력 2007-03-12 19:57장미일 기자

 

● 앵커: 덕수궁 분수대에 설치된 물개조형물이 일제 잔재라며 망치로 훼손한 사람에게 법원이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장미일 기자입니다.

● 기자: 병자호란 당시 우리나라를 침략한 청 태종이 인조의 항복을 받은 일을 기념해 만든 서울의 삼전도비입니다.

이 삼전도비가 민족사의 수치라며 지난달 초 누군가 붉은색 래커로 비석 전면에 큼지막하게 빨간 글씨로 철거라는 말을 쓴 일이 일어났습니다.

보름쯤 뒤 붙잡힌 용의자는 정치인들의 잘못으로 우리나라가 또다시 외세의 굴욕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 이 같은 일을 저질렀다고 말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에 대해 법원의 판결이 나왔습니다. 사적124호인 서울 덕수궁 분수대의 일부를 이루는 청동물개상 훼손 사건입니다.

38살 이 모씨는 작년 11월 청동물개상이 일제 시대의 잔재라며 망치로 물개상을 내리쳐 훼손했습니다.

● 이동근 공보판사: 물개, 개의 일종으로 판단하고 물개가 설치된 것은 일본이 민족 말살을 하려고 하는 의도에서 설치한 것 아니냐 하는 취지에서 이러한 범행을 저질렀다고...

● 기자: 법원은 오늘 이 씨에 대해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습니다.

재판부는 범죄 경력이 없는 점을 감안해 비록 형을 감경한다면서도 사적훼손은 처벌받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집행유예가 엄벌인가, 자의적 판단으로 아무거나 훼손하면 문화재가 남아있을 게 있겠는가. 석굴암 본존불도 우상이라고 파괴하면 박수칠 일인가.


노태우 전 대통령 생가 방화범 잡고보니…

2007년 삼전도비 훼손범

 

 

대구 동부경찰서는 16일 노태우 전 대통령의 생가에 불을 지른 혐의로 백모씨(44·경기도 수원시)를 붙잡아 조사하고 있다.

백씨는 지난 12일 오전 4시쯤 대구시 동구 신용동 노 전 대통령 생가에 들어가 시너 2ℓ를 뿌리고 라이터로 불을 지른 혐의다. 당시 불은 생가 내부의 목조 마루 4곳과 안방·작은방의 문 일부에 그을린 흔적을 남기고 꺼졌다. 당시 그는 현장에 ‘정의실천행동당’ 명의로 작성된 A4용지 두 장 분량의 편지를 남겼다. ‘노태우를 단죄하며’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편지에는 생가에 불을 지른 이유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반감, 자신의 요구사항 등이 적혀 있었다.

경찰은 사건 현장 CCTV에 찍힌 차량 번호판을 추적해 경기도 수원시에서 백씨를 검거했다.

경찰조사에서 백씨는 순순히 범행을 자백했으나, 자신의 행동에 대해 크게 죄의식을 느끼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백씨가 평소 자신은 불의를 보면 못 참으며, 전직 대통령에 대한 불만때문에 생가에 불을 질렀다고 했다. 정치적인 의도가 있거나 누군가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닌, 본인의 강한 신념에 따라 범행을 저지른 것 같다”고 말했다. 편지에 거론된 ‘정의실천행동당’ 역시 따로 구성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백씨 혼자 만든 정체불명의 기구라는 것이 경찰의 설명이다.

백씨는 2007년 2월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에 있는 사적 101호 삼전도비에 붉은색 래커로 ‘철거370’이라는 문구를 써넣는 등 비석을 훼손해 징역 1년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은 전력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노진실기자 know@yeongnam.com  영남일보


타오르는 사회불만, 문화재로 옮겨붙는다

 

 입력 2008-02-13 02:50:00 수정 2009-09-25 16:21:32

■ 최근 문화재 훼손 ‘反사회적 반달리즘’ 경향 뚜렷

11일 경찰에 붙잡힌 숭례문 방화 용의자 채모(70) 씨의 범행 동기는 토지 보상금이 적은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채 씨는 같은 이유로 2006년 4월 서울 창경궁 문정전에 불을 질렀다가 잡혀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숭례문 방화 동기에는 당시 처벌이 부당하다는 불만도 포함된 것으로 드러났다.

정신의학계는 숭례문 방화 용의자로 지목된 채 씨가 고령에도 불구하고 방화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 점, 의도와 계획을 가지고 반복적으로 방화를 한 점 등으로 미뤄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전홍진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교수는 “대개 분노는 시간이 지나면 수그러드는데 채 씨처럼 방화를 통해 분노를 지속적으로 표출하는 것은 반사회적 인격장애의 대표적인 증상”이라고 말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증상이 반달리즘(문화예술 파괴)과 만난다는 점. 채 씨처럼 국가와 사회에 대한 개인적 불만을 문화재에 대한 테러로 표출하는 ‘반사회적 반달리즘’ 경향이 최근 뚜렷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불특정 다수나 일반 건축물이 아니라 국가적 상징성과 사회적 공공성이 강한 문화재로 그 타깃이 바뀌고 있는 상황이다. 2006년 5월 경제난으로 인한 불만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의 서장대 2층 누각을 잿더미로 만든 방화범 안모(26) 씨, 지난해 4월 트럭을 몰고 운현궁 정문으로 돌진한 신원 불명의 남성 등이 그 같은 예.

그렇다면 이들은 왜 하필 문화재를 노리는 것일까.

표창원 경찰대 교수는 “반사회적 반달리스트들은 일반 방화범과 달리 인명 피해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공장소를 타깃으로 삼지 않는다”고 분석한다.

이들의 타깃은 국가나 사회 자체이기도 하지만 문화재 파괴로 힘들어질 공무원, 관료들이다. 이 같은 의도를 관철하는 데 문화재 파괴가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은 또 타인들도 자신처럼 국가, 사회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을 것이란 착각에 빠져 자신이 대표로 나서 문화재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표 교수는 “방화범은 파괴 대상의 피해가 심각할수록 자신이 주목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전통이 오래된 문화재일수록 그 피해가 클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반사회적 반달리스트 중에는 부정적인 이미지의 문화재를 타깃으로 삼아 정의를 이루겠다는 이들도 있다. 지난해 붉은색 페인트로 사적 101호 삼전도비를 훼손한 백모(40) 씨가 대표적인 경우. 삼전도비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이 인조의 항복을 받은 뒤 세운 비석이다. 치욕의 역사가 기록된 삼전도비를 왜 보존하느냐는 반감에서 비롯된 행위였다.

이제 문화재는 언제 어디서 반달리스트의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이를 막을 방법은 없는 걸까.

전문가들은 덴마크 코펜하겐 항구의 명물 인어공주상 훼손 사건처럼 외국에서도 문화재 테러가 가끔 일어나지만 철저한 예방, 감시 시스템 때문에 대부분 미수에 그친다고 말한다.

국내에서도 문화재에 대한 접근을 통제하지 않으면서도 해당 지역이 집중 관리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수상한 행동을 할 경우 바로 제지당할 수 있다거나, 중요 문화재에 가까이 갈 때는 소지품을 맡기게 하고, 보안이 필요한 문화재에 접근할 때는 절차를 밟게 하는 등의 체계가 갖춰지면 이상행동자가 금방 눈에 띌 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재 방화에 대해 강력한 처벌 규정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방화행위는 형법 165조에 따른다고 돼 있다. 그러나 형법에는 문화재 방화를 가중 처벌하는 규정이 없고 차량이나 공중전화에 방화한 것과 같은 수준의 처벌을 받는다. 전문가들은 “2006년 문정전 방화처럼 인명 피해가 없다고 정상 참작돼 집행유예를 받은 것이 숭례문 화재라는 참사로 연결됐다”고 말했다.

한편 전문가들은 방화 범죄의 특성을 고려할 때 문화재에 대한 추가 모방 범죄 가능성도 우려하고 있다. 표 교수는 “방화는 사회적인 주목도가 높기 때문에 모방 효과가 다른 범죄에 비해 높다”면서 “이번 사건으로 사회 불만을 가진 일부 사람들이 다른 문화재에 모방 범죄를 저지르는 것에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이진한 기자·의사 likeday@donga.com

:반달리즘(Vandalism):

문화의 유구한 역사를 무시한 채 문화유산이나 예술품을 파괴, 약탈하려는 경향을 뜻한다. 455년경 유럽의 민족 대이동 때 반달족이 로마를 점령해 약탈과 파괴를 일삼은 데서 유래했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이 세계 최대 마애불인 바미안 석불 파괴를 자행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고운 최치원선생은 조병갑의 1천년 선배 |  
2007.01.17 00:46
퍼스나콘/아이디 영역
무궁화(bohc****)
http://cafe.naver.com/rmsdka/2801

 

고운 최치원선생은 조병갑의 1천년 선배  

대신사의 1천년전 조상이신 고운 최치원선생은 경남 함양에서 태수를 지냈다
(신라 진성여왕시기)


그 뒤 1천년후 조병갑도 함양에서 군수를 지낸다.
그러니까 1천년 선배다.


고운선생은 홍수 방지를 위해 하천 둑에 숲을 조성한다.
1천년후 그 숲에 조병갑은 자신의 공덕비를 세운다.
그리고 2세 교조 최시형 선생을 사형시킨다.

그리고 2007년 1월 현재 그 숲에 [역사인물공원]이 조성되어
고운 선생의 흉상과 조병갑의 공덕비가 불과 11m 간격을 두고 서 있다.


뒤죽박죽인 역사, 꼬꾸라진 역사 , 아무 생각없는 우리들....
조병갑의 공덕비에는 '영세불망비' 라고 써 있다


아마 그의 바램대로 선정을 베푼 목민관으로 [영세불망] 할지도 모르겠다.
우울한 저녁이다.

..................................................................................................................................

 

평리원, 육군법원, 광희문-해월 최시형의 수형으로 점철 |  
2007.03.28 00:03
퍼스나콘/아이디 영역
무궁화(bohc****)

카페매니저 http://cafe.naver.com/rmsdka/3817 

 

평리원, 육군법원, 광희문-해월 최시형의 수형으로 점철  

 

동학은 창도한 수운 최제우와 그의 제자 해월 최시형이 참형을 당하는 유래없는 종교탄압을 받았다. 수운 최제우는 1864년 3월 10일 대구장대에서 '좌도난정율(左道亂正律)'이란 죄목으로, 해월 최시형 역시 육군법원에서 '좌도난정율'로 순도하였다.


해월 최시형은 1898년 4월 5일 강원도 원주군 북면 송골에서 피체되었다. 4월 5일은 동학이 창도된 날로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전날 수제자인 손병희와 김연국 등 주요 두령들이 해월 최시형의 집으로 모이자 '이번 향례는 각각 집으로 돌아가서 지내라'하였다.

 

 의암 손병희는 '문도들이 모여서 향례를 지내는 것은 해마다 하는 일이옵거늘 어찌 이런 말씀이 계십니까?'하고 여쭙자 해월은 '여하튼지 내말을 어기지 말고 들어라'하였다. 이에 손병희, 김연국, 손병흠, 신응식, 임순호 등 모두 돌아가고 해월 혼자 남게 되었다.


4월 5일 이른 아침 혼자 누구를 기다리는 듯 조용히 기도를 하던 해월 최시형은 송경인(宋敬仁)이 경병을 거느리고 달려들어 체포하였다. 해월 최시형은 여주를 거쳐 선편으로 서울에 압송되었다. 서울에 온 해월 최시형은 즉시 광화문 경무청(光化門 警務廳, 1927년 당시 昌德宮 侍衛隊 있던 곳)에 갇히게 되었다. 해월 최시형은 이곳에서 10여 일동안 취조한 후 서소문감옥(西小門監獄, 1927년 당시 서소문정 75번지로 加藤俊平, 平田豊丈 등의 주택)으로 옮겨졌다.


서소문감옥에 있던 해월 최시형은 평리원(平理院, 1927년 당시 경성지방법원)으로 재판을 받으러 다니곤 하였는데 당시 해월 최시형을 옥바라지하던 이종훈은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날마다 김준식 집에 내왕함으로 신사께서 언제 재판받으러 가시는 것을 알고 그 날이면 새벽 조반을 하고 그 감옥 문 밖에 미리미리 가서 이리저리 거닐면서 기다리다가 열시나 열한시쯤 되면 신사께서 나오심을 보이게 되는데 신사께서 아무리 기골이 장대하신 어른일지라도 나이 칠십이세나 되시고 수삭동안 옥중에 계시고 겸해서 병환으로 오래동안 계신 어른으로서 목에다 전칼을 쓰기고 나오시는 얼굴을 보이면 뼈가 저리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였다.

 

그 목 전칼이 하도 무거워서 옥졸 한 사람이 칼 앞머리를 받들고야 평리원으로 들어오시게 되었다. 들어오시다가는 '아이고 목이야! 아이고 다리야!' 하시면서 한 두 번씩 그대로 길에 앉으셔서 쉬어서야 오시였다. (이종훈씨는) 신사의 곁을 따라다니면서 보았는데 신사 묵묵히 바라보시면서 어떤 때에는 퍽 비감하시는 때도 있었는데 그런 때에 제일 괴로운 것은 작꾸 눈물이 쏟아지는데 그 자취를 곁에 있는 사람들이 모르게 하기와 어찌하면 이 눈물이 못나오게 할까함이 제일 고충이었다. 그렇게 다니면서 재판받기를 10여 차례 하시었다."

당시 해월 최시형은 72세의 고령에다가 병환으로 몸마저 가눌 수 없는 상태였지만 죄인이 병사하게 한다는 것은 나라의 체면으로나 정부의 신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 하여 6월 2일 좌도난정율이라는 죄명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당시 재판은 고등재판소에서 담당하였으며 재판장은 조병직(趙秉稷), 판사에는 주석면(朱錫冕), 조병갑(趙秉甲), 예비판사에 권재운(勸在運), 김탁(金鐸), 주사에 김하건(金夏鍵) 등이 참여하였다.

 

6월 2일 정오 서소문감옥에서 육군법원(陸軍法院, 전 좌포청이며 1927년 당시 경성 수은동 59번지로 국민협회와 시가평론사가 빌려 들어있는 총독부 소관집인데 바로 단성사 뒷집)으로 옮겨져 이날 오후 5시 경에 교형으로 집행되었다.


해월 최시형은 순도 후에도 수난을 당하였다. 1894년 동학혁명 당시 안성의 참령 이선재(李善在)가 동학군에게 희생되었는데 그의 아들이 항상 아버지의 원한을 풀고자 하던 중에 해월 최시형이 교형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교형장의 담을 넘어와 해월 최시형의 뒷머리를 나무로 난타하여 크게 상하였다고 한다.


해월 최시형은 형 집행 후 사흘 뒤 광희문 밖에 내다 묻었다. 당시 광희문(光熙門)은 수구문(水口門) 또는 시구문(屍口門)으로 불리웠다. 이종훈은 해가 어슷어슷 넘어가자 의형제를 맺은 김준식과 상여꾼 두 사람을 데리고 광희문으로 갔다. 광희문에는 민뱃돼지이라 불리는 민흥호가 지키고 있자 동대문쪽으로 돌아가 한밤중을 이용하여 운구하기로 하였다.

 

칠흙같이 어두워지며 비가 내리자 이종훈은 미리 준비한 쇠초롱 하나, 황초 다섯가락, 우산 하나, 배 한 필, 칠성판 하나를 가지고 '동학괴수 최시형(東學魁首 崔時亨)'이라는 팻말을 찾았다.

 

당시 해월의 시신은 못쓰게 된 헌요 한 겹이 감겨있을 뿐이었다. 이종훈은 준비해 간 배로 시신을 싸 칠성판에 모시고 밤을 새워 광나루를 건너 광주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손병희, 김연국, 박인호 등 교인과 의논한 후에 송파(松坡)에 있는 이상하(李相夏)의 집 뒷산에 안장하였다. 이후 1900년 3월 12일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 천덕산(天德山)에 이장하였다.

 

17.금성토평비


종 목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75호 
지 정 일 1990.02.24
소 재 지 전남 나주시  과원동 109-5 
시 대  조선시대


고종 31년(1894) 동학농민운동이 터졌을 때, 관군이 동학군과 싸워 나주성을 지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거북을 새긴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받침돌은 땅 속에 파묻혀 그 윗부분만 보이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뉘어 농민운동이 일어나 나주에까지 동학군이 쳐들어오게 된 과정과 당시 나주목의 수령이던 민종열 목사가 여러 장수들을 지휘하여 치밀한 방어계획을 세웠던 사실, 그리고 관군과 동학군이 나주목에서 싸우는 과정등을 자세하게 서술하였다.


동학군에 반대했던 유림들이 뜻을 모아 세운 것으로 짐작되며, 비문은 기우만이 짓고 송재회가 글씨를 써서 고종 32년(1895)에 세웠다.


동학항쟁 당시 나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지방의 역사적 사실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여 동학농민운동의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top